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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뮴 Dec 13. 2022

포스트세계여행, 세계여행을 끝내며 시작하는 글

1. 나의 세계여행은 어떻게 끝이 났는가?

  복 두 시간 반이 넘는 출퇴근길을 세계여행을 하는 상상으로 가득 채우던 때가 있었다. 제일 자주 하던 상상은 몽골의 대자연도, 부다페스트의 야경도, 우유니의 소금사막도 아니었다. 여행ㅡ혹은 과업, 혹은 도전, 혹은 시간낭비ㅡ을 끝내고 한국으로 다시 귀국하는 순간이었다. 길에서 단련된 새까맣고 탄탄한 몸과 뭔가 빛나는 눈을 가지게 됐을 내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벅찼다. 익숙한 한국어 안내방송을 들으며 고난과 역경의 여행길을 함께한 내 배낭과 기념사진을 남기는 모습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찼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 어떨 때는 몰래 귀국해서 짠하고 놀라게 해 주면 놀라움과 반가움에 날 안고 뻐할 가족과 친구들 생각에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중 하나도 내 상상처럼 되지 않았다. 하나도. 제기랄.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나의 원래 계획은 미 서부여행을 끝내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을 경유하여 대구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중국에서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중국 경유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뭐, 이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른 나라를 경유해서 인천으로 가면 되니깐. 이때 심각성을 인지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어야 했나?

  얼마 후, 대구가 코로나로 뒤덮이면서 가족들로부터 귀국금지 명령을 받았다. 코로나가 없는 남미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한국의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면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사실 여행을 끝내기 아쉬웠기 때문에 합당한 사유로 여행을 연장할 수 있어서 좋았다. 덕분에 느릿느릿 쉬어가며 시간을 보냈었다. 이때 내가 미적미적거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면 페루에 갇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려나?

  그러다 3월, 여행의 끝인 페루에서 코로나를 피해 한두 달 머무를 수 있는 나라를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런던을 선택했다. 꼭 다시 와서 살리라 결심하며 비자며 집세, 일자리까지 알아봤던 런던. 그곳에 가면 여행하다 사귄 친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고 비자 없이 3개월이나 체류가 가능했다. 여행이 아닌 정착이라는 새로운 경험에 설레고 두근거렸다. 그래, 참 기대됐다. 젠장. 조금만 덜 기대했었으면 금방 다시 여행이 가능해질 거란 미련을 빨리 버릴 수 있었을까?

  런던행을 일주일 앞둔 3월 15일, 나는 페루 와라즈에서  갇혀버렸다. 페루 정부에서 갑작스럽게 모든 국경을 봉쇄하고 페루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2주간의 강제 격리, 이동금지 명을 내린 것이다. 한국 대사관은 '빨리빨리'의 나라답게 국경 봉쇄 3일 만에 전세기를 띄운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하지만 전세기를 타지 않았다. 뭐랄까, 솔직히 이 상황이 연장될 수 도 있지만 한두 달이면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한 달 이상으로 길어졌고 다른 나라들도 하나둘 전세기를 띄웠다. 같은 호스텔에서 머물던 외국인 친구들도 그걸 타고 떠났다. 한국 대사관에서 격리 3일 차가 아니라 3주 차에 전세기를 띄웠으면 내가 탔을까?

  전세기를 띄운다는 공지 3일 후에 바로 전세기가 뜬다고 했다. 너무 억울했다. 사흘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내 8개월의 세계 여행을 정리하고 앞으로 2개월의 여행 계획을 포기하는 데에 꼴랑 3일? 택도 없는 소리. 나는 그렇게 순식간에 여행을 끝낼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그래서 전세기를 타지 않겠단 생각이 더더욱 굳어졌다. 나의 통보에 엄마는 '혹시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진짜 이유가 있냐, 무슨 말이든 다 이해해줄 수 있다.'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여행을 끝낼 준비가 안됐다는 내 대답은 이해해주지 못했다. 그때 엄마의 눈물에 못 이겨 전세기를 탔어야 했을까?


  그 후 2주라던 격리는 야금야금 늘어나 2달을 넘기려 했다. 그제야 '이 격리는 안 끝날 거야. 한국으로 가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한국 대사관에서는 더 이상 전세기를 마련해줄 수 없었고, 다른 나라의 전세기에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지만 공항까지 이동할 수가 없었다. 결국 몇 번의 시도와 협상과 실패 끝에 2주 만에 미국 국적의 전세기 티켓을 구할 수 있었고 마이애미와 애틀랜타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을 때의 나는 긴 격리로 살이 토실토실 올랐고 스트레스로 퀭해진 눈을 가지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았던 나는 배낭과의 기념사진은 커녕 수하물로 부친 배낭을 찾지도 못한 채 유증상자로 분류되어 격리시설로 끌려갔다. 가족과 감격스러운 눈물의 포옹도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마중 나온 동생의 첫마디는 "자, 마스크랑 장갑 껴. 가까이 오지 말고 2m 떨어져서 따라와."였다.


  음... 돌이켜봐도 정말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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