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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분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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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선 Dec 04. 2019

내일부터 10시 출근입니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고 적어도 제 이야기는 아닙니다 ㅣ

출근했을 무렵 그의 이름은 사라져있었다. 사원증을 닦아보고 만져봐도 그의 이름 석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메운 건 갑작스런 제임스였다. 다른 동료들의 이름은 더욱 신비로웠다. 엘리, 아이작, 월리 등 공상과학소설의 조연급 인공지능 로봇같은 이름들을 달고 있었다. 모두의 동공이 불안을 머금어 부풀었을 무렵 대표의 엄숙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그것은 분명 목소리였지만 종소리같기도 했는데, 회의합시다.라는 짧은 한 마디는 꽤나 볼드했다. 그의 말은 단순했다.


'우리 회사도 이제 조금씩 커져가고 있어서 이제 새로운 조직문화를 만들 때가 된 것 같아요. 그 동안은 코파운더랑 개발자님끼리만 일했는데, 디자이너님과 마케터님도 새로 들어오고 해서 호칭부터 새롭게 만들어보려고 해요. 우리 이제 수평적으로 각자 님자 빼고 영어이름으로만 부르기로 해요.'


대표의 말이 끝나고 제임스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대표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이제 회의는 주최자없이 자유롭게 발언하는 시간으로 진행해보려고 해요. 그 오늘부터 새 상품 런칭시작되죠? 마케터님부터 자유롭게 런칭 계획에 대해 말씀해보시면 될 것 같아요. 별도로 기재는 하지 않을거고, 슬랙에 일정만 공유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제임스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마케터 플러버는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의 들썩임을 제임스는 알 수 있었다. 플러버의 머릿속엔 자유가 주어졌고, 울타리는 사라졌다. 풀을 뜯던 양들은 모두 도망쳤고 양치기는 멍하게 주저앉아있다. 이제 곧 주인에게 쳐맞을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는 양치기의 엉덩이다. 대표는 침묵했다. 사실 모두가 침묵했다.


오전이 끝나고 혁신은 계속되었다. 혁신은 탕비실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탕비실에 과자를 채우기 위해 제임스는 결재를 올렸다. 46,000원어치의 과자는 고작 허리높이의 작은 3단 수납장을 채우는 정도에 그쳤다. 홈런볼을 사온 건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건 부피가 큰 대신 가성비가 안나와서 몇 개 주워먹다보면 모두가 아쉬움에 젖어들 것이다. 다이제나 오예스를 사왔어야 한다. 탕비실 냉장고엔 오렌지쥬스와 감귤쥬스 몇 통이 채워졌다. 카누가 있던 자리엔 네스프레소가 들어왔는데 물을 누가 채울지에 대해 순번을 정하기로 했다. 제임스는 3째주 담당이 되었다. 고장내면 8만원이기에 유튜브에 들어가서 네스프레소 사용법에 대해 익혀보리라 다짐했다.


사실 제임스는 경력이 그리 많지 않다. 플러버의 경력이 제임스의 두 배는 되었으나, 애석하게도 플러버는 유창한 말솜씨나 사람 홀리는 싸바싸바 등을 하지 못했다. 플러버는 오늘도 욕을 먹을 것이다. 하지만 혁신이 시작되었으니 조금 혁신적으로 욕을 먹는 것이다. 그 방식은 참으로 신선했는데, 대표는 나지막하게 플러버와 일대일 대면을 하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플러버씨, 이래서 무슨 판매를 할 수 있겠어... 공부를 좀 해야 하지 않겠어요?' 플러버씨란 말은 참으로 해괴했는데 김치찌개 속에 까망베르치즈를 섞은 듯한 이질감과 또 묘하게 찰진 어감을 동시에 주었다.


플러버는 이번 콘텐츠에서도 도달을 만들지 못했다. 좋아요는 8개에 그쳤고, 도달도 47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광고비를 10만원 이상 태운 대표입장에선 내면의 화이어가 이글거릴만 했다. 보통 10만원 정도 썼으면 좋아요 2만개는 나와야 한다는것이 콘텐츠계의 정설인만큼 플러버는 핵병신취급을 받는 것이다.


그 순간 제임스는 옆자리 디자이너 앤설리의 한숨을 들었다. 앤설리의 숨소리는 매우 컸고 그것은 온기가 식기전에 제임스의 귀에 도달할 만큼 뜨거웠다. 앤설리는 플러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콘텐츠를 만들 때마다 다툼이 잦았다. 제임스도 플러버와 한 두번 부딪혔던 적이 있던 것 같다. 사실은 대표도 그렇고 이사, 아니 그렉도 내심 난감한 눈치였다. 플러버는 그렉이 데려온 지인이었다.


회사에 샌드백이 있단 건 다행이다. 어지간히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왠만한 화풀이는 그 샌드백을 통해 상쇄되기 때문이다. 플러버는 훌륭한 샌드백이었다. 그렉은 가끔 플러버에게 '내가 이러려고 너 데려온 거 아니잖아' 란 말을 했던 것 같다. 제임스는 앤설리는 일을 똥주무르듯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앤설리는 묘하게 대표와 죽이 잘 맞는다. 제임스는 디자인은 역시 이빨로 하는 거지 머리로 하는 게 아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앤설리의 이죽거림이 플러버에게 전해졌는 지 플러버는 무심한 표정으로 앤설리를 잠깐 스쳐보았다.


그 때 대표는 런칭이 오늘인데 긴급한 사항이라며 그렉과 제임스를 불렀다. 화이트보드와 포스트잇이 놓여있는 책상은 원목 흉내를 낸 합판 책상이었는데 앉을 때마다 조금씩 삐걱거리는 것이 다리와 연결하는 나사가 조금 헐거워진 모양이었다. 제임스는 안쪽에 앉으려다 삐곡삐곡하는 소리가 거슬려 대표와 마주보는 위치에 앉았다. 그들은 뭔가를 적고 붙이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마 플러버는 옥외광고 견적을 정리하고 있었고, 앤설리는 이어폰을 꽂은 채 배너광고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삐걱대는 책상소리가 신경쓰였겠지만 침묵했다. 한참의 회의끝에 몇 개의 결론이 난 듯했다. 화이트보드는 휘갈기듯 몇 문장이 1,2,3으로 적혀있었고 그렉과 제임스가 나간 후 플러버가 회의실로 들어갔다. 아마 그 1,2,3에 대한 내용의 명령하달인 느낌이었는데 혁신을 위한 날이니 조금 혁신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들리진 않았지만1,2,3의 순서가 조금 바뀌어 있던 것으로 보아 우선순위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플러버의 머릿속에 도망친 양들이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그 후로 플러버는 엉덩이를 들썩이진 않았다.


점심시간은 감자탕이다. 오늘은 거창한 혁신의 날이기 때문에 특별히 앉아먹는 좌석에서 방석을 깔고 먹기로 했다. 제임스는 재빨리 올라가 대표님의 방석을 챙긴다. 플러버는 수저를 놓는다. 그렉이 말한다. '아 근데 오히려 휴지에 형광물질 있어서 까는 게 더 안좋다는데?' 플러버는 공중에서 손의 방향을 놓쳤다. 흔들리던 손은 시선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한다. 제임스는 형광물질 걱정되서 휴지를 안놓을거면 코는 왜풀고 입을 왜 닦는 지 논리적인 의문이 들었지만 물체에 닿는 시간대비 흡수량이라는 변수를 고려해 닥치기로 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제임스는 주말에 무얼하며 보냈는지 말했다. 가족과 장어를 먹었고, 파주 통일전망대에서 부모님과 대략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 추워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좆도 재미없는 얘길 반찬으로 꺼내 감자탕과 함께 나눠먹었다. 얼마 전 종영한 동백꽃 필 무렵에 대한 스포일러와 겨울왕국2 봤냐는 말도 등장했고 태연의 into the unkown 영상 얘기로 넘어갔다가 우리도 그런거 만들어서 콘텐츠 뿌려야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정리됐다.


유튜브 구독자 132명 중 50명 이상이 제임스의 지인인 채널에서 인투디언노운을 개사해서 올려보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그렉은 그거 좋은 방법이라면서 살을 붙여보았다.


대표는 그렉을 신임한다. 둘은 코파운드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렉이 대학2년 후배이다. 그렉과 대표는 꽤나 죽이 잘 맞는 편인지라 술친구와 일친구를 겸하고 있다. 최근 일이 바빠지면서 제임스가 그렉의 부사수로 들어갔고 그렉의 일이 굉장히 많아지는 통에 제임스의 외장하드도 하나씩 늘어가는 찰나였다. 그 날 저녁 그렉은 대표와 작은 다툼을 치뤘다. 개발자였던 아이작때문이었다. 대표는 코파운더인 그렉보다 아이작을 훨씬 더 챙겼다. 그렉에겐 참이슬을 사주지만 아이작에겐 5일 연휴에 연차4일을 붙여주었다. 개발자의 위엄은 드높아서 그의 어깨는 건너건너편의 제임스의 뺨을 찌를 지경이 되었다. 그렉은 내심 불만이 있었다.


'아니 개발자가 쟤밖에 없어요?'

'어. 쟤 밖에 없어. 아님 니가 데려오던가.'


그래 그것은 사실이다 개발자는 쟤밖에 없다. 그렉은 한숨을 내쉬었고,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렉의 작업창 아랫쪽엔 원티드가 보였다.


혁신은 오후에도 계속 되었다. 일을 다 끝낸 사람은 먼저 퇴근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내일부터 출근은 10시로 조정되었다. 플러버와 앤설리의 손이 바빠졌다. 내일 아침에 보내기로 한 시안과 요청서 예약메일을 걸어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렉이 모범을 보여 먼저 퇴근하였다. 그렉의 퇴근 후 40분이 지난 후 슬랙엔 12개의 다이렉트메시지가 제임스에게 도착해있었다. 제임스는 아까 사놓은 탕비실에서 쿠크다스를 가져오다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쿠크다스는 아주 연약하기 때문에 작은 손짓에도 쉽게 부스러진다. 제임스의 쿠크다스는 원자단위로 분해되었다.


제임스는 채용공고를 완성해야했다. 채용공고엔 자율근무제, 수평적문화, 열린 사고와 협업능력 필요 등등의 문구를 추가해야했다. 플러버도 아직 남아있었다. 스치는 플러버의 곁에선 아릿한 담배비린내가 났다. 아이코스로 바꿨다고 했는데 아이코스를 통으로 놓고 불태운 모양이다. 제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혁신을 맞이했고, 새로운 내일은 아침10시에 시작될 것이다. 제임스는 내일 과자를 채우기 위한 전자결재문서를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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