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새미 Nov 06. 2024

돌아 돌아 등원하는 길

나에게는 피로한 일상도,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모습일 수 있다.

둘째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첫째는 유치원에 다닌다. 우리 집(아파트다.)을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어린이집은 우리가 사는 동 바로 뒷 동이고, 유치원은 우리 아파트 뒤로 길 하나를 건너 옆 마을에 있다. 그런데도 둘째는 꼭 누나부터 등원을 하자고 조른다. 그 짧은 거리를 꼭 자전거를 타고 등원을 하는 둘째인데, 자전거를 더 오래 타고 싶어서인지 조금이라도 등원 시간을 늦추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이유 포함 +α 겠지만) 아이는 어쩌다 자기 먼저 등원하게 되면 울고 불고 난리가 난다. 그럼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전거 탄 둘째를 대동하고 옆마을 유치원으로 첫째 등원을 시키고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돌아 둘째를 등원시킨다.


‘등원’이라는 단어 뒤에 자연스럽게 ‘전쟁’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시간은 정신없는 난리통이란 말이다. 등원을 위해서 준비과정을 거치는 집 안에서도 난리지만, 다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서 원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도 만만치가 않다. (요즘은 주로) 첫째는 킥보드, 둘째는 자전거를 타고 등원을 하는데 둘째의 묘한 경쟁심리 때문에 누나보다 늘 앞서 달리고픈 둘째는 일단 냅다 달려 나갈 때가 많다. 그러면 나는 그런 둘째에게 “여름아 같이 가!” “기다려!” “멈춰!” “차 오는지 봐야지!”를 끊임없이 외치면서 동시에 아이 쪽으로 다가오는 차가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함과 동시에… ‘뛴다!!!.’ 그렇게 운동 아닌 운동을 하면서 가는 등원길. 가까운 순서대로 둘째가 먼저 등원하면 등원길이 훨씬 수월한데, 꼭 누나 유치원까지 돌아 돌아 등원을 하겠다고 우기는 둘째 덕에 등원길은 3~4배쯤 오래 걸리고, 3~4배쯤 힘들다. 그럼 나는 선선한 가을바람에도 땀을 흘리며 자연스럽게 피로함을 느낀다. 3분이면 갈 어린이집을 15분 20분을 걸쳐 돌아가는 길. 괜히 내가 아이의 꽴에 넘어가 몇 번 등원 순서를 바꿔준 대가를 이렇게 치르는구나… 싶은 게 이제는 누나가 먼저 등원하는 게 당연한 순서가 되어 버린 것마저 원망할 사람이 없어 나 스스로를 원망해 본다. 그러면서도 태어나자마자 누나가 있던 (그래서 엄마랑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었던) 둘째에게 이렇게나마 보상을 해주는 것이라 스스로 자위하기도 하면서, 시간이 없어 급하면 원망도 했다가 시간 여유가 있으면 그 시간을 아름답게 포장하며 두 마음을 오가는 등원길이다.


그렇게 돌아 돌아 등원을 하는 길이었다. 그날 따라 누나 유치원 앞마당에서 키우는 토끼도 한참 동안 구경하고, 아파트에서 샷시교체를 하느라 사다리차를 대동해 교체 작업을 하고 있는 집을 또 한참 동안 구경을 했다. 전날 내린 비에 군데군데 생긴 물웅덩이도 꼭 일부러 찾아가 밟고 지나야 하고,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에 (헬리콥터 소리던가) 하늘 한 번 올려다봐야 하고, 주차된 차와 지나가는 차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고 대답하기를 여러 번, 방지턱 넘는 것을 도와줬다가 스스로 하겠다고 성질을 부리며 다시 돌아가 한참만에 넘어온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말고 “이렇게 가는 거 뭐라고 하지?”라고 묻는 아이. 처음에는 그 질문이 뭘 묻는 건지 몰라 한참을 실랑이를 했더랬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대답이 나온다. “우회전.” “쭉 가는 건?” “직진.” “이렇게 가는 건?” “좌회전.”


코 앞에 있는 어린이집을 이렇게 돌아 돌아 다채롭게 갈 일인가… 지친 한숨을 몰아쉬려던 찰나, 문득 친구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 글이 생각이 났다. 직장에 다니면서 육아를 하는 그 친구는 늘 등원길에 마음이 급했다. 아이를 얼른 등원시키고 자기 자신도 시간 맞춰 출근을 해야 했기에 더 그랬을 터였다. 하수구 구멍도 한 번 들여다보고 싶고, 낙엽도 밟아보고 싶고, 등원 길에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를 마이쭈 하나 입에 물려주어 달래며 유아차에 태워 동동거리며 등원을 시키는 (그렇게 등원을 하는 그녀도 땀이 나기는 마찬가지) 자신 옆으로 이것저것 구경을 하며 여유롭게 등원을 하는 엄마와 아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친구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고 했다. 아이와의 짧은 이 시간들 마저 누리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던 모양이었다. 그 친구의 그 짧은 한탄의 말이 적힌 메시지를 보며 아차 싶었다. 내가 피로하다고 생각하는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부러운 순간이었음을 상기했다.


사람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기가 어렵다. 가진 것을 잃어봐야 비로소 그것이 감사의 제목이었음을 기억하게 되는데, 그 친구 덕분에 감사하게도 나는 그 시간을 잃지 않고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걸 알아도 감사가 쉽지 만은 않다. 감사한 시간이라고 하루종일 재활용품 수거차가 재활용품들을 다 싫을 때까지 넋 놓고 앉아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래브 버킷을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 등원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덜 재촉하고 덜 동동거리며 나 또한 그 돌아 돌아가는 등원길을 누려보려고 노력한다. 아이 덕에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생각하며, 아이 덕에 하루하루 변해가는 나무의 색깔을 감상하고, 아이 덕에 바스락바스락 낙엽을 밟아본다 생각하면서… 내게는 피로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부러운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그대가 수박이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