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부터 광화문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2021년 2월 어느 날의 이야기입니다.
어딘가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것이 아닌, 오로지 운전을 하기 위한 운전, 우리는 그것을 드라이브라 부른다. 이제 초보운전을 벗어나고 있으므로 평일에 차를 끌고 서울 시내 어딘가를 달리고 싶어졌다.
작년 연말에 발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거의 두 달 정도 깁스를 했었다. 깁스를 풀고 나서도 한동안은 걷는 게 불편했고 당연히 운전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하는 드라이브가 깁스 풀고 거의 두 달 만에 하는 운전이 되었다.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는 북악 스카이웨이를 가볼까 했는데 올라가는 길이 꼬불꼬불하다고 해서 바로 포기했다. 그럼 어디로 갈까, 하다가 숭례문부터 흥인지문까지 서울 사대문 중 두 문을 끼고 돈 다음 집으로 오기로 했다.
[오늘의 서울시내 구도심 드라이브 코스 최종 편]
숭례문 -> 시청 -> 광화문 -> 경복궁 -> 창덕궁 돈화문 -> 흥인지문 -> 대광고 -> 대학로 -> 다시 흥인지문 -> DDP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나간 김에 기름도 넣으려고 봤더니 그새 기름값이 올라 여기저기 1500원대다. 지도를 보고 그나마 저렴한 동네를 찾았더니 대광고등학교 근처였다.
나는 대광고에 가본 적이 있다. 참고로 대광고는 남고인데 여학생인 내가 어떻게 남고에 들어갔냐고? 대광고는 지금은 텔레비전에 유튜브에 전국민적으로 유명한 선생님 아니 이제는 셀럽(?)이 되어 버리신 우리 큰별 최태성 선생님께서 근무하셨던 학교다.
지금으로부터 15년도 더 전이던 나의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EBS 강의가 수능 강의로 지정되기 전부터 EBS로 내신 및 수능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때도 인터넷이 어느 정도 도입된 시기여서 텔레비전 강의도 있지만 인터넷 강의도 있었고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 질문을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강의하시는 모든 선생님들이 게시판 질문에 답변을 해주시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답변을 안 해주는 게 대부분이었지.
그런데 정말 특이하게도 학생들이 올린 모든 글에 답변을 해주는 최태성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학습 관련된 질문뿐만 아니라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글에도 응원글을 남겨주셨다. 그렇게 게시판에 글을 자주 올리게 되면서 최태성 선생님은 실제로 만나는 우리 학교 선생님보다 내가 더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또 국내 어딘가에 살고 있는 나와 동갑인 친구들과도 서로 댓글을 달며 응원하고 친해지게 되었고 고3이 끝나면 꼭 만나자고 약속했다. 우리끼리 만나는 건 물론이고 선생님도 뵈러 가겠다고 선포했는데 수능이 끝나고 진짜로 만날 날짜도 잡았다. 진짜 용감하고 겁대가리가 없었다.
선생님과 약속한 날, 친구들 중 시간이 되는 몇 명이 모여 대광고로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교실까지 들어가진 않았지만 교문 정도는 들어갔던 것 같다. 우리를 마중 나온 선생님과 함께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도 먹고 그 뒤로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같이 강의를 하셨던 이희명 선생님과 함께 우리 모임에 모시기도 했었다.
선생님들 덕분에 만난 우리들이었지만 나중엔 선생님 없이 그냥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대학생 시절도 함께 보내고 졸업을 한 뒤 모두 사회인이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뒤를 이어 선생님이 된 친구들도 있다.
처음 모일 당시 열댓 명 되던 친구들은 나이가 먹으면서 하나둘 연락이 끊겼고 이제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온라인을 통해 만났어도 중, 고등학교 때 만났던 친구들만큼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그래서 기름도 넣고 개인적인 추억도 되새길 겸 대광고 앞을 지나가기로 했다.
숭례문까지는 내가 몇 번이나 간 적이 있고 내가 아주 좋아하는 남산 둘레인 소월길을 지나 좀만 더 가면 되는데... 중간에 차선 하나를 잘못 차서 한남대교 쪽으로 다시 내려가다 올라와서 올바른 길을 탔다. 그리고 숭례문을 지나서는 계속 경복궁을 향해 직진. 경복궁을 앞에 둔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그대로 창덕궁 지나고 가다 보니 생각지 못하게 표지판이 흥인지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흥인지문에서 신설동역 쪽으로 가서 대광고를 스치듯 지나고 이제 대광고 건너편에 있는 주유소로 가면 된다. 그 자리에서 유턴하면 바로 주유소로 들어가는 건데 거길 놓치고 났더니 유턴하는 데가 안 나온다.
이것이 갓 초보에서 벗어난 운전자의 비애인 건가. 이러다 계속 직진하면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대광고를 찍고 가던 도중 오른편에 셀프주유소를 발견했고 거기도 저렴한 편인 거 같아서 얼른 들어갔다.
기름 넣고 이제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아까 경로 취소가 제대로 안 된 건지 어쩐 건지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해도 차에 설치된 네비가 작동이 안 된다. 신호등에 걸렸을 때 네이버 지도를 켜고 네비를 설정했다. 그리고 대학로까지 올라갔다 서울 시내에는 잘 없는 회전 교차로 하나를 통과하고 어찌어찌 가니 다시 흥인지문이 나온다. 예상치 못하게 근처에 있던 우주선 같은 DDP도 봤다.
매주 수요일 오후엔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 (이하 비밀보장) 이번주 방송분이 업로드된다. 바쁘게 살다가도 꼭 수요일 즘엔 '이번주 비밀보장 올라왔겠구나'하며 찾아 듣곤 하는데 정말 생각 없이 빵빵 웃을 수 있다. 한 명의 숨땡(숨겨진 땡땡이)이자 은땡(은근한 땡땡이)이로서 그동안 비밀보장을 들으며 실컷 웃었고 벌써 300회가 되었다는 사실에 코끝이 찡해졌다.
'비밀보장'은 2014년에 시작한 팟캐스트 방송으로, 나는 2회 때부터 바로 듣기 시작했었다. 긴 시간 동안 큰 부침 없이 이렇게 방송을 지속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텔레비전에 유튜브에 라디오까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수많은 매체에서 콘텐츠가 물밀듯이 쏟아지는 요즘 시대에 사실 라디오 계열인 팟캐스트는 대세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라디오(팟캐스트) 결의 매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장점 또한 분명하다. 첫째, 음성으로만 이루어진 방송이라 그런지 상상의 여지가 넘친다. 예를 들자면 영화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 비슷하던가 그 이상/이하이든 간에 어떤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걸 직접 눈으로 보니 좋기도 하지만 사람들마다 상상하는 것도 다를 수 있고 연출과 자원의 한계도 있어 실망하거나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팟캐스트를 듣자면 진행자 둘이 눈에 안 보이는 걸 설명해 주는 경우가 많은데 직접 보여주는 것보다 그걸 상상하는 게 더 웃긴 경우도 많다. 그리고 소리로만 이루어진 방송이라 목소리나 톤에 변주를 주거나 음향효과를 많이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요즘 매체에서 자주 쓰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쓰여도 화면에 묻혀 버린다)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둘째, 영상매체는 가능하면 화면과 함께 봐야 하기 때문에 화면을 보면서 동시에 다른 행동을 하기가 어렵다. 밥 먹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만. 하지만 팟캐스트 같은 라디오 계열 매체는 음성만 들으면 되니까 틀어놓고 다른 행동을 하며 충분히 들을 수 있다. 특히 드라이브를 하면서 듣기 좋은데 비밀보장을 들으면 중간중간 웃기기 때문에 절대 졸 수 없다. 졸음운전 방지에 최고.
셋째, 청취자와 진행자와의 내적 친밀감이 다른 매체에 비해 높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나를 모르고 나도 방송 외의 그들의 모습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숨겨도 목소리까지 연기하기는 진짜 어렵다는 말도 있잖는가. 그래서 나 같은 청취자들은 그들의 목소리에서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진행자의 '진짜 모습'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도 꾸며낸 게 아닌 그냥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런 것 같다. 그동안 바쁜 와중에도 방송을 쭉 진행해 온 은이언니, 숙이언니에게 참 고마웠다. (이 글을 올리는 2024년 현재는 방송한 지 10년이 넘었으며 곧 500회를 앞두고 있다.)
오늘은 마침 300회 특집 방송이라 그런지 평상시보다 방송시간이 길어져 거의 두 시간에 육박했다. 이렇게 팟캐스트 하나를 두 시간이면 드라이브하면서 충분히 방송 다 듣고 집에 도착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경기도 오산이었다.
집에서 강남 통과해서 나가는데만 해도 이미 시간이 소요되었고 중간에 남산 들어갈 때 헤맸다. 대광고 근처 가서 주유소 찾다가 헤매고 다시 집으로 오는 길 찾다가 헤맸더니 팟캐스트 재생시간은 진작에 끝났다. 그래서 다른 방송까지 들으며 집에 왔더니 거의 4시간이 지나 있었다.
오랜만에 평일에 휴가 내고 서울 시내 운전을 해봤다. 서울 구도심의 숭례문과 흥인지문과 궁들을 지나며 도심 속에서 오래된 우리나라를 느끼고 옛 추억이 담긴 대광고도 지나갔다.
마지막 코스로 동네 슈퍼에 들러 엄마가 부탁한 것을 사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 기분이 좋다. 차선 변경 못 할까 봐 도로에만 나가도 벌벌 떨고 무사히 집에 돌아와서도 정작 주차를 못할까 봐 덜덜 떨었던 나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목적 없는 드라이브의 맛도 알아가는, 초보에서 벗어난 일반 운전자가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