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백발이 너무나 멋진 할아버지 한 분이 부동산 문 앞을 기웃기웃하신다.
"왜요? 어르신.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응. 여기 아파트는 전세가 얼마나 하나?"
자그마한 키에 보청기를 끼고 계신 어르신의 모습은 젊은 날, 꽤 인기 있었을 것 같은 품위 있는 모습이다.
"아. 여기 전세가 2억이에요. 매매는 2억 3천만 원 정도 하구요. 집 보여드릴까요?"
"그래 어디 한 번 봄세."
전세로 나온 집도 보여드리고, 매매로 나온 집도 보여드렸다.
매매로 나온 집은 정남향에 앞에 막힌 것이 없어서, 도시가 한눈에 다 보일 정도로 조망이 멋지다.
"오, 이 집이 좋네"
어르신은 경기도에서 오셨다고 한다.
부산에서 부촌이라 불리는 남천동에서 60평이 넘는 집에서 사셨고, 젊을 때는 건설회사를 운영하셔서 정말 부유하셨단다.
자식들은 장성해서 두 딸은 미국에 있고 아들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며, 자식 자랑 깨알같이 하시는 할아버지가 너무 귀여우시다. 자식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느라 지금은 경기도에 44평형 아파트 한 채가 전부인데, 그 아파트가 이번에 팔려서 고향으로 내려오고 싶어 집을 보러 오셨다고 하셨다. 지금도 남천동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비교적 쾌적하고 집값이 저렴한 우리 동네가 맞을 것 같다고 하신다.
"어르신, 전세 말고 매매로 하시고 싶은 거예요?"
"뭐라고?"
"마지막에 보셨던 집. 매매로 나왔던 그 집. 맘에 드시냐고요?"
"아... 그래 그래."
어르신은 귀가 많이 어두우셔서 보청기를 끼시고도 잘 못 알아들으시는 듯했다.
말하는 사람의 입모양을 봐야, 정확히 이해를 하시는 눈치다.
"그럼.. 그 집으로 할까요?
이사는 언제 가능하세요?"
"아... 오늘 계약하고 가려고
돈 들고 왔어."
"아뇨. 아뇨. 이사를 언제 하셔야 하냐구요?"
"8월. 8월에"
오늘 계약서를 쓰고, 경기도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어르신의 이야기에 매도인에게 전활 했다.
오늘 당장 계약서를 쓸 테니 조금 깎아줄 수 있냐니 백만 원만 깎아주겠단다.
계약은 저녁시간이 되어야 가능하다해서, 어르신은 할 수 없이 다른 곳에서 시간을 때우다 저녁에 다시 오기로 했다.
저녁. 계약을 하려 모인 자리.
갑자기 매도인이 말을 바꾼다.
"저희 집에 붙박이 장도 새로 했고, 에어컨도 새 거인데 두고 갈거라 백만 원 더 받아야 되겠는데요."
(아니. 이제 와서? 진작 이야기해야지. 돈 백만 원에 빈정 상하게 이럴 거야 정말?!
하루종일 기다린 어르신은 뭐가 된단 말이야. 이런 똥매너를 보았나.)
"어르신. 어르신!
집 파시는 분이, 붙박이 장이랑, 에어컨이 새 거라서 백만 원 더 주셔야 계약한다고 하시는데 이 계약하지 말까요?"
내가 또박또박 큰소리로 어르신께 말씀드렸다.
"응...? 그래그래. 백만 원 더 준다 그래. 젊은 사람들이 돈 백만 원 많이 아쉽지. 그리 하자고 그래.
그나저나 내가 전세계약하고 오겠다고 마누라한테 말하고 왔는데 집 샀다고 하면 혼나지 않을까 몰라. 하하."
점퍼 안주머니에서 꺼낸 낡은 지갑에서 천만 원 수표 두 장을 꺼내시는 어르신.
할아버지는 할머니께 전세 계약 잘하고 오마 하셨을 테고,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단디 챙기라고, 고향에 내려간다는 설렘이 담긴 잔소리를 하셨을 테지.
그렇게 계약은 말 바꾸는 매도인 덕분에 나 혼자 꽁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한 달 후, 입주를 20여 일 앞두고 경기도 어르신께 전화가 왔다. 사모님이 집을 못 보셔서 집을 좀 다시 볼 수 있는지,
살던 집 보다 집이 작아서 치수를 재어봐야 무얼 버리고 무얼 남겨서 이사를 올지 알 수 있다고 하신다.
"당연하죠, 어르신. 집주인에게 이야기해서 집 볼 수 있도록 예약해 둘게요."
할머니도 참 고우시다.
'살던 집보다 집이 많이 작아서, 식탁이며 장롱이며 장식장이며 모두 버려야겠네'라고 말씀하시면서
전세 알아보라 했더니 집을 덜컥 샀다며 할아버지를 타박하시는 것도 잊지 않으신다.
"전세가격이나 매매 가격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아서, 전세로 계신 것보다 나으실 거예요. 자꾸 이사 다니면 힘드시잖아요.
잘하셨어요."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 나의 등짝을 사모님은 한 대 때리시며 '영감 편들지 말아~!'라는 눈빛을 보내신다.
"경기도에서 오시느라 너무 힘드셨죠? "
"에구. 운전하지 말라는데 굳이 영감이 운전해서 내려왔네. 힘들 텐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어머님 모시고 드라이브하고 싶으셨나 보다. 하하. 운전 조심해서 올라가셔요. 가시는 길에 좋은 데 들러서 맛난 것도 사드시고 구경도 하시고"
"그래, 그래. 이삿날 보자고."
"네~!. 이사 오시면 저희 사무실에 종종 오셔요. 맛있는 커피 드릴게요!"
그렇게 금슬 좋아 보이는 노부부는 낡은 승용차를 타고 다시 경기도로 향하셨다.
경기도 어르신의 잔금을 며칠 앞둔 금요일 아침.
월말이라 정신이 없다. 다른 계약건의 잔금도 처리해야 하고, 법무사에 매도인, 매수인, 상담손님까지...
좁은 사무실이 돛대기 시장 같다.
나도 반쯤 정신줄 놓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사무실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서성 서성 하고 계신다.
"어르신! 오늘 잔금날 아닌데? 어떻게 오셨어요.?"
깜짝 놀라며 내가 물었다.
"아이고, 저기. 내가 할 말이 좀 있어서....!"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직감이 든다.
아... 계약서까지 다 쓰고, 실거래신고까지 다 완료된 상태인데, 무슨 일인 걸까.
계약서 쓴 지도 한 참이 되었는데, 잔금일이 코 앞인데...
할아버지는 어렵게 말을 꺼내신다.
"계약금을 좀... 돌려받을 수 있을까? 다는 못 받아도 돼. 몇 백만 원 제하고 줘도 상관없어"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이번에 집을 판 돈을 모두 아들의 사업자금으로 주어야 된다고 하신다.
"아니. 그럼 어르신은 어디서 사시려고요?"
"우리 부부야, 보증금 5백만 원 정도 하는 방 한 칸 얻어서 살면 되어. 그러니 부탁 좀 함세... 집주인 좀 만날 수 없을까?"
가슴이 꽉 막힌다.
얼마나 사정이 급박했으면, 밤이 새도록 운전을 해서 이렇게 내려오셨을까.
젊은 매도인은 과연 계약을 해지하고 돈을 돌려줄까?
다른 매수자를 찾기에도 잔금일이 너무 촉박해서 불가능한데...
매도인께 전화를 걸어 어렵게 부탁을 해본다.
"저... 고객님. 매수하셨던 어르신 사정이 지금 너무 안 좋으셔서요. 혹시 계약을 해지하고 계약금을 일부라도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
단칼에 거절!이라는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매도인.
자기도 이사 갈 집 계약금을 이미 걸었고, 계약서 쓴 지가 언제인데 잔금일 다 돼서, 이러면 어쩌냐는 취지다.
맞다. 매도인의 입장도, 말도, 이해가 된다.
계약서에도 '매수인은 계약금을 포기해야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다.
매도가 인정적으로 얼마라도 돈을 돌려준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주기 싫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어르신이 밤새 운전하셔서, 부탁하러 오셨는데. 잠깐 뵙고..."
"안 됩니다! 이런 일로 더 이상 전화하지 마세요."
" 몇 백이라도 돌려주심...."
전화가 끊겼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단호박일 줄이야.
혹시나 매도인이 따뜻한 마음이 있어, 사정을 조금 헤아려 주진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는 깨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르신.... 꼭 그 돈을 아드님께 다 주셔야 하나요?
혹시 이사를 오실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어르신도 사셔야 되잖아요. 그렇게 다 줘버리면 어르신은 어떻게 살아요?
매도인은 단 돈 십원도 줄 생각이 없는데... 너무 아깝잖아요."
어르신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오는 대로 떠든다.
"안 된다고 하지? 하이고... 그럴 거야.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온 거야.
......
내가, 귀만 어둡지 않았어도 더 일해서 돈을 더 벌 수 있었을 텐데.
그랬으면 아들을 더 도울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이리될 줄 알았나..."
어르신의 자조 섞인 한탄이 들릴 듯 말 듯 귓가를 맴돈다.
"이 와중에 아드님 걱정만 하시네요."
"어제 마누라랑 집 근처 공원을 한참 걸었어.
많이 걷고 나니 답답한 가슴이 조금 내려가더라고.
아들놈이 죽겠다는데 어쩌겠어. 줘야지."
발걸음을 돌리시는 어르신의 어깨가 너무 작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걸어가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사진처럼 기억 속에 저장된다.
사람에게, 자식이란 새끼란 어떤 의미 일까.
사실 나 역시, 나와 내 남편이 세상에 없는 날이 와도,
내 아이들이 세상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기에 어르신의 선택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사람들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의 부모에게는 자식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힘들고 서러운 일도 자식들 생각하며 참아내고, 가끔 마음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는 나쁜 탐욕도
행여 자식들한테 나쁜 기운 뻗칠까 얼른 걷어낸다.
그렇게 앞뒤 없고,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살던 나를, 사람 만들어준 것이 내가 낳은 내 아이들일진대,
자식이 아프다는데, 죽겠다고 하는데, 내 장기를 털어서 팔아서 준들 무엇이 아까울까.
어르신에게도 아들 딸은 삶의 이유였을 게다.
아이가 장성해서 머리가 희끗해져도, 환갑이 다 되어가도,
부모의 눈에는 덩치만 커진,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일 테지.
그래서 내 몸 하나 뉘일 집 한 채 마저 다 줘버릴 수 있었을 테지.
어르신은 어떤 마음으로 운전을 하고 내려오셨을까.
지금쯤 집에는 무사히 잘 도착하셨나...
곱디곱던 할머니께는 뭐라고 하셨을지.
부모는.. 등산길에 설치된 쇠로 만들어진 난간 같은 것인가보다.
행여 산을 오르다 발을 잘못 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까 봐.
지쳐 힘들면 손을 뻗어서 잡고 오를 수 있도록.. 산 끝까지 뻗은 난간.
세월에 녹슬고 삭아 부서져도... 그 자리에 늘 있는 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