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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Aug 27. 2024

서울탐방 제14탄 : 옛것과 초현대를 넘나드는 시간여행

2023년 4월의 기록 : 걸어서 시간여행 2편 - 용산 백빈건널목

<서울탐방 제14탄 : 옛것과 초현대를 넘나드는 시간여행 1편>에서 이어집니다.





     최신 현대식 건물을 나와 한강대교를 따라 나있는 큰길을 걷는다. 한 블록 안쪽인 용산역 쪽으로 걸어가도 되지만 그냥 큰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4월 이맘때는 봄의 시작이다. 내가 딱 좋아하는 살랑살랑한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이젠 헐벗은 나무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연한 초록빛의 이파리들을 잔뜩 달고 있는 나무들이 눈부시게 빛난다. 이럴 때 평일 오후에 햇살을 받으면서 걷는 건 큰 행복이다.


     4월 하면 떠오르는 건 밴드 노리플라이 멤버 권순관의 1집 앨범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13년 4월에 권순관의 1집이 나왔다. 특정 노래를 들으면 특정한 시기로 타임머신 탄 거 같다는 표현이 있다. 힘들었던 시기에 들었던 노래 혹은 힘들고 안 힘들고 와 상관없이 어떤 특정 시기에 자주 들었던 노래가 있다면 시간이 흘러 다른 장소에서 그 노랠 들어도 그 시간으로 순간이동할 때 저런 말을 쓴다.


    권순관 1집은 내게 그런 앨범이다. 특정연도로 돌아가는 건 아닌데 일 년 내내 들어도 좋지만 특히 이 노래를 듣기 좋은 계절은 이 앨범을 처음 들었던 4월이다. 4월만 되면 '이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겠다'하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래서 오늘의 배경음악은 권순관 1집이다.



     건물 밖으로 나와 길을 건너니 건물 전체가 더 잘 보인다. 열 발자국 걸어 다시 한번 사진을 찍고 또 열 발자국 걷고 다시 뒤를 돌아 사진을 찍는다. 건물의 윤곽이, 전체가 좀 더 확실하게 카메라에 들어온다.


    용산역으로 갈라지는 사거리에 최근에 조성한 듯한 작은 공원이 있었다. 이제 막 나무를 심었는지 나무가 조그마하고 힘없어 보인다. 그늘이 없어서 오래 서있진 못하겠다.


권순관 1집 앨범 'a door'

1. Home Again
2. 그렇게 웃어줘
3. 우연일까요
... (트랙순)


     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온다. 지도를 보니 KY빌딩에서 우회전하면 되었는데 KY빌딩이 뭔가 했더니 금영빌딩이다. 우리가 아는 그 금영노래방 본사인 거 같다. 거기서 우회전해서 쭉 직진한다. 


     방금까지는 큰 대로변에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높다란 건물들만 보였는데 갑자기 건물 높이가 확 낮아졌다. 80년대쯤으로 돌아온 느낌.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에 오른편의 골목이 아기자기해 보여 한번 들어가 봤다. 혼자 하는 여행의 장점은 이런 것. 하지만 이런 느낌을 누군가와 나눌 수 없다는 건 단점이다. 장점과 단점은 한 끝 차이, 종이 앞뒷면 정도의 차이다.


백빈 건널목 가기 전 골목길. (2023.04)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집도 있고 새로 단장한 집도 있다. 옛 풍경이 가득한 골목길에 조금은 안 어울리게(?) 도어록이 달려있는 집도 있다. 역시 도어록의 나라, 한국. 골목에 조용히 앉아있는 고양이 한 마리와 마주쳤다. 사람 손을 많이 탔는지 내가 지나가도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다.


     다시 골목을 빠져나와 원래 목적지인 백빈 건널목 쪽으로 설렁설렁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라? 저기 머얼리서 들려오는 소리.


땡땡땡-


    건널목에서 나는 소리다. 이건 곧 기차가 지나간다는 뜻이다. 언제 또 기차가 지나갈지 모른다. 이렇게 천천히 걸을 순 없지. 나는 갑자기 경계태세를 발휘해 훅훅 뛰기 시작한다. 왼쪽 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인다. 건널목 신호등이.


     여전히 땡땡땡 소리는 울리고 있고 차단봉은 내려가 있는데 아직 기차는 지나가지 않는다. 차들도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 따뜻한 햇살이 거리에 쏟아진다. 햇살이 역광이라 카메라가 잘 찍히는지 모르겠는데 기차가 지나간다. 동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는다. 서울 한복판에 아직도 열차가 지나가는 건널목이 있다니. 군산에서 본 것도 이미 열차가 안 다닌 지 오래된 철길이었는데 말이다.


4월의 오후 한낮, 백빈 건널목 풍경. (2023.04)


     기차가 지나간 후 신기해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사진 찍고 있는데 또 땡땡소리가 난다. 아까 전 기차가 지나간 지 5분도 안된 거 같은데? 이렇게 자주 다닌다고? 이번엔 반대편으로 건너와본다. 여전히 신기하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ITX청춘이 지나간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그리고 나니 다시 오래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이다. 그런데 조금 더 걷다 보니 어라? 건널목이 하나 더 있네? 아까는 직원도 있었는데 여긴 사람이 없다고 한다. 레일도 하나로 작아 보이는데 어쨌거나 차단봉도 있고 신호도 있고 조심하라는 거 보니 여기도 기차가 다니긴 다니나 보다. 이제 골목은 끝이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근처에서 2016번을 타기로 한다.


     원래 오늘의 최초 계획은 2016번 타고 성수역까지 가서 서울숲 근처 북카페도 가고 서울숲도 구경하고 밤이 되면 다시 2016번을 타고 서울의 야경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하지만 여러 여건 상 2016번을 타고 성수역 가기 전 중간에 집이 있어서 거기서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가성비 좋게 버스비만 내고 실컷 볼 수 있는 한강의 야경을 오늘은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이 반쪽짜리 플랜을 다음번에 다시 써먹기로 남겨두지 뭐,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2016번 버스를 기다린다. 평일 오후 네시의 버스 정류장. 평일 오후 특유의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간다. 버스가 와서 올라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전자석 바로 뒷 앞자리 말고 들어오자마자 문 앞에 있는 제일 맨 앞자리가 비어있다. 이 자리는 탑승자의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풍경도 볼 수 있지만 앞쪽의 풍경도 덤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다.


     아까 듣다 말던 권순관 1집을 이어 듣는다. <긴 여행을 떠나요>, <one more time>, <변하지 않는 것들>까지. 2016번 버스는 이촌동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지나간다. 아이들이 하교할 시각인지 엄마들과 아이들과 노란색 학원버스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마침 이때를 맞춰 <변하지 않는 것들>이 흘러나온다. 


변하지 않는 것들 다 변해가는 것 중에
익숙해서 당연한 늘 곁에 있는 모든 것
키 높은 나무와 바람의 흔들림
힘을 내라는 엄마의 작은 목소리

변하지 않는 것들 다 변해가는 것 중에
익숙해서 당연한 늘 곁을 지킨 사람들

<변하지 않는 것들>, 권순관


 힘을 내라는
  엄마의 작은 목소리. 


     저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을 언제까지고 기억할 수 있을까. 엄마가,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자신을 데리러 나왔던 이런 순간들을. 이 봄날의 4월의 햇살과 바람을, 엄마의 목소리를. 마지막 트랙인 <a door>까지 듣고 있으니 내릴 때가 되었다. 근미래와 근과거를 지나 다시 현재로 돌아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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