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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날드곽 Feb 19. 2023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SNS 네이티브들의 콘텐츠 소비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일일일독으로 만권의 책 읽기. Book No.2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칼럼니스트인 이나다 도요시는 아오야마 카구인 대학에서 강의하며, 콘텐츠 시청 습관을 조사했다. 학생 중 87.6%가 '빨리 감기' 시청 경험이 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이것을 계기로 Z세대 마케터 등 각계의 인터뷰를 덧붙여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출현이 시사하는 무서운 미래라는 칼럼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같은 주제로 여러 시사 프로그램에 나가 심도 깊게 논의한 결과를 대폭 수정하여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내놓았다. 책은 출간 즉시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로에 등극하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작가는 작품을 쓸 뿐,
작품의 해석은 독자의 몫"


소설가 황순원이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하나의 작품은 창작 배경과 의도, 작품 그 자체로써의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특히 작품성을 가진 작품일수록 행간의 의미가 달리 해석될 여지가 많다.  어찌 보면 보다 오픈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의도치 않았지만 의외의 보람이 있는 작품성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이상 작가의 의도와 여백의 미를 느껴볼 여유 있는 소비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그 어느 때 보다
더 많은 콘텐츠를 가장 싸게 소비하는
콘텐츠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공부도 콘텐츠로 하고, 콘텐츠를 보며 쉬고, 콘텐츠가 매출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고, 각자의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다양한 질 좋은 콘텐츠들이 더 다양한 플랫폼에서 점점 더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이들은 인강을 1.5배속으로 듣는다. 2 회독, 3 회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생님의 얘기와 호흡을 구구절절이 다 들을 여유가 없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내로라는 동영상 콘텐츠 포탈들 모두 0.5배~2배 사이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10초 전후로 이동하는 스킵 기능 또한 일반적이다.


중요 콘텐츠들의 가장 자극적인 부분만 축약한 유튜브의 몰아보기(fast movie) 짤들 또한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세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지 이미 오래다. 6부작에서 20부작까지 나오는 드라마 시리즈나 90분에서 180분 사이의 영화들이 짧게는 5분, 길게는 30분 정도로 요약된 재해석본들과 주인공 또는 특정 인물 중심으로 재편집한 축약본들이 드라마 못지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이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면 마치 새로운 영화처럼 전혀 다른 시청 경험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스토리는 그대로이지만 인물이 보여주는 세세한 감정과 미장센이 주는 힘과 감독이 숨겨 놓은 복선을 찾아가는 연출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왜 다양한 해석의 미학 버리고
빨리 감기로 영화를 보는가?

저자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의 대부분이 빨리 감기 시청 경험이 있고 어릴수록 비율이 더 높다. 그들은 왜 강의, 뉴스 등 정보성 콘텐츠 외에도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까지 빨리 감기로 보는 것일까?


우선 봐야 하는 콘텐츠가 너무 많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가장 값싸게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매달 단돈 만원 내외의 저렴한 비용으로 원하는 만큼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다. 맘만 먹으면 한 달에 수백 편의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시간에서도 가성비를 추구하는 세대의 특징이다.

작품감상이 아닌 콘텐츠로 소비하며 조금 더 쉽고 빠르게 시청 경험을 얻고 싶어 한다. 인생작을 만나 전문가가 되는 과정을 선호하지 않는다. 봐야 하는 리스트를 파악하고 가성비 좋은 방식으로 소비하며 '타임 퍼포먼스'를 올리는 것이다. 결국 줄거리와 시작과 끝을 아는 것으로 목적한 '재미'를 채우기 충분하다. VOD서비스의 장점인 원하는 만큼 볼 수 있는 '감상'의 기회를 늘리기보다는 '소비'의 욕구를 충족시키것에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보다 친절하고 이해가 쉬운 콘텐츠를 원하는 것

마치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의 모든 대사를 자막으로 강조해 주듯이,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독백이나 내레이션의 형태로 끊임없이 장면을 이해시키는 콘텐츠들이 늘어나고 있다. 장면과 음악, 소품을 이용한 복선들은 여지없이 빨리 감기로 축약되고 문해력은 점점 하향 평준화되고, 같은 맥락에서 촘촘하게 대사와 자막을 빈틈없이 넣어주는 콘텐츠들이 증가하고 있다.     


콘텐츠 왜 점점 더 친절해지는가?


시청자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많은 작품은 작품성을 떠나 더 이상 좋은 시청률을 확보하기 어렵다. 

시청 트렌드는 친절한 대사로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을 선호하고, 다양한 해석과 오독이 난무할 수 있는 작품에 불쾌감을 느낀다. 점점 더 쉬운 작품을 원하는 관객들과 그 니즈를 충족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제작자들. 이런 추세 속에서 빨리 감기 세대들을 예전 작품을 감상하던 관객에 비해 더 유치해진 소비자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바라는 소위 '유치한 관객'이 영향력 있는 목소리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인터넷과 SNS의 영향이 크다. 2000년대 후반 폭발적으로 성장한 SNS는 콘텐츠들에 대한 후기를 누구나 쉽고 즉각적으로 적어 공유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올라온 단편적인 의견들은 더 이상 제작자들이 쉽게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이 커졌다. SNS에는 부정적인 내용들이 주류를 이룬다. SNS상에서 부정적인 내용들은 긍정적인 내용에 비해 쉽게 동조자를 구할 수 있고 긍정적인 내용을 표현해서 반론에 직면하는 것 대비 risk가 매우 적다.


SNS의 탄생으로 아무런 비용 없이 간단하게 '피해사례'를 올릴 수 있게 되었고, 소위 "잘 모르겠다.(그래서 재미가 없었다.)"라는 리뷰를 피하는 방법은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뿐이다.       


실패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쉬워야 살아남는다.  


콘텐츠의 공급이 늘어나고, 친절한 설명 과잉이 빨리 감기의 외적 요인이었다면, 내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어릴수록 빨리 감기에 더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쁘지만 친구들과의 대화를 따라가야 하니 빨리 감기로 본다." SNS에 수시로 접속하는 습관으로 대화에 끼는 것이 예전과 비교도 안될 만큼 중요해졌다.


빨리 감기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인기 있는 작품을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달라진 것은 예전 교실, 회사에서의 소외감이 이제는 SNS와 메신저로 어디까지고 따라오고, 도망갈 곳 없이 항상 어떤 반응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다수에 속하지 못한다는 불안, 이력서에 쓸 한 줄이 필요.

1980년대나 90년대에는 개성에 대한 압박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다수에 속함으로써 마음에 평안을 얻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문화적으로 주류가 사라졌다. 다양성을 추구하다 보니 취미나 취향이 완전히 나누어져 '압도적인 다수가 좋아하는 것'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과거 '보통'이라 불리는 또래의 모두가 좋아하는 것들은 세분화되었다. '보통'은 더 이상 없다. 결과적으로 잘게 쪼개진 더 많아진 다양한 '보통'들을 챙겨야 하는 불안 심리로 무리해서 취미를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애쓴다.  


스포일러를 찾아보는 세대, 해야 할 것은 늘고 시간과 돈이 줄어든 세대, 확실한 곳에만 투자하고 싶은 세대

Z세대에게 제너럴리스트는 없다.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업무라도 참고 기다려서 성장하는 시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 어떤 기업도 5년 후에 지금과 같은 사업 규모와 업종을 유지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온 Z세대들은 늘 특별한 개성으로 눈에 띄어야 했다. 재미없는 작품에 시간 낭비를 피하고 싶어 한다.  "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판단한 후에 보고 싶어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재미있어진다는 확신 없이 30분을 견디는 건 상당한 스트레스예요." 결과적으로 일부 작품에만 관객이 집중된다.

회사에서 "실패해도 괜찮으니 일단은 해보라."라고 하는 말이 신입사원들에게는 '괴롭힘'에 가깝다. 이런 상사는 존경받기 어렵다.


좋아하는 것을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Z세대들은 시청을 하며 기분이 상하는것을 원치 않는다. 오히려 빨리 감기를 하며 감정이입이 덜 되는 것을 선호한다. 매일 쏟아지는 대량의 정보에 지쳐 담백한 이야기를 선호한다. 좋아하는 영상을 반복해서 보는 경향성도 보인다. 이제 콘텐츠는 작품이 아닌 기능성 식품에 가까워지고 있다. 복잡하고 양비론적인 평론보다는 좋은 것을 짧게 설명하는 인플루언서의 틱톡영상이 더 요즘 사람들 입맛에 맞다. 즉 간섭, 비판, 지적을 하지 않고 당하지도 않는다.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와 다른 가치관을 접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


앞으로 영상 콘텐츠 시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빨리 감기 건너뛰기 Z세대 소비자의 해방 일지


단명하는 콘텐츠

구독 서비스와 디지털 기기의 시대의 소비자는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게 되고, 빨리 쉽게 손에 들어와야 하고, 싫으면 아무런 죄책 감 없이 중간에 포기한다. 이를 통해 작품보다는 시스템에 더 주목하게 된다. 감독이나 아티스트보다는 끊임없이 알을 낳아주는 닭에 신뢰감을 더한다.


타깃이 바뀌어야 한다. 팬이 아닌 소비자의 시대

물 흐르듯이 트렌디한 콘텐츠를 소비하는 수요가 다수를 이루면서, 보다 개방적이고 다양한 일반인들을 끌어들일 시스템이 필요해졌다. 핵심 팬덤에게만 전달되던 양질의 작품을 성실하게 만들기가 어려워진다.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를 하는 사람들'을 '주요 고객'으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신작은 비싸고, 구작은 무료로 보여주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선 최신 인기작을 빨리 마음껏 볼 수 있도록 하고, 오히려 개봉 후 시간이 많이 흐른 작품에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신작은 무료, 옛 작품은 비싸다." 과거 비디오 대여점의 마케팅과는 전혀 다른 노력 없이 상품을 손에 넣고자 하는 콘텐츠 소비자의 시대를 맞이했다.  


콘텐츠의 길이는 짧아지고 있다.

스마트 폰의 메시지에 즉각 반응해야 하는 젊은 세대일수록 영화관의 암흑 속에서 가만히 앉아서 일시정지, 빨리 감기를 못하며 2시간을 보내야 하는 영화는 부담스러워졌다. 영화, 유튜브, 쇼츠 등 다양한 포맷을 접하는 현대인들은 모두 바쁘다.


임팩트 있는 도입부는 필수, 릴리징 전략 또한 중요

제작자들은 시청자가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를 한다는 인식하에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OTT 오리지널 드라마의 경우 전체 회차가 일괄적으로 공개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대작의 경우 일부를 공개하고 주 단위 노출로 구독자를 늘리는 실험 또한 병행하고 있다. 소비자는 연속회차 중 조금이라도 늘어진다 싶으면 마지막 회를 재생할 수 있다. 1회에서 시청자를 사로잡는 임팩트가 어느 때 보다 중요해졌다.


패스트무비를 공식 홍보 영상으로

게임 실황 콘텐츠들이 1)게임 판매 촉진, 2)게임 실황 참여자 증가, 3)시청자 증가의 3중 효과를 누리듯이 영화 회사가 공식적으로 영상 소재를 유튜버들에게 주고 일정한 규칙하에서 자유로운 편집권을 주는 것은 홍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유튜브 콘텐츠 시청 횟수 증가, 볼지 말지 망설이는 잠재 소비자의 불확실성 제거해 준다. 물론 스포일러로 인한 소비 포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줄거리와 결말을 알고도 본편을 보는 것이 더 편한 요즘 소비자들에겐 오히려 먹히는 방법일 수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 소비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체감적으로 이미 일상화가 되었지만 가려웠던 부분을 제대로 긁어준 면도 없지 않다.

빨리 감기가 젊은 세대에서 조금 더 많이 볼 수 있는 습관이기는 하나 콘텐츠를 소비하는 환경과 시스템은 분명히 바뀌었다. 기술의 진화에 생활양식의 변화로 비롯된 영상작품의 공급과다, 바쁜 현대인들의 시간 가성비 지향,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확실한 콘텐츠를 선호하는 경향은 과거로 되돌리기 어려워 보인다.


Web 3.0 기반 크리에이터의 전성시대에 원작자와 크리에이터간 협업 또한 중요한 지점으로 보인다.


과거 한 시대를 대표했던 프리미엄 팬덤 전략, 티저 전략, 신비주의 작가 전략, 분량을 위해 완급조절 하던 스토리 전개 방식, 신작과 구작간 가격 차이, 독점 콘텐츠 전략, 순차적인 시리즈 노출 전략 등 기존의 문법들이 한순간에 대전환의 시기를 이미 맞이했다. 결국 빨리 감기는 시대의 필연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영화를 깜깜한 영화관에서 제 속도와 호흡으로 보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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