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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자리 Jun 03. 2020

페미니즘 실천의 이면

그들은 정말 완벽한 페미니스트 일까?

 완벽한 페미니스트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정답은 '없다' 이다. 하지만 당신의 사상에 따라 어느 정도 흐릿하게 그려지는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성운동계에 몸담았던 내 주변에는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기준이 있던 사람들이 있었고, 완벽한 페미니스트처럼 보이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으며 우리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에게 완벽한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원했다.


 가장 먼저 우리는 탈코르셋을 해야 했다. 이건 하나의 규율이자 예의였다. 설사 탈코르셋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적어도 여성계 업무 장소나 행사에서는 하나의 정치적 행위로서 탈코르셋을 하였다. 처음에는 외부에 보여지는 나의 모습과 실제 나의 모습이 같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이것은 정치적 퍼포먼스이며 나의 실제 모습과 조금은 달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정치적 자아와 일상의 자아를 분리하기 시작했고 나에게 페미니즘은 일상이 아니라 일이 되었다. 대부분의 활동가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조금 친한 활동가끼리는 자신의 페미니스트답지 못한 면모를 조금씩 드러내며 위로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 긴밀한 사이가 아닐 때는 웬만하면 그런 모습을 숨겼는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까지 그러한 모습을 숨겼다. 

 나는 그런 유형의 유명인들을 몇 보았다. 그들은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을 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였다. 이들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모델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버린다. 사실 내가 본 페미니스트 활동가 중에 내적 갈등 없이 편안한 상태로 탈코르셋을 하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혔다. 심지어 그 사람들도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 더 깊은 곳에 내적 갈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몇몇은 그 내적 갈등이 타인인 나의 눈에 보임에도 본인의 내적 갈등을 부정하고 지움으로써 자신이 그 모델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착각하였다. 그 갈등을 감추기 위한 노력은 여러 가지인데 갑자기 다른 유형의 코르셋에 집착하거나 적어도 아름다운 남성처럼 보이기 위해 예전보다 더 외모에 신경을 쓰거나 예쁜 용품이나 물건을 소비하기 시작하는 등등이다(하지만 사실 이마저도 코르셋이기 때문에 갖은 핑계를 갖다 대면서 겨우겨우 산다).


 헤테로나 바이섹슈얼인 활동가들은 몰래 남성과 연애를 하는 일도 있었다. 연애한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는 사람도 있었고 연애 사실은 밝혔지만, 상대의 성별을 속이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몰래 남성을 만나다 보니 온라인 관계를 통해서만 남성을 만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심지어 어설픈 핑계를 대면서 남자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애가 멜섭이라 괴롭히는 게 재밌어서 만나고 있다고 말하거나 혹은 정말 위험한 방식으로 남성과 접촉하면서 성폭력 실태를 조사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경우도 봤다. 남성을 데려와 일을 시키면서 애정을 주고받는 경우도 보았고 형태는 다양하지만 결국 목적은 남성과 성애적 교류를 하는 것이었다.

 위에 언급한 그 어떤 것도 그냥 평범하게 코르셋을 끼거나 그냥 평범하게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나쁘면 나빴지 더 좋지는 않았다. 결정적으로 안타까운 점은 몰래 남성을 만나다 보니 만나던 남성에 의해 피해를 당하여도 동료 페미니스트들한테 털어놓거나 공론화를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페미니스트가 아닌 친구와 가족과 모조리 연을 끊은 사람이 페미니스트 친구들 몰래 남성과 접촉하다가 피해를 당한 경우를 보았는데, 결국 그 사람은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지나갔다. 만약 이때 페미니스트가 아닌 친구나 가족과 계속 연을 이은 상태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또 남성을 몰래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아직도 하곤 한다.


 강인한 야망과 그것을 실천하는 부지런함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였다. 몇 유명인들은 저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굉장히 부지런한 삶을 전시했다. 하지만 참 재밌는 일은 부지런함을 지나치게 과시하는 사람일수록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매일 대단해 보이는 일을 다양하게 부지런히 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매일 SNS에 게시했다. 하지만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꼭 필요한 사소한 일을 못하거나 꼭 해야 할 일은 오히려 계속 미루었다. 일상이 불안한데 정신이 온건할 수 없고 정신이 온건하지 않은데 결과물이 좋을 수 없다. 결국, 그 사람이 내는 결과물은 점점 질이 낮아져 갔다. 또 일 처리에 필요한 자그마한 부분들을 매번 놓치고 그것은 자기 효능감의 상실로 이어져 점점 더 크고 대단해 보이는 일에 집중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또 어떤 이는 오로지 자신의 부지런한 부분만을 보여주어 그걸 보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굉장히 부지런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자신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도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거짓된 모습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래도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면서 완벽한 페미니스트의 삶을 연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일부는 거짓말이지만 굳이 여성혐오가 판치는 세상에서 페미니스트답지 못한 면모를 우리까지 보여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연기했다. 

 하지만 저렇게 명확히 일의 영역과 일상의 영역을 분리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들키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있던 건 사실이다. 또한, 완벽한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사람들은 그 모습을 철석같이 믿고 더더욱 그런 모습만 보여주길 원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우리에게 가혹한지 원망스러웠지만 나는 최근 한 유튜버의 글을 읽고 깨달았다. 

 그렇게 불가능하고 환상적인 모델을 수행하는 척하는 것은 일종의 기만이며 누군가는 그것을 믿고 따라올 것이며 그것을 따르기 위해 무리하다 삶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그렇게 완벽한 모습만 전시하면서 '적당히 걸러서 봐야 한다. 여자라고 다 믿지 마라. 각자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거짓말에 속아 삶을 망친 사람들은 무시했다. 

 그 유튜버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요구하는 모델이 과하다고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정직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진지하게 탈코를 했고 주변인들에게 쓴소리를 했으며 가정을 뛰쳐나왔다. 나와 몇 활동가들은 지지자들의 몇 가지 요구가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서는 지지자들을 험담하고 빈정거리며 반항하듯 그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끝이 그렇게 위험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모델을 완벽하게 수행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하는 척만 하는 사람들은 그 끝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불가능한 모델을 생산하고 그것이 유해한지도 모른다.

 탈코르셋, 4b, 야망과 실천을 모두 수행하는 모델은 언뜻 보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으며 조금 심하게 한다고 해서 유해할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저것을 실제로 수행하려고 하다가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과 저것을 연기하는 사람들을 모니터 바깥에서 무수히 많이 보았다.  애초에 저게 쉬우면 연기를 하는 사람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설사 저것을 완벽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 한 부분에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고 저 모델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원래 모델은 모델일 뿐이다. 이상적인 모델에 억지로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은 그게 어떤 모델이든 간에 탈이 날 수밖에 없다. 결국, 이것은 사상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폭력적인 태도의 문제이지만, 문제는 폭력적인 태도 자체도 한국 내 래디컬 페미니즘 사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지금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탈코르셋을 못했거나, 4b를 못했거나 야망가가 아닌 여성을 보기 싫어한다. 단순히 호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싫어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저것을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여성들은 많지 않으므로 결과적으로 여성 대부분을 싫어하게 되며 심지어 자기 자신도 완전히 좋아할 수 없다. 

 만약 저 모델을 완벽히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나거나 억울한 감정이 든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이니 탈코르셋,4b를 하지 못한 여성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는 편이 좋다. 


 우리는 서로의 약한 부분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탈코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힘든지, 꾸밈 노동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왜 여전히 예뻐 보이고 싶으며, 왜 가끔은 여자보다 남자가 편한지, 왜 남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오르가즘을 느낀 적이 거의 없음에도 여전히 삽입섹스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지 터 놓고 이해받는 시간이 필요하다. 애초에 이 단계는 탈코르셋과 4b가 고착화 되기 이전에 거쳤어야 할 단계이지만 아마 여성 대부분이 저런 단계를 거치치 못했을 것이라 예상된다. 꼭 다른 페미니스트들과의 교류가 없더라도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왜 아직도 저런 것들이 끌리는지를 말이다. 그것을 물어보지 않고 무작정 좋지 않다고 자기 자신을 다그치면 타인도 그러한 방식으로 다그치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내집단의 숫자를 늘리는 전략을 사용한다면 결국 래디컬 페미니스트 내에는 설득이 아닌 다그침의 경험을 통해 유입된 사람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게 되며 그러면 그럴수록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뛰어드는 사람이 많아지게 된다. 

 우리는 꼭 필요한 단계를 생략하고 너무 급하게 뛰어왔다. 서로의 연약한 부분을 인정하고 보듬어 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혼자 삼키며 극복하길 바란다면 연대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람이고 아직 여성혐오를 하기에 조금씩은 서로 싫어하고 조금씩은 자기 자신도 싫어한다. 보지 않고 덮어놓는 사이에 문제는 더욱 커질 것이며 결국 나중에 더 힘들어질 뿐이다. 우리 서로의 불쾌한 부분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나아가자.



(나는 이 글을 래디컬 페미니스트로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염두에 두고 썼지만 래디컬 페미니스트라는 용어 자체의 적절성에 고민하고 있으며 몇 가지는 랟펨이 아닌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적용이 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 일부러 래디컬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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