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와 치유의 글을 쓰는 나 04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핸드폰을 열어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하던 중에 위아래서 번쩍이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수입 브랜드의 립스틱인데 세 개를 사면 30% 할인이고, 5개를 사면 조금 더 할인한다는 문구에 솔깃했다. 평소 쓰던 화장품도 아니며 립스틱은 더더욱 바르지 않으니 나에겐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성비가 좋은 것 같았다. 은은한 색상이니 누군가에게 선물해도 무난하게 어울리지 않을까? 마침 명절이 한 달 정도 남았으니 사 두면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작년 추석에 고모님께 인사하러 가는데 뭘 들고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댔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결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입술은 소중하니까.
그게 벌써 반년 전의 일이다. 설에 여기저기 인사치레를 하면서도 바다 건너온 립스틱은 잊고 있었다. 좋은 거라고 소중한 이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잘 둔 것이 화근이었다. 화장대 서랍에 너무 잘 보관하고 있어서 눈에 띄질 않았고 눈에서 멀어지자 그런 게 있는 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번 여름에 날이 너무 더워 외출할 때 사용할 손수건을 찾으려고 서랍을 뒤적이다가 안쪽에서 반짝거리는 조그만 상자 5개를 발견했다. 첫눈에는 퍼뜩 생각나지 않았지만 손가락만 한 상자를 요리조리 돌리며 필기체로 된 상표를 읽으니 아! 생각났다. 립스틱이다. 입술을 촉촉하게 해주는 기능에 눈독을 들이며 주문하던 내 모습이 기억났다.
막상 내 입술에는 다이소에서 파는 립글로스를 바르면서 남의 입술에 왜 그리 공을 들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고 입술을 우~ 오~ 오므려 보았다. 빨간 입술은 둘째치고 자글자글 잡히는 주름이 보였다. 미지의 대상을 위해 주문한 립스틱은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써야 하는 걸까. 해들해들 웃음이 났다. 이게 뭐라고 주문하면서 열두 번도 더 생각했을까. 정작 나를 위해 쓸 용기도 없으면서 누굴 준다고 고이 모셔두었을까.
흠흠. 헛기침을 한 뒤 조심스레 상자 하나를 열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수입 브랜드 립스틱이 어서 입술을 갖다 대라고 나에게 손짓 아니 입술짓을 하는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윗입술은 왼쪽으로 이어 올라가 오른쪽 끝에서 마무리를 한 뒤 움빠! 빠.빠.
해들거리던 입술이 빨갛게 빛났다. 내가 그 소중한 사람이었구나!
해들해들 : 걷잡지 못하는 웃음을 조금 싱겁게 자꾸 웃는 소리. 또는 그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