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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즐겨야 할까?

혼자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다

누군가에겐 두려움이고, 누군가에겐 안식이다. 고독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늘 복합적이다.


우리는 "외롭다"는 말을 고독과 혼동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고독은 단순한 결핍이나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때론 가장 충만한 자기 대면의 시간이자, 인간다운 성숙의 관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고독, 우리는 과연 즐겨야 할까?


첫째, 관계의 시대, 고독은 불편한 낙오일까?


지금은 "연결의 시대"다. 우리는 언제든 사람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고,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심지어 외로움을 실시간으로 드러내고 반응받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이렇듯 상호작용이 강화된 시대에 혼자 있음은 종종 무능이나 실패로 간주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고독을 "관계의 부재", "사회의 소외"로 해석한다. '혼밥', '혼술', '혼행(혼자 여행)'과 같은 단어들이 한때 유행처럼 퍼졌지만, 그 바탕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불안이 깔려 있었다.


고독은 여전히 낙오자처럼 보이곤 한다. 하지만 고독은 단지 외로움의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고독은, 오히려 외로움을 덜어주는 성숙한 상태이기도 하다.


둘째, 진정한 자기 이해는 고독 속에서만 가능하다.


심리학자 칼 융은 "내면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여정을 감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고독은 자신을 성찰하고,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인식의 공간이다. 타인의 시선,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쉽게 자신을 잃어버린다. 고독은 그 길을 다시 되짚는 시간이다.


삶은 결국 혼자 마주해야 하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곁에 있어도, 삶의 중요한 순간 -결정, 후회, 기쁨, 상실, 죽음- 앞에서는 혼자의 시간을 견뎌야 견뎌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고독과 친해지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셋째, 고독은 훈련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고독을 무조건 미화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고독은 쉽게 무기력과 자기 연민으로 빠진다.


삶의 통로가 막힌 사람에게 고독은 방치이자 고통일 수 있다. 그래서 고독은 훈련되어야 한다. 자발적인 고독이 이야 비로소 그것은 성숙의 밑거름이 된다.


이를테면 하루 30분,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조용히 산책을 하거나, 혼자만의 식사를 즐기거나, 다이어리에 자신에게 쓰는 글을 써보는 것, 이러한 소소한 고독의 순간들이 점차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외로움이 아니라 고용함으로 삶을 채우는 능력으로 바뀌어 간다.


넷째, 관계의 피로를 회복하는 가장 조용한 방식


우리는 관계 속에서 기쁨을 얻지만, 동시에 많은 상처도 받는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친구, 이해받지 못한 가족, 말없이 멀어지는 사람들.


이럴 때 고독은 우리를 다시 균형 위로 올려놓는 회복의 도구다. 고독은 마음속 '소음'을 잠재우고, 타인과 맺는 관계의 '중독'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것은 어쩌면 타인과 더 잘 지내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먼저 "혼자인 나"를 잘 알아야 한다.


다섯째, 고독은 인사의 동반자다.


우리는 결국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고유한 삶을 산다. 세상의 끝에서, 병상의 마지막에서도, 우리는 누구와도 아닌 자기 자신과 마지막으로 대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독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다.


인간의 위대한 사유는 언제나 고독 속에서 태어났다. 니체, 카프카, 윤동주, 그리고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그렇다.


그들은 고독을 도구로 삼았고, 고독을 통해 인간 존재를 탐구했다. 우리도 일상 속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외로움은 고통이지만, 고독은 기회다. 고독은 자기 성장의 시간이며, 진정한 자유의 공간이다.


그래서, 고독은 즐겨야 할까?


그렇다. 준비된 사람에게 고독은 가장 창조적인 삶의 순간이다. 오늘 하루, 혼자 있는 시간을 외면하지 말자. 그 안에, 잊고 있던 당신 자신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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