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지탱하는 불편한 진실
인류는 언제나 평화를 갈망해 왔다. 그러나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평화란 그 자체로 지켜야 할 대상이며, 때로는 매우 불편하고 긴장된 상태에서 유지된다. 그 중심에는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이라는 냉혹한 현실이 있다.
첫째, 공포와 평화를 만든다.
이 표현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공포가 평화를 만든다고? 그러나 이는 20세기 세계사를 관통한 냉전 시대의 핵심 개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한 뒤, 양국은 언제든 지구를 수차례 파괴할 수 있는 무력으로 서로 겨누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면전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먼저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격하는 순간, 자신도 파괴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상호 확증 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rion, MAD)"의 논리.
냉전 시대의 평화는 결코 우애나 상호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상대를 죽이기 전에 자신도 죽는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둘째, 쿠바 미사일 위기: 절체절명의 순간
1962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는 공포의 균형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자, 미국은 해상 봉쇄로 응수했고, 지구는 사상 최초의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역사가들은 말한다. "당시 캐네디 대통령이 봉쇄 대신 선지 타격을 선택했다면, 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결국 이 위기는 양측의 극적인 양보와 외교적 타협으로 가까스로 봉합되었지만, 이후 인류는 핵무기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뼈저리게 자각하게 되었다.
셋째, 한반도: 여전히 유효한 공포의 균형
냉전은 끝났지만, "공포의 균형"은 한반도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북한은 지속적인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을 통해 군사적 위협을 높이고 있으며, 이에 맞서 한국과 미국은 확장 억제 전략과 연합 훈련으로 대응하고 있다.
상황은 복잡하다. 북한의 핵은 '공격용'이라기보다 체제 생존을 위한 '억제용' 성격의 짙다고 생각된다.
동시에 한국과 미국의 억제력 역시 "상호 파괴"를 암시하는 구조다. 결국 "누구도 먼저 움직이는 못하는 상태", 그것이 오늘날의 긴장된 평화다.
그러나 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북한의 도발이 한계를 넘거나, 한국 내 여론이 급격히 요동치는 순간, 이 균형은 무너질 수 있다.
게다가 중국과 러시아, 일본까지 이 지역의 이해관계자로 얽혀 있는 만큼, 한반도는 동북아 전체의 불안정성을 상징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넷째, 우크라이나 전쟁: 공포가 무력해진 순간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면서 국제 질서는 다시 뒤흔들렸다. 핵무기를 보유한 러시아는 전면전을 개시했고, 나토는 우크라이나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면서도 직접 개입은 피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러시아가 "핵보유국"임에도 불구하고 재래식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공포의 균형이 단지 "핵 억제"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여러 차례 "핵 무력 사용 가능성"을 암시하며 나토를 견제했지만, 동시에 그 수위는 조심스럽게 조절해 왔다.
다시 말해, 핵의 존재는 공포의 도구일 수는 있어도 전면 사용은 여전히 '금기'로 남아 있다.
이와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또 다른 공포의 균형 - 에너지, 경제, 정보 등 비군사적 균형 구조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에 의존했고, 전 세계 곡물 공급망이 우크라이나에 달려 있었다. 현대의 공포는 핵무기만이 아니라, 자원과 기술, 사이버 위협까지 포함한다.
다섯째, 공포는 어디에나 있다: 일상적 억제의 논리
"공포의 균형"은 군사 외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조직에서의 권력구조, 기업 간 경쟁, 언론과 정치권의 상호 견제, 심지어 인간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억제의 심리"를 경험한다.
예컨대, 경쟁사와의 가격 담합은 서로를 죽이지 않기 위한 "비공식 균형"일 수 있고, 독재 증권 아래 언론이 자율성을 지키는 방식 역시 공포와 타협의 산물일 수 있다.
공포는 결코 선한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공포는 때로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방어선이 된다.
'공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조율하고 관리할 것인가 - 이것이 진정한 외교이자 정치의 역할 아닐까 싶다.
여섯째,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그렇다면 공포의 균형을 넘어서는 길은 없는 것일까? "힘에 의한 평화"는 과도기적 수단일 뿐, 궁극의 해결책은 아니다.
장기적으로는 신뢰 구축, 투명한 소통, 다자 안보 체계와 같은 구조적 평화 메커니즘이 자라 잡아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은 멀고도 험하다.
결국 우리가 오늘 할 수 있는 것은,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되 그 위에 대화와 외교의 다리를 놓는 것이다.
미•중, 북•미, 남•북, 나토, 러시아 간의 모든 대화는 완벽하지 않아도, 공포라는 극담을 완화하는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결론: 공포의 균형은 시작일 뿐이다.
"공포의 균형"은 평화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질서이자 위태로운 평화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 조차 무너졌을 때, 우리가 맞닥뜨릴 혼돈은 상상 이상일 수 있다.
우리는 공포를 인정하되,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아야 한다. 힘에 의한 억제를 뛰어넘는 정치, 외교,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평화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수많은 공포의 균형 위에, 인내와 사유로 쌓아 올린 인류의 고된 성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