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이야기인가? 햅쌀이야기인가?
2025년생 햅쌀이 왔습니다.
띵동. ‘기다리시던 상품을 가지고 출발합니다.’라고 문자가 왔습니다.
저의 몸이 뇌에서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용수철 튀어 나가듯 둔한 몸이 벌떡 일어납니다. 발이 주방으로 소리 내지 않고 느리게 뛰려고 총총총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찬장을 열어 작은 주물 솥단지를 꺼내 살펴보았습니다. 몸이 돌아갑니다. 냉장고 앞에 도착했습니다.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곱게 포장된 버터를 꺼내 냉장실로 옮겼습니다. 잠시 몸이 멈췄습니다. 그제야 머리가 움직였지요. 팔이 바삐 움직입니다. 참기름이 잘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달여둔 조선간장을 담아둔 병을 꺼내 행주로 닦아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간장이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달임 간장은 이제 한 병밖에 남아 있지 않았네요. 내년엔 또 어디서 맛 좋은 조선간장을 사야 할까요.
제가 귀촌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을 겁니다.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도와 함께 움직였을 때였죠. 지역 음식 상권을 발전시키겠다는 한 모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지역 농산물로 우수한 음식을 개발해서 판로 확장에 나서고 싶다는 이들을 군에서 후원해주고 있었습니다.
한 분이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장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죠.
솔직히 시골에서 음식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깜짝 놀랐던 적이 많았어요. 저의 선입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리에 자신 없다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전라도에 산다고 모든 아낙네의 손에서 감칠맛이 묻어나지는 않더군요. 말은, 시골에 산다고 하여 모두가 간장을 담을 줄 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첫 번째 만들어 판매해 본 적은 있는지와 두 번째 왜 굳이 장류를 만들고 싶으냐고요. 어머니에게 장류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나머지 질문에 관해선 들을 필요가 없게 되었죠.
이 지역에 명인이라는 타이틀을 받은 분들이 수두룩하게 빽빽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냐고 물었지요. 자신도 명인이 되고 싶다고 하더이다.
전통식품 명인이라는 거룩한 호칭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일이 아닙니다. 노력과 땀 그리고 삶을 쏟아부은 올곧고 외로운 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는 과정이지요.
장을 담그려면 어떤 콩이 좋은지 알아야 하지요. 토질의 상태, 튼실한 모종을 보는 눈, 날씨를 읽고 걱정하며 기도하는 마음, 심는 시기와 수확하는 정확한 시간, 좋은 콩을 보는 눈, 삶는 방법, 메주를 만들고 띄우는 정성. 이것뿐이겠습니까! 좋은 물이 있어야 하지요. 장을 넣어둘 알맞은 장독을 마련해 관리를 해야 합니다.
아참! 장독대가 있어야 합니다. 장독대는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짓는 과정만큼 힘들지요. 햇볕이 잘 들어오는 장소를 선택해야 합니다. 물 빠짐도 좋아야 합니다. 바람이 잘 통해야 합니다. 일조량은 당연히 봐야겠죠. 예전엔 풍수도 봤다고 합니다.
땅을 고르게 다지고 돌을 두 단이나 세단 정도 쌓습니다. 자갈을 깔아 줍니다. 이때 장독을 놓아야 하니 수평을 맞추어야 하고요. 모래로 덮어줍니다. 장석으로 덮어줍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독테두리에 장석을 배치합니다.
간단한 설명임에도 앞이 캄캄하지요.
수두룩 빽빽한 명인은 어떻게 될까요.
문제는 사단법인에 있습니다. 수많은 음식에 관련된 사단 법인이 있지요. 명인이라는 분에게 얼마간의 돈을 지급하고 배우면 누구나 명인이라는 직함을 받을 수 있지요. 요것이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분에게 명인이나 장인이 되기보다 잘 만든 장류를 찾아 다시 재 탄생시켜 판매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여쭤봤지요.
'여기서 잠깐. 위에서 설명한 이야기는 그분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
그랬더니 누구는 얼마 만에 명인이 됐다더라, 그러니까 군에서 지원도 해주더라,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결국은 지역 특산품으로 탁월한 제품을 만들어 널리 알리고 군의 결을 동시에 높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군에서 지원금만을 받고 싶다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그러더니 저에게 장류는 왜 담지 않냐고 묻더군요.
저는 고추장은 담는데 된장이나 간장은 저보다 훨씬 잘 만드는 장인분들의 예술품을 사 먹는다고 했지요.
그런 다음 북어 대가리, 마른 홍합, 구운 대파, 마른 양파껍질, 깨끗이 손질한 통마늘, 다시마, 표고버섯, 통후추, 오가피나무, 배, 사과, 무 같은 재료를 넣어 푸우우우욱 달인 물과 간장을 섞어 다시 푸우우우욱 끓여 쓴다고 했습니다.
전통음식을 만드는 대가님들이 만드는 재료로 제 음식에 활용하는 일이 제 일이라고 설명했고요.
그 후로 그녀는 저를 만날 때마다 생뚱맞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나저나 다음엔 어디에서 간장을 사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요런 저런 잡스러운 생각으로 시간이 보냈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현관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연속으로 왔던 비 때문에 세워둔 우산만 삐다닥하게 벽에 기대 있습니다.
아! 택배를 두고 갔다고 문자를 보냈을까요?
무릎이 구부러질 새도 없이 작은 보폭으로 발을 재빠르게 움직여 방으로 갔습니다. 음... 택배 아저씨의 문자가 없었습니다. 앞서 왔던 문자를 열어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도착하는 시간을 먼저 써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15시에서 17시 사이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왜 이리 성질머리가 급한지.
세시엔 도착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일찍 오지 않을까 기대도 해봤습니다.
천천히 커피가 있는 장 앞에 섰습니다. 커다란 컵에 커피를 담고 커다랗고 네모난 그리고 둥근 얼음 덩어리를 넣고 시원한 물을 부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택배 아저씨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점심으로 먹으려 했던 달걀, 간장, 버터, 참기름 비빔밥은 물 건너갔습니다.
얼레 달걀이 있나 확인한다는 것이 깜빡했네요. 얼른 냉장고를 열어 확인했습니다.
휴~
엉덩이가 들썩거려 손에 잡히는 게 없었습니다. 라면으로 겨우 점심을 때우고 동그란 탁상시계를 바라봤습니다.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죠.
세시였습니다. 혹시나! 현관문을 열었죠. 우산만 있었어요.
시곗바늘이 다섯 시에 가려면 삼십 분은 마음 풀어야 했습니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았습니다.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와야 할 것 같아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습니다. “오마나!” “아 깜짝이야!”를 동시에 외치며 저도 한 발짝 뒤로 물러나고 택배 아저씨도 주춤하고 놀라 서서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소리 없이 택배 상자를 받아 들고 아저씨는 인사하고 서로 뒤돌았습니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처럼, 저는 집으로 아저씨는 오셨던 길로 퇴장하셨습니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택배 상자를 열려고 기를 쓰다, 식탁으로 가져와 차분이 택배 상자를 열었습니다.
이천에서 온 햅쌀이 들어있었습니다.
봉투를 열고 준비해 둔 통에 쌀을 부어 넣었습니다.
살살 쓸어 만져보니 보송보송한 쌀의 촉감이 느껴졌습니다. 부딪치는 소리가 맑은 것을 보니 햅쌀이 분명했습니다. 묵은쌀이 부딪치는 소리와는 다르지요.
한 알 들어 씹어 보았습니다. 튼실한 쌀이 부드럽게 씹히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입안으로 퍼집니다.
잠시 맛을 음미하다...
인사라도 할걸 그랬습니다.
감사하다고요
볼에 쌀을 넣고 물로 씻어 줍니다. 물에 우러나는 전분기가 뽀얀 크림색 같습니다. 잠시 조리대에 두고 방으로 왔습니다.
들썩이던 마음은 어디 갔는지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입니다.
불린 쌀을 작은 주물 솥단지에 넣었습니다. 불을 꼈습니다.
사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잠시 후 밥 익는 냄새가 방안까지 들어왔습니다. 햅쌀은 빨리 익나 봅니다. 벌써 절 부르는 포근한 향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참기로 했습니다.
이제 구수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맛난 누룽지까지 만들어졌나 봅니다.
불을 끄고 잠시 뜸을 들였습니다.
다시 손이 빠르게 움직였지요.
스크램블을 넣을까? 수란을 넣을까? 생달걀을 넣어서 밥솥에 넣어 섞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기름에 지진 달걀부침으로 정했습니다.
밥솥을 열었습니다. 윤기가 흐르는 밥에서 고소하고 포근한 냄새가 내 콧속을 자극합니다. 얼른 김치를 꺼내 한 숟가락 입에 넣었습니다.
바로 이 맛입니다. 제가 기다리던 햇밥의 맛.
바로 이 자태를 원했단 말입니다.
누룽지마저 구수합니다. 내일은 눌은밥인가요.
서둘러 그릇에 담고, 간장을 두르고, 버터를 올리고, 살살 갈아놓은 참깨를 뿌리고, 참기름을 쪼르륵 둘렀습니다. 작은 접시에 달걀을 옮겼습니다.
먼저 달걀 없이 비벼 한입 먹어봅니다. 버터도 들어가고 참기름이 들어가 느끼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달임 조선간장이 꽉 잡아 주었습니다.
이제 달걀을 넣고 비벼 봅니다.
어려서 먹었던 맛은 절대 잊히지 않나 봅니다.
포근한 맛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