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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Sep 26. 2016

두모악에서 마주한 일상, 그리고 꿈

김영갑 갤러리에서의 단상


기억


어느 무더운 여름 새벽.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찰나라 느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더위에 지친 탓이었는지 바람은 너무도 신선하게 느껴졌고, 그 순간 생각나는 어딘가가 있었다. 왜 그곳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생각이 났고, 단 한번 스쳤던 기억이 내 머릿속 어디엔가 깊이 남아있었나 보다.





두모악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긴 창이 있는 모자를 쓴 여인의 인형도 여전했고, 이 먼 외진 곳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반가웠다. 제주의 바람과 대지, 오름을 사랑했던 김영갑 작가의 한결같았던 마음처럼, 더 잘나게도 혹은 더 못나게 변한 것도 없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일상


정원은 고요했고 조각상들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운명처럼 바뀔 수 없는 하나의 표정과 자세였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듯, 그들은 고요하고 편안해 보였다. 마치 한치의 틈도 용납되지 않는 경직된 우리의 삶 같은 부동의 자세였지만,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한결같은 모습은 그들의 일상이었고, 그들을 바라보니 나의 일상이 생각났다. 늘 반복되는 삶 속에서 나는 순간순간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왔을까? 그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조각상들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 저희를 바라보는 당신. 당신은 정지되어 있는 저희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사실 저희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지금 당신이 보는 이 자세로 있는 것이 편안하답니다.


그런 이유는 아름다운 사계절의 정원과, 낮과 밤의 하늘을 볼 수 있어서예요.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비와 눈을 온몸으로 맞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이라 생각하니 답답하고 불편했지요. 하지만 우리들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되자 불편함은 익숙해졌고 그것은 곧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저희들 모습에 웃기도 하고, 즐거워하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낍니다. 그것이 저희들이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니까요.


저희의 일상은 사람들을 맞이하여 주고, 하늘의 해와 달, 구름과 별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일상을 사람들은 낭만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죠. 그렇기에 누군가의 일상은 누군가에게는 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중요성을 모른 체 무의미하게 지내곤 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생활의 식상함에 짜증내며 벗어나고 싶어 하죠. 하지만 꿈을 꿀 수 있는 곳도,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곳도, 그리고 기적처럼 인연을 만날 수 있는 곳도 일상입니다. 그래서 결국, 일상을 떠난 사람들은 그곳이 그리워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죠. 그렇기에 우리들도, 사람들도 각자 삶 속의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매일매일 힘들어하는 일상이 우리에겐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걸 잊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겹고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삶에 절망하고 불안해하며, 새로운 것, 새로운 곳을 찾지만, 결국 그것을 그리워하게 되니 말이다. 마치 아주 먼 여행지에서 땅거미가 지고 어둑어둑 해가 질 때면 매일 잠을 자던 나의 침대, 매일 식사를 하던 나의 식탁, 그리고 냉장고 한구석에 있는 먹다 남은 고등어 한 조각이 그리워지 듯 말이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마주하는 일상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무디어 지곤 하지만 , 일상의 그리움은 그 어떤 그리움보다 크기 때문이다.






갤러리 안에는 김영갑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시홀을 돌아보던 중 나는 어느 작품 앞에서 꼼짝 않고 서 있게 된다. 아주 한참이나, 아니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만큼.


작품명.


'지평선 너머의 꿈'


그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는 꿈을 사진에 담기 위해 무수한 날들을 맞이하고 인내하며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제주의 빛과 하늘, 바람, 그리고 꿈을 끊임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루게릭병을 앓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아름다운 꿈을 꾸었으며, 결국은 그 모든 꿈을 사진에 남긴 채 마지막 눈을 감았다.


김영갑 작가의 작품 '지평선 너머의 꿈'에는 제주의 사계절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곳엔 제주의 태동하는 봄, 초록의 여름, 농익은 빛의 가을, 그리고 황량한 겨울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제주를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던 모든 것들이었다.


뚫어지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제주의 땅에 있었지만 제주가 그리웠다. 그리고 그리워하던 제주의 모든 것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것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우리에게 꿈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가슴을 시리게 하는 그리움도 함께.





아이와 어른


녹이 슨 팻말이 보였다. 인기척 없는 무인 찻집에는 환하게 등이 켜져 있었고, 은은하게 빛을 비추며 나를 이끌고 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공간이 나온다. 탁자 위에는 가지런히 놓인 컵화분이 있, 등의 빛과 창문 너머 자연의 빛이 섞여 모든 것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은 백 원짜리 동전 하나로 무엇도 사 먹을 수 없지만, 나는 백 원이면 과자 하나를 충분히 살 수 있었던 "엄마 백 원만" 하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몇 살 때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인가 찬장 안에 있던 엄마의 동전 중 100원짜리 하나를 몰래 집어 과자를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과자를 사 먹고 나선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가져갈까 말까 했던 갈등의 공포와, 과자를 사 먹은 후에 엄마가 알게 되면 혼이 날것이라는 생각걱정하고 불안해하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나는 엄마가 알게  혼난다는 생각보단, 몰래 동전을 집어 온 것에 대한 마음의 불안이 더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인 찻집에 들어서자 그날의 어린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아주아주 먼 몇십 년 전의 어린 나에게 물어보았다.


" 주위에 아무도 없네. 그냥 모른 척 공짜로 차 한잔을 하면 어떨까? 아무도 없는데 말이야 "


그러자 어린 내가 대답한다.


" 그러면 안 돼요. 얼마 전, 저는 마 몰래 동전을 집어 과자를 사 먹었어요. 과자는 맛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두렵고 무서웠어요. 저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의 꾸중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쁜 행동으로 저의 마음을 속인 것이 더 두려웠어요. 그 두려운 마음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무섭고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며칠 후 저는 엄마에게 솔직히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자 엄마는 저를 두 팔로 안아주시며 용서해 주셨고, 앞으로는 어른이 되고 엄마보다 더 어른이 돼도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고 하셨죠. 그날 이후부터는 두려운 마음도 무서운 마음도 사라졌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정직하게 차를 마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지 않으면 아마,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마음이 좋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는 두 팔로 안아줄 수도 없을 만큼 커버린 어른이니까요"





지금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 더 커버린 어른이 되었다. 유년의 기억에 있던 어른을 그리워하면서도, 어릴 적 느꼈던 두려움마저 무뎌진 어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어른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어른일 뿐, 정말 나는 내가 생각했던 어른이 되어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고 어린 나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어른이 되고 안 되고는 중요않다. 다만 아이는 멋진 어른을 동경하고, 어른은 아이를 그리워하면 된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성장하고, 어른은 아이의 꿈을 간직하며 어른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라 해도, 신호등 맞은편에 아이가 있다면, 평소에는 무단 횡단을 밥 먹듯 하던 어른이라 해도, 아이가 있는 한 절대 빨간불에는 길을 건너지 않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어른은 아이가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고, 꿈을 지켜갈 수 있도록 바라봐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꿈을 줄 수 있는 어른인지 생각해 보았다. 내 꿈도 이루지 못했는데 누군가에게 꿈을 꿀 수 있도록 힘을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의 꿈이 실패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어른이라면 그동안 꿈을 이루기 위해 경험했던 일들을 모아 아이에게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장황하고 연대기적인 스토리가 아닌 단 몇 마디의 글이나 말로 말이다.


싱고 : " 아빠는 되고 싶은 어른이 되었나요?"
료타 : " 되고 못 되고는 문제가 아냐. 중요한 건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거지 "

-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아빠 료타와 아들 싱고의 대화중에서.





우리들의 꿈


아쉬운 마음에 다시 갤러리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람들은 김영갑 작가의 생전의 영상과 작품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상으로 바라본 그의 생전의 모습은 병이 들어 쇠잔하고 처절하게 초췌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을 찾았고 결국은 그를 힘들게 했던 처절함을 무릎 꿇게 했다. 그의 꿈은 허황된 것도, 누가 봐도 될 법 같지 않았던 꿈도 아니었다.


꿈은 실현이 가능하여 꾸는 것이 아니고, 실현하기 힘들기에 꾸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든 꿈을 이룰 수 있는 정답을 한 번에 낼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 병이 들어 힘들고 거동할 수 없었지만, 역경을 딛고 사진에 꿈을 담았던 그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묵묵하고 치열하게 꿈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꿈을 보여주었고, 꿈꿀 수 있는 마음을 남겨 놓고 떠난 김영갑 작가, 그처럼 말이다.





갤러리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았다. 살랑하며 정원의 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시원하다. 바람은 낯설지 않은 느낌으로 어느 여름밤 끔찍이도 그리워하던 그곳을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이곳 두모악이, 왜 그리 그리웠고 왜 그리도 생각났었는지.







두모악의 갤러리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굳이 찍으려 했으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작가님의 소중한 노력을 한 순간에 담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지평선 너머의 꿈' 작품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두모악 홈페이지 메인에 떠 있는 작품입니다.  http://www.dumoa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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