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삭 속았수다>
어르신들과 함께 역사 공부를 하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막상 수업에 들어가서 역사 얘기를 풀어 놓다 보면 정작 친구는 그 시절을 몸소 살아낸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양로원이고 노인정이고 그곳에서 만난 어르신 한 분 한 분이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이 될 만큼 곡진한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으셨다는데.
볕 좋은 요양원 아래 스케치북 가득 제주 바다를 그려낸 한 노인을 오버랩하며 시작된 <폭삭 속았수다>는 그렇게 친구가 만난 어르신 중 한 분의 이야기인 듯 실감나는 우리 어머니 세대의 삶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빗대어 풀어낸다.
▲ 폭삭 속았수다 © 넷플릭스
시작은 여주인공 애순의 어머니 전광례(염혜란 분)로 부터 시작된다. 제주 바다 해녀로 물질을 하며 살아가는 전광례는 그악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한 사람 등에 얹힌 식구들이 너무 많다. 일찌기 남편을 잃고 새로운 남자를 만났지만, 염병철(오정세 분)은 그저 그녀가 돌볼 입 중 하나일 뿐이다. 염병철과 사이에서 두 아이를 낳은 전병례는 큰 집에 보내면 상급 학교는 보내주려니 해서 전 남편 소생인 애순을 보낸다. 하지만 눈칫덩이가 된 애순마저 자신의 품에 끌어 안고 만다.
하지만 어머니의 삶은 길지 않았다. 어떻게든 똑똑한 애순을 뭍으로 보내 대학까지 보내겠다고 애를 썼지만 해녀의 직업병이 그녀를 삼켰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전광례는 자신이 죽으면 뒤도 안돌아보고 이 집을 떠나라고 말한다. 가족에 발목 잡히지 말고 너의 삶을 살아가라고.
▲ 폭삭 속았수다 © 넷플릭스
애순은 떠나려 했다. 하지만 떠나지 못한다. 아직 돌봄이 필요한 두 동생을 놔두고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열 살 먹은 애순이 양배추를 키워 팔며 가장이 되었다.
그런데 시인 지망생 애순(아이유 분)은 억척스럽게 양배추를 키워 장에 내다 팔면서도 '양배추 사세요' 한 마디를 못한다. 대신 그녀의 곁에는 그녀 대신 양배추를 팔아주는 양관식(박보검 분)이 있다.
똑부러진 애순이 대통령이 되겠다 했을 때 그럼 자기는 영부인이 되겠다던 관식, 코딱지만할 때' 부터 우직하게 애순을 챙겼다. 큰 아버지가 조구(굴비)를 애순 꺼만 빼놓고 사면, 관식이는 덤이라며 애순이 꺼까지 챙겨 가져다 주었다. 내가 '걸뱅이(거지)'냐며 악을 써도 언제나 관식은 애순의 곁에 있었다. 어머니 상을 당할 때도, 양배추 밭을 홀로 갈 때도 , 언제나
하지만 그런 관식이가 좋으면서도 애순은 언제나 노래 하듯 주장했다. 제주 바다가 징글징글하다고. 그래서 뭍으로 나가, 대학까지 공부할 꺼라고. 남자를 만난다면 '노스탤지어'(유치환의 시 '청마'에 등장하는)도 모르는 남자는 안 만날 거라고 큰 소리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애순이는 시험만 쳤다하면 100 점을 맞는 똑부러지는 아이였다. 반장 선거를 하면 37표를 받았고, 시를 썼다 하면 벽에 걸렸다. 하지만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5,60년대 제주도는 애순이라는 여성이 살아가기에는 척박한 시절이었다. 하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미, 아비도 없이 세상에 기댈 곳 이라고는 없는 소녀에게는.
3월 7일 공개된 4회차 까지의 <폭삭 속았수다>는 '호로록 봄'(호로록; 제주 방언으로 '후르륵')에서 부터 '꽈랑꽈랑 여름'(과랑과랑; 제주 방언으로 '햇볕이 쨍쨍')에 이르기까지 애순의 젊은 시절을 <동백꽃 필 무렵> 임상춘 작가의 감칠 맛 나는 대본으로 <나의 아저씨>의 김원석 감독이 사람 냄새 풀풀 나게 펼쳐낸다.
▲ 폭삭 속았수다 © 넷플릭스
사실 제주 방언을 모르는 타지 사람들이 보면 드라마의 제목 '폭삭 속았수다'는 말 그대로 제대로 속아 넘어갔구나란 뜻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폭삭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으로 하면 '수고 많으셨습니다' 란 뜻이란다. 마치 부산 사투리 '욕봤다'와 비슷한 뉘앙스처럼 말이다.
굳이 이 오해를 살 만한 제목을 쓸 이유가 있을까? 어쩌면 이 '오해'는 의도된 오해가 아닐까란 생각이 4회까지의 드라마를 보면 든다. 사실 애순의 삶을 보면 제주 방언으로 수고많으셨습니다란 의미 보다는 정말로 속았구나 싶은 여정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대통령'이 되겠다고 당차고 야무졌던 소년 애순, 하지만 그 시절 당차고 야무졌던 여자 아이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37명의 반 아이들이 찬성을 해도 반장은 군 장성 집 자식한테 돌아갔다. 엄마가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로 시를 잘 써도 장원은 그 아이 차지다.
엄마는 애순의 팔자가 자기를 닮을까 걱정했지만 그 우려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새 아버지는 애순의 발목을 잡았고, 그 어린 애순은 엄마 대신 그 가정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도 새아버지가 여자를 들이자 그때까지 였다. 하루 아침에 애순은 오갈 데가 없었다. 큰 집은 울타리가 되주기는 커녕 변변찮은 종손을 위해 공장에 가서 월급을 받아 부치라며 적반하장이다.
그럴 때 애순에게 손을 내민 것이 관식이었다. 나를 걸뱅이 취급한다며 섬놈이랑은 안 사귈 것이라면서도 그의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던 애순은 그래서 관식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다. 신혼부부라고 바득바득 우기며 배을 타고 부산까지 감행한 '첫사랑의 도피',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결국 경찰서에 가게 되고 보호자 관식의 어머니의 등장으로 다시 제주로 돌아오게 된 두 사람, 정학을 맞은 관식과 달리 애순은 퇴학을 당하고 '요망'하다며 손가락질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서울로 가겠다고 하고, 대학도 가고 싶다던 애순, 하지만 대학을 보내주겠다던 새 아버지도, 공부를 시켜주겠다던 관식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대신 사랑을 선택한 애순은 틈만 나면 시할머니가 귀신을 쫓는다며 팥을 던지고, 시어머니의 혹독한 시집 살이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서사로만 보면 제주 여인 수난사와도 같은 이야기, 하지만 '폭삭 속았수다'가 알고 보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 것처럼 애순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첫 아이로 딸을 낳은 애순은 공부를 포기해서 아쉽지 않냐는 관식의 말에 딸을 안으며 이렇게 예쁜 딸이 있으면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이든 애순에게 딸이 아버지와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냐 했을 때 애순은 다시 태어나도 관식을 선택할 거라 말한다. 세상 의지가지 없던 애순은 '입신양명' 대신 자신의 보금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
드라마의 영어 원제는, 영어 속담을 빌어 말한다. 인생이 당신에게 떫은 귤을 준다면 그걸로 당신은 귤청을 만들어 따뜻한 귤차를 만들어 먹으라고. 그렇게 떫고 신 자신의 인생을 따뜻한 한 잔의 귤차로 만드는 과정, 그 기나긴 숙성의 과정을 드라마는 보여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