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니seny Sep 28. 2024

이십 대의 마지막 날엔

힘들었던 2014년의 마지막 날 끝에 찾아온 것은...!

 2014년 12월 31일의 기록.



     나의 이십 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자꾸 만 나이를 들이밀고 싶어지는 서른이 되는 것이다. 올해 나는 스물아홉이었다. 아홉수라 그런지 몰라도 오지게 힘들었다.


     그렇게도 원하고 또 바라던 이직은 이루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꼭 여기서 탈출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이렇게 오래는 못 살지. 게다가 오늘은 월말에다가 연말이라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데 큰일이 날 뻔했다.


     나는 재무팀에서 자금 실무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 중 중요한 업무는 매월 자금 집행이 차질이 없도록 들어올 돈과 나갈 돈을 잘 예측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금이 모자라는 경우 필요한 만큼만 대출을 일으켰다 이자가 더 불어나기 전에 가능한 월말 전에 갚도록 해야 한다. 오늘은 12월의 마지막날이기도 하지만 1년의 마지막날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모든 거래가 차질 없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보통 회사들은 거래처로부터 물건이나 서비스를 판매한 대금을 회수하기 위해 시중 여러 은행의 계좌를 모두 개설해 놓지만 실제 돈을 집행(송금)하는 계좌는 보통 주거래 은행 한 곳이다. 자금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회사는 자금 담당자가 직접 계좌이체를 하는 게 아니라 매일 일정한 시간마다 정해놓은 계좌 한 군데로 계좌이체가 자동으로 이루어지도록 설정되어 있는데 이것을 집금(sweeping)이라 부른다. 우리 회사는 인터넷뱅킹은 쓰고 있지만 자동 집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좌이체를 해야 했다.  


     매번 하던 업무니까 집금을 잘 마무리해서 송금이 이루어지는 모계좌로 돈도 다 옮겨놓았다. 이제 은행 한 군데에 남은 대출만 상환하면 되는데 팝업 메시지가 뜬다. 뭐라고? 1일 이체한도를 초과했다고? 곰곰이 이래저래 계산을 해봤다. 오늘 하루종일 이 은행계좌를 통해 이체한(왔다리 갔다리 한 금액) 금액이 81억이었다. 앞으로 40억을 더 보내야 일이 끝나는데. 망했다.


      발을 동동 거리며 인터넷 뱅킹 쪽에 물어보고 상사인 부장님이 해준 조언을 따라 은행에 물어봤다가 빠꾸를 맞았다. 이러려고 본사 설득해서 최대한 월말을 피해 물품대를 빨리 송금한다고 난리를 피운 게 아닌데! 하며 결국 은행에 사정사정해서 이체한도 증액서류를 최대한 빨리 가져가겠다고 통화를 마쳤다.


     그렇게 서류를 들고 은행에 갔더니만 그들도 퇴근 분위기는 아니어서 업무시간 이후에 가서 그들을 괴롭힌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짐은 덜었다. 어쨌든 사무실로 돌아와 인터넷뱅킹 내부 승인을 다시 받고 나니 이체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 다행이었다.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로 이체 한도에 걸린 게 맞았던 거다.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렇게 수습을 마치고 퇴근을 하려다 야근을 하고 있던 우리 팀 동료 두 명이 저녁거리를 시켜놨다고 같이 먹고 가자고 했다. 얼씨구나 하고 회의실에 갔더니 사람은 없고 배달된 음식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포장이라도 먼저 풀어놔야겠다며 세팅을 해 놓고 있는데 숟가락도 두 개, 젓가락도 두 개밖에 없었다. 캔틴 가서 젓가락이나 더 가져와야겠네, 하며 캔틴에 갔다.


     그런데 캔틴에 들어서자마자 며칠 전 새로 들여놓은 빈 테이블 위에 검은색 물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포스트잇에는 '주인 찾아가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목 부근에 리본 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는 검은색 장갑 한쪽이었다. 어? 이거 내가 월요일에 처음 끼고 나왔다가 잃어버린 장갑하고 너무 똑같이 생겼잖아? 그런데 다시 한번 들여다보니 똑같이 생긴 게 아니라 바로 그 장갑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끼고 나와서는
 어디서 잃어버린지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장갑 한쪽이,
 바로 거기 있었다.


     회사에 출근하고 나니까 장갑 한쪽이 없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떨어뜨린 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버스에서 장갑을 벗으면서 잃어버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고 따라서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장갑이 거기 딱 놓여 있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지만 추리를 해 보자면... 출근하자마자 캔틴에 도시락으로 가져온 밥과 반찬을 놓으러 들렀는데 그때 캔틴 어딘가에 떨어뜨린 게 아닌가 싶다.


     장갑을 손에 들고 가는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2014년 마지막 날인 오늘은 참 험난했지만 마무리가 좋구나. 내일 목요일은 1월 1일이니까 쉬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에 출근하면 누가 이 장갑을 주워놨는지 밝혀야겠는걸? 하지만 금요일엔 내가 업무 때문에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주워 이 메시지를 써놓은 사람이 누굴지 찾을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라도(아마도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직원이겠지) 나 또한 그 사람이 나에게 장갑을 전달한 비대면 방식으로 빈 테이블 위에 고맙다는 메시지를 올려놓고 퇴근했다.


     오늘은 막판까지 너무 힘들었고, 2주 전에는 너무나 슬픈 일을 겪었고, 한 달 전에는 스트레스 때문에 속이 안 좋아서 고생했으며, 두 달 전에는, 세 달 전에는, 일 년 전에는... 2014년은 마치 밀푀유 케이크처럼 여러 겹으로 촘촘하게 힘들었는데 잃어버린 장갑 한쪽을 찾은 덕에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2015년 1월 2일에 출근하면 다시 모든 게 꼬일지언정 오늘과 내일이라도 마음 풀자. 그렇게 살자.



2014년.
나의 스물아홉.
 너무너무 수고 많았어.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밤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