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한 여름인데 틀지도 않은 보일러가 돌아간다.
응? 세탁기는 또 왜 이래? 그동안 너무 혹사를 시켜서 삐졌는지 세탁기가 돌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 성가시다.
귀찮은 일들이 한꺼번에 터진다. 정수기 이모도 오늘 필터 갈러 온다고 했는데....
주문한 샌들은 또 엉뚱한 것이 왔네?
어허 참.
아침 일찍 전세 계약이 잡혀 있어서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지만 여기저기 바삐 전화를 한다.
정수기 이모한테 전화를 해서 약속을 미루고, 보일러 기사님께 방문을 요청하고...
정신없이 계약준비를 해서 물건지 부동산으로 향했다.
임대인은 벌써 도착해 있고, 임차인은 조금 늦을 거라는 연락이 왔다.
여유 있고 강단 있어 보이는 임대인 사모님은 시세보다 전세금을 2천만 원이나 싸게 내어 놓으셨더랬다.
마침 절박해 보이는 중년 부부가 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와 가까운 집이 시세보다 싸게 나왔다며 단번에 결정을 한 케이스였다.
임차인 여자가 헉헉거리며 사무실에 들어선다.
"아, 죄송해요. 남편명의로 계약서를 써야 하는데 제가 대리로 와서 서류준비 하느라 좀 늦었어요."
"아뇨. 괜찮아요. 많이 늦지 않으셨어요."
물건지 소장님이 계약서를 출력할 동안 등기부등본, 임대인의 신원과 세금 완납 증명서를 확인시켜 드렸다.
"오늘 계약금은 얼마를 준비하셨나요?"
물건지 소장님의 질문에 임차인 여자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계약금요...?"
여자는 계약금을 준비하지 않았다. 지난주에 넣었던 가계약금 백만 원으로 계약서를 쓰는 거라고 생각했단다.
"? 지난번 입금한 백만 원은 계약금의 일부인 거고, 계약서 쓸 때는 보증금의 최소 5%는 준비하셔야 되는데...! 지금 살고 계신 집은 전세 아닌가요? 지난번엔 계약서를 어떻게 쓰셨어요?"
물건지 소장님의 질문에 여자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거주한 지가 꽤 오래되었고, 그땐 친정아버지가 계약서를 쓰셔서 몰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임대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아, 지금 당장 돈이 준비가 안되시는 건가요? 오늘 계약서 도장 찍고 오늘 중으로 혹은 내일까지 입금한다는 특약을 넣으면 돼요. 보증금이 1억 5천만 원이니 지난번 가계약금 백만 원 빼고 650만 원만 더 준비하시면 됩니다." 물건지 소장님의 친절한 설명에도 여자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기는 전세자금 대출받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을 받아서 잔금을 다 치면 된다고 막연히 생각했단다.
"지금 살고 계신 집은 전세 자금 대출이 없나요?"
"아니요. 80프로 받았죠. "
"계약금이 5% 이상 입금되지 않으면 은행에서도 전세자금 대출을 해주지 않아요. 650만 원 구할 방법이 없는 건가요?"
"저... 일주일 정도만 시간을 주시면 어떻게든 해볼게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쩔 줄 몰라하는 여자를 보며, 안쓰럽다는 마음과 함께 '내가 빌려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자는 잠깐 전화를 좀 하겠다며 사무실 밖에 나가서 남편과 한 참을 통화를 한다. 그러더니 사무실로 돌아와 꺼지지 않은 전화기를 나에게 바꾸어 준다.
"지금 당장 계약금을 준비하라는 법이 어딨 습니까? 난 돈 없는데 어쩔 건데? 계약 취소 하쇼. 계약금 돌려달라고..." 쉴 새 없이 혼자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측은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건... 매너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켜보던 임대인이 입을 연다.
"내가 들어오는 세입자들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웬만하면 다 맞추어주는 편이에요. 보증금도 많이 받지 않구요. 도배를 해 달라면 해주고, 고칠 것이 있으면 지체 없이 고쳐줘요. 그런데... 이건 아닌 거 같아요. 계약서 쓸 때 계약금을 챙겨 오는 것은 기본 아닌가요? 내가 오늘 계약서 때문에 새벽부터 멀리서 한 시간 넘게 운전해서 왔어요. 지금 살고 있는 세입자도 벌써 집을 구한 상태라서 나는 댁이 우리 집에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돈을 마련해서 그 사람에게 줘야 해요. 오늘 하루 시간 드릴게요. 오늘 중으로 입금 안되면 계약은 없던 걸로 합시다"
임대인이 가계약금 백만 원을 돌려줄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돌려줄 수 없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했다.
"남편분 화 가라앉으면 잘 설득해서, 계약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임대인에게 부탁을 한 번 해보시거나, 주변 사람들한테 빌리더라고 이 집을 계약하는 것이 맞아요. 가계약금 백만 원 날릴 수 없잖아요."
여자를 다독여 보내며 내가 말했다.
여자는 풀이 죽어 발걸음을 돌리며 들릴 듯 말 듯 말한다.
"남편에게 잘 말해볼게요"
여자가 돌아가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린다.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시종일관 소리를 질러대는 남자는 계약 안 할 테니 무조건 돈을 돌려 달란다.
"네. 임대인께 부탁드려 볼게요"
"뭐?! 부탁드려 봐? 당연히 줘야지 뭘 부탁이야!"
반말과 욕설을 섞어가며 소리를 지르는 남자에게 물었다.
"계약을 할 때 계약금은 당연히 필요한 거예요, 최소 보증금의 5% 이상 입금했다는 계약서 없이는 전세자금 대출도 못 받아요. 살면서 전세계약을 한 번도 안 해보신 거예요? "
"아 됐으요. 나는 잔금 받는 날 돈 받아서 그날. 대출도 하면 된다고, 돈 내놔라고. 세상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 650만원을 턱턱 구하냐구."
말이 통하지 않는다.
혼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다 비아냥 대듯 노래부르듯이 "부동산 처음 해요? 부동산 처음 해요? 부동산 처음해요?"
이 말을 앵무새처럼 수십 번을 반복한다.
임대인 전화번호는 물건지 부동산 소장님만 가지고 있어서, 내가 직접 부탁드리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도 사정 설명하고 돌려받을 수 있도록 간곡히 부탁드렸으니 조금 기다려보자는 문자를 여자에게 보냈다.
그러자 남자는 득달같이 물건지 소장님에게 전화를 해서는
한 달 뒤에 사는집 보증금 받으면 계약금 넣을 수 있는데 임대인이 계약을 깬 거니 배액 상환을 하라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돈을 돌려줄 것 같으니 더 받아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는지 앞뒤 맞지 않는 논리와 악다구니를 배설하듯 쏟아냈다.
내 마음속 다중이중 잔인한 아이가 쉼 없이 비난을 퍼부어 댄다.
'쓰레기구나. 네가 그렇게 살아왔으니 나이 50이 다 되어가도록 네 삶이 그렇게 구질구질한 거야. 아마 넌 죽을 때까지 남 탓만 하고 억울해하며 그렇게 살겠지. 동정의 가치도 없는 정말 불쌍한 인생이다. 네 옆에 있는 아내는 아마 지옥 속에 사는 느낌이지 싶다. '
마음속 잔인한 아이가 하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좋은 생각. 좋은 생각'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워본다.
"소장님. 아마 그 사람들에겐 백만 원이 천금보다 큰돈일 거예요. 임대인 설득 좀 해주세요. 임대인이 조금이라도 돌려주시면 제가 차액 메꿔서 돈 보낼게요."
그래도 마음 넓은 임대인이 50만 원을 돌려주겠다고 한다. 내가 50만 원을 보태서 가계약금 100만 원을 돌려주었다. 기분이 안 좋다. 무척 운수가 사나운 날이다.
"자기야. 보일러 기사님이 5시 반쯤 온대. 좀 서둘러서 와 줄 수 있어? 내가 기계는 잘 모르니까 자기가 옆에 있으면 좋겠는데..."
"글쎄. 회사에 매인 사람이 그게 쉽지 않잖아.."
"아. 됐어! 도움이 안돼. 씨이"
"일단, 최대한 빨리 가 보....., "
남편의 말을 싹둑 잘라먹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 기분이 혼란하다고 남편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다.
금방 후회가 밀려와서 남편에게 다시 전화를 한다.
"내가... 괜히 자기한테 짜증 낸 것 같아서, 미안하다 사과하려고 전화했어."
"그렇지?! 아차차, 싶었지?. 그랬을 거야. 하하"
별 말 아닌데 웃음이 터졌다. 내가 낄낄거리며 한 참을 웃으니까 남편도 덩달아 웃는다.
그래... 이런 날도 있지.
무척 성가신 날.
사람을 만나면서 오물을 덮어쓴 느낌이 드는 날. 그런 날도 있지.
그래도 그보다 좋은 사람. 좋은 날이 훨씬 많으니까.
'그깟. 50만 원 뭐라고. 내 남편 겁나 재미있고 착한 사람인데... 기분 좋아졌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