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자찬, 혼밥의 미학
에구머니나!
오늘 새벽에 올렸던 글을 지워 버렸다.
잠시 안경을 벗어 눈을 비비고 안경을 다시 쓰며 연필 모양을 누르려는데 손꾸락이 살짝 흔들렸나 보다.
어쩐지 처음 보는 글자가 떴는데, ‘뭐지. 새로 생겼나?’라는 생각 없는 멍충이가 읽어보지 않고 뭔가를 눌러버렸다.
없어져 버린 화면에 놀란 나는 눈앞으로 핸드폰을 끌어당겨 한쪽 안경다리가 머리에 걸려 삐따닥하게 쓰인 안경을 고쳐 쓰고 화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아... 안경.
천천히 할걸.
아... 뭐가 급하다고 그냥 눌러 버렸나.
핸드폰 액정에 손가락을 옮겨두고 화면에 올린 죄 없는 내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 아침부터 이상했어.
하늘에서 쓰는 조리개의 구멍은 제각각인지 비가 우두둑 덜어지다가, 갑자기 한쪽 커다란 구멍으로 쏴아아악 무섭게 쏟아져버리고, 어느 순간 부슬부슬 내리기를 반복하는 날이었다.
직선으로만 내리던 비는 내가 우산을 들고나가 뒤꿈치를 살짝 들고 몇 발짝 내딛는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바람과 합세하여 사선으로 방향을 틀어 내 우산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철벅 철벅 젖은 바지가 다리를 휘감고, 다시 집에 들어가려 방향을 틀면 사선으로 내리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직선 코스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가 젖은 운동화에서 발을 빼고, 되도록 젖은 발이 바닥에 닿지 않게 뒤뚱거리며 욕실까지 조심조심 걸어가며 ‘이런 날은 조심해야 해.’라고 날 다독여 주었다.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커피를 한 잔 타서 속이 찡하도록 시원하게 마시려 냉동고에 넣어 두었다.
의자에 털썩 앉아 브런치 스토리 메인화면 속으로 들어갔다.
슬며시 마우스를 끌어당겨 왔다 갔다 클릭하며 메인화면 속 여기저기 훑어보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런데 뭐지?
똑같은 사진이 나란히 있었다.
‘오홍, 재미있는 이야긴가 보네.’라며 사진 밑에 쓰인 글을 읽어보니 글자 모양이 똑같았다.
‘1탄, 2탄 나란히 있구나’라고 생각하기엔 내용이 똑같았다.
같은 글이 두 개가 나란히 있었던 거다.
뭐지? 라며 다시 방향키를 눌렀다.
‘저것은 앞쪽에서 보았던 맛집을 담은 글인데?’라며 반대쪽 방향키를 눌렀다.
맞았다! 같은 글이었다.
분명하다. 왜냐면 그 맛집은 우리 고향에 있는 맛집이라 잊을 수가 없다.
혹시 오래된 내 고물 컴퓨터가 이상해져 혼돈의 상태라 입력상태가 좋지 않을 수도 있기에 새로고침을 눌렀다.
스크롤을 내려 방향키로 브런치 스토리 메인 화면에 나온 글들을 훑어보았다.
‘정상인데...’
내가 이상했던 건지 브런치가 이상했던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헛것을 본 내가 걱정됐다.
냉동실에서 꺼내온 시워어언한 아이스커피를 쭉 빨아 당기고,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였지? 이삼일 전? 새로운 글이 올라오거나 좋아요 그리고 답글이 올라오면 핸드폰 화면 위 알림에 방긋방긋 웃던 브런치 로고가 없어졌다.
전자기계와는 거리가 먼 내가 핸드폰 속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잘 못 눌러 알림을 못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구독하는 작가님도 알람이 조용하다고 했다.
내가 못 본 브런치 소식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혹시 브런치 스토리가 해킹을... 설마.
아니면 홈페이지 정리 중인지도 모르지.
쓸데없는 생각은 밖에 내다 버리려 베란다 유리문을 열고 방충망 청소를 했다.
비둘기가 똥을 얼마나 싸놨는지, 지금까지 문을 열면 살금살금 들어오던 이상한 향기의 정체는 그 녀석들의 배설물.
편히 쉬라고 '훠이 훠이'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건만 싸도 너무 많이 싸 놓았다.
부엌으로 향했다.
찬장 서랍에서 밀가루를 꺼내 반죽할 준비를 했다.
밀가루 1과 물 2/3 그리고 소금 조금.
밀가루에 따라 물의 양이 적어지기도 많아지기도 하니, 조금 오래된 밀가루는 물을 조금 더 넣고.
그러나 오늘처럼 비가 와 습기가 많으면 물을 줄여야지.
그냥 정량의 비율로 반죽을 시작하자.
볼에 넣은 밀가루에 물을 넣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밀가루와 물이 잘 섞이도록 해줬다.
숨을 한숨 몰아쉬고 왼손에 검은색 니트닐 장갑을 끼고 아직 반죽이 되지 않은 물과 섞인 밀가루가 든 볼을 들고 주방 바닥에 깔린 매트 위에 앉았다.
그런 다음 매트 위에 볼을 내리고 반죽을 쳐대기 시작했다.
밀가루 음식은 무조건 반죽에 공을 들여야 한다.
육수나 같이 들어가는 육. 해. 공 재료들도 중요하지만, 밀가루 반죽이 맛이 없다면 지갑 놓고 시장 보러 가는 격이다.
아! 요즘은 핸드폰으로도 결제가 되지.
치대고 또 치대야 한다. 힘들다고 대충 하지 말자. 오늘 저녁에 먹게 될 한 그릇을 생각하며 돌려서 눌러주고 또 돌려서 꾹꾹 눌러, 우리 아가 엉덩이 같은 뽀송뽀송한 반죽을 만들고 말 테다라는 자세가 필요했다.
요즘은 가끔 들리지만 20대엔 절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다.
보통은 50이 넘은 이 나이가 돼야 절을 가지 않나 싶지만, 난 20대부터 시간 나면 절에서 살았었다.
절에 갈 때마다 스님들은 자유분방한 날 못 마땅해했지만, 공양간과 텃밭에 있는 동임은 반가워하셨었다.
“동임이 왔어.”라는 말은 우리 밀가루 음식 먹겠구나.
“잘 지냈고?”라는 말은 컨디션은 어때?라는 뜻.
“얼마나 있다 가나?”는 언제 만들 거야?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였다.
스님들은 유독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 오죽하면 밀가루 음식을 승소, 스님의 미소라고 부르지 않나.
아예 스님들 삭발하는 매달 그믐과 보름 전날 중 하루, 밀가루 음식 먹는 날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매번 해드리진 않지만.
공부하느라 입맛 없다, 생식한다며 식사를 거르는 스님들도 이날만큼은 빠지지 않고 모두 나와 드신다면 믿을까?
시스루처럼 너풀거리는 물만두.
죽순이나 봄나물 소를 넣은 뜨끈한 만둣국.
한쪽에선 밀고 한쪽에선 썰며, 한 사람은 나르고 한 사람은 끓여대던 칼국수.
두 사람이 밀고 여러 사람이 밀린 반죽을 커다란 솥에 쭉쭉 뜯어대던 수제비.
팥칼국수, 콩국수, 열무국수, 김치말이 국수에 갖가지 비빔면.
그 많은 양의 밀가루 음식을 만든 덕에 내가 먹을 소소한 양의 반죽정도는 거뜬하다.
더 쫄깃해지고 부드러워지길 바라며 반죽이 담긴 볼에 랩을 씌워 한쪽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아무리 밀가루가 미세한 가루라 할지라도 말려서 빻은 작은 입자라 작은 밀가루 알갱이가 풀어지는 시간을 주어야 소화가 잘된다는 사실을 내 위를 위해 잊지 말자.
이놈에 비는 종일 그치질 않는다.
아직 호우피해로 복구가 되지 않은 지역도 있다던데, 국수 한 그릇 대접하면 좋으련만 나에겐 그럴만한 힘이 없으니 미안한 마음만 한 구석에 밀어 놓을 수밖에.
육수를 끓이려 냄비를 꺼냈다.
비 오는 날은 멸치 육수지, 냄비에 물을 담고 멸치와 다시마 그리고 양파, 대파, 말린 표고버섯 대를 넣고 육수를 끓였다.
강한 불에서 끓이다 약불로 줄여 냄비에 넣은 재료에서 맛이 잘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리기가 조금 지루한 날이다.
왜 이리 오늘은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지.
수제비가 아닌 심심한 손을 위해 만두를 만들어야 했나라고 생각이 스치는 순간 숙성되고 있는 반죽을 슬쩍 들여다봤다. 이것은 수제비 반죽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미안한 마음에 반죽이 담긴 볼을 한 번 만져 주었다.
멸치 육수의 향이 내 코끝을 지나 콧구멍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깊은 맛의 육수가 만들어질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맛난 수제비를 만날 수 있다.
나머지 재료를 냉장고에서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
호박과 감자는 은행잎으로 썰어 놓고, 당근과 양파는 채로 썰고, 육수에 들어있는 다시마를 꺼내 찬물에 한 번 씻어 채 썰었다.
진하고 구수한 육수를 가느다란 체에 밭쳐 내려 건더기와 분리해 놓았다.
육수를 끓였던 냄비를 헹구고 향도 좋고 맑은 육수를 냄비에 담아 불에 올렸다.
손을 한번 비비고 볼에 담아있던 반죽을 꺼내 다시 한번 치대 준다. 반죽을 쭉쭉 늘려도 찢어지지 않고 잡고 있는 손이 보일 정도라니, 이 정도면 갑자기 누군가 찾아온다 해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다.
육수가 끓으면 다진 마늘 조금 넣은 후 반죽을 쭉쭉 늘려 뜯어 넣고, 남은 반죽은 내일 고추장 수제비로 죽순도 넣고 얼큰하게 끓여 먹을 예정이다.
반죽을 넣은 냄비에 썰어 놓은 감자, 호박, 당근, 양파, 다시마 순으로 넣어 끓인다.
간을 한 번 보고 간장이나 소금으로 간하면 되지만 난 오늘 조선간장을 선택했다.
자~ 한 수저 호로록.
육수가 진하고 채소를 많이 넣은 이유일까? 조선간장마저도 넣지 않겠다.
후추만 살짝 치고 달걀을 풀어 끓여진 수제비에 한 바퀴 둘러주고 국자를 들고 그릇에 담을 준비를 했다.
그릇에 담긴 수제비 한입.
채소도 같이 한입.
감자 맛도 나고, 호박 맛도 나고, 당근, 양파 그리고 다시마까지 각각의 맛이 느껴지며 ‘아, 간장을 넣지 않길 잘했구나. 칭찬해.’라며 날 스스로 다독거렸다.
‘자화자찬’, 이것이 나만의 혼밥의 맛이다.
이렇게 배불리 먹고 나서 핸드폰을 만진 것이 화근이었다.
몸을 살짝 돌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닦고선 눈을 비비고 다시 안경을 쓰려다 안경다리가 머리에 걸려 삐따닥하게 걸린 안경을 잡아당기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연필이 아닌 휴지통을 눌렀다.
오늘 새벽에 써놓은 글을 지워버렸다.
브런치 스토리엔 되돌리기 기능이 없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멍충이는 고민에 빠져있다.
다시 올릴 것이냐?
다른 글을 또 쓸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