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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Mar 23. 2017

바다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 제주올레 15코스

즐거움은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최소한의 선물이다.


한림


때로는 공기와 하늘이 정 반대인 경우가 있다. 공기는 차갑고 쌀쌀한데 하늘은 하얀 구름과 대비되어 맑고 푸르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면 길을 나서야 할 것 같고, 바람을 맞으면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고. 하지만 결국 난 길을 나선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올레 15코스를 걷기 위해 한림항에 도착했을 때가 그랬다. 떠나간 겨울을 다시 소환이라도 하듯 봄바람은 찬 공기와 섞여 차갑게 불어 댔지만 하늘은 얄미울 만큼 푸르고 파랬다. 배들은 부두에 정박해 있었고 바다새들만 포구를 지키고 있었다. 떠나야 했지만 떠나지 못한 부두의 풍경은 낯설었다. 내가 떠남을 대신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야속하지 않게.


한림항, 제주올레 15코스
한림항, 제주올레 15코스
한림항, 제주올레 15코스
장승, 제주올레 15코스


평수포구


바닥가엔 솟대가 있었다. 솟대는 신이 내려오는 통로이며 솟대 위에 조각되어 있는 새는 풍년을 내려주는 신의 신부름꾼을 의미한다. 갈매기들은 솟대 위에 앉아 쉬기도 했고, 물을 가두어 고기를 잡는 원담의 돌담에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멋지게 보였지만 사실 새들은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먹이를 먹어야 하고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 우리가 매일 그처럼 살아가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세상은 모두 똑같은 것이다. 어느 한 생명 예외 없이 모두가 말이다.


솟대, 제주올레 15코스
평수포구, 제주올레 15코스
새들과 솟대, 제주올레 15코스


어릴 적 나는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늘을 마음대로 훨훨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아 웃고 넘어갈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날은 선생님이 내 주신 숙제가 많았을 것이고, 집 밖에서는 즐겁게 놀고 있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자유롭게 그 무리에서 놀고 싶었을 것이다. 여전히 새들은 어디론가 날아갔다 다시 돌아오곤 했다. 가족을 찾아서 혹은 자신이 쉴 곳을 찾아서.


새, 제주올레 15코스
새, 제주올레 15코스


뒤를 돌아본다는 것


바다를 등지고 커다란 나무를 보며 걷다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걸어온 길이 보였다. 앞서 보았던 나무는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그림이 되어 서있었다. 나무는 앞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전혀 다른 나무가 되어 있었다. 나무의 모습은 꼭 그러리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깨워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멀리에선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만 보고 걸었던 내 마음의 뒷모습이었다. 돌아본 풍경 속에 있는 나는 좀 부끄러운듯한 표정이었다. 난 그것이 내 마음의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모습. 전혀 다른 나의 마음이 그곳에 있었다.


수원리, 제주올레 15코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안겨다 준다. 제주올레 15코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참 가슴 떨리는 일이다. 내가 생각했던 마음속의 이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면을 보고 나면 비로소 나의 마음 모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나면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한다. 그처럼 지나간 것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반성을 하거나 후회 일을 하지 않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자기반성을 잠시 내려두고 뒤를 돌아보면 그곳엔 상당한 재미가 숨어 있다.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닌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곤 돌아보지 않으면 어쩔 뻔했어하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은 보지 못한 채 주변의 모습들만 보며 꿈을 꾸어왔다. 그래서 늘 남들이 쫓는 꿈을 좇으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이기에 나만의 꿈을 꾸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 시야를 바꾸어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참 매력적인 것이며 꼭 필요한 것이다.


내가 걸어온길, 제주올레 15코스


작은 길


길을 걷다 작은 길을 보면 마음에 위안이 생기곤 한다. 특히나 을씨년스러운 날씨이거나 비가 오거나 혹은 하루 종일 하늘이 흐리다면 자연히 우울한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그런 경우 저런 작은 길을 만나면 반갑기가 그지없다. 그 이유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도 이 길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고나 할까. 누군가도 나처럼 길을 바라보며 걸었고 누군가는 한해의 농사를 지으며 길을 지났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길엔 그들이 지난 자국과 삶이 더욱 짙게 묻어나 있다. 사람들의 정이 고스란히 묻어난 삶의 길인 것이다. 그럴 때면 혼자라는 마음이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 남겨놓은 흔적은 내가 혼자라는 생각을 지워 주곤 한다.

작은길,  제주올레 15코스
밭담길, 제주올레 15코스
납읍리 가는길, 제주올레 15코스


선운정사와 금산 공원


제주의 사찰은 육지의 사찰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특이한 것은 아니더라도 지리적인 위치와 제주 사람들의 삶에 의한 것으로 법당엔 꼭 용왕신이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선운 정사에도 부처님과 함께 용왕신이 모셔져 있었다. 다른 사찰에 비해 꽤 큰 사찰이었다. 선운정사를 지나 한참을 지나다 보면 금산 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은 난대림의 공원인데 난대림은 열대와 온대의 경계에 있는 삼림을 뜻한다. 공원 안에는 상록수림이 울창하게 형성되어 있다. 연평균 기온이 14도 이상은 되어야 이러한 난대림을 볼 수 있기에,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 숲으로 들어가니 아주 오래된 고목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고목은 기품 있게 하늘을 덮고 있었다. 예전 이 마을에는 시를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나무 아래에서 한 구절 한 구절 돌아가며 시를 지었고 그 의미와 정신들은 이 나무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무언가 깊게 생각할 것이 있다면 이 곳을 찾으면 좋을 것 같았다. 무궁무진한 나무의 생각을 내가 깨달을 만큼만 꺼낼 수 있도록.


선운정사, 제주올래 15코스
금산 공원의 고목, 제주올래 15코스


고내봉


고내봉에 올랐다. 경사가 가파르기에 숨이 찼다. 배낭을 등에 맨체 얼굴을 가리던 머프를 벗어던지고 땀을 쏟아내며 오름을 올랐다. 오름을 오를 때면 때로는 숨이 가쁘도록 힘들기에 오르는 것이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 멋진 풍경을 볼 때면 올라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곤 잠시 후 그런 내 마음이 부끄러워다. 그때가 내 마음이 가장 간사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늘 간사하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이처럼 간사한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경직되지 않은 인간미 있는 아날로그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난 높은 산도 아닌 짧은 거리를 오르며 불과 몇 분 사이로 힘들다와 좋다를 반복하며 오름을 올랐다. 철저하게 간사한 아날로그 인간이 되어서 말이다.


고내봉에서, 제주올레 15코스
고내봉에서, 제주올레 15코스
아직 한라산의 눈이 녹지 않았다. 고내봉에서, 제주올레 15코스


장독대와 매화


장독들은 하얗게 핀 매화와 함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장을 전문으로 담그는 집인 듯 보였다. 겨울을 보 항아리에 담긴 장들은 봄기운을 받으며 숙성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봄이 다가올수록 그 냄새는 더욱 짙어지고 꽃들은 아름다운 향을 보태 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아니하여도 될 듯하다. 장의 구수한 냄새가 되려 봄의 기운을 더욱 돋우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저마다의 색과 향기가 있다. 그것들은 성숙될수록 깊고 좋은 냄새가 난다. 아이처럼 앳되게 보이는 청년서 성숙된 말이 나오면 나이에 상관없이 존경하게 되거나, 숙성되지 않은 꼬릿한 된장의 냄새가 구수한 냄새로 바뀌듯 말이다.


매화와 장독대, 제주올레 15코스
장독대, 제주올레 15코스
봄을 준비하는 나무, 제주올레 15코스
이름 모를 열매, 제주올레 15코스


바다로 향하는 길


바다에서 시작했던 길은 다시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좋아한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바다가 내 곁으로 다가오고 맑은 날이면 하늘이 바다인지, 바다가 하늘인지 모르게 바다로 빠져 드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누구에게는 전혀 감흥 없는 풍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연약하다. 그래서 소소한 일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것에 감동하고 때로는 작은 풍경 하나만으로도 삶의 의지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자신감을 갖고, 그 마음을 움직여 우리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누구는 뭐 이런 풍경에 거창하게 삶의 의미를 말하는가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감성이 이성을 움직이게도 한다. 살아가도록 하는 힘을 얻는 계기가 항상 거창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거대한 의미의 무언가를 찾는다면 어쩜 평생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형식과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작고 소소한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더욱 행복한 사람이지 않을까?


고내포구 가는 길, 제주올레 15코스
고내포구 가는 길, 제주올레 15코스
고내포구 가는 길, 제주올레 15코스
고내포구 가는 길, 제주올레 15코스


고내포구


제주의 봄바람은 참 시시각각 다르다. 어떤 때는 한 여름처럼 덥고, 어떤 때는 한 겨울처럼 차다. 그래서 한 가지의 기억만으로 여행 준비를 한다면 낭패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운 날 두꺼운 옷을 입고 걸어야 하거나, 추운 날 통풍이 잘 되는 옷을 입고 걸어야 하거나. 그래서 때로는 제주의 날씨가 얄밉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잠깐일 뿐이다. 길을 마친 후 사람들이 갈고 있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포구를 볼 때면 내 집 앞마당에 포구가 있는 것처럼 좋아 보인다.


하늘엔 여전히 하얀 구름이 떠 있었고 바람은 차다. 포구는 고요했지만 바다는 묵직한 물결을 일렁이며 출렁거렸고, 멀리에는 이 길과 이어지는 길도 보였다. 굳이 걸을 이유는 없었더라도 그 길 위에 서면 또 걷게 되는 것이 길인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간질간질한 설렘이 내 마음에 다가오고 있었다.


고내 포구, 제주올레 15코스
또 다시 걸어야 할 길, 제주올레 16코스로 가는 길
고내 포구, 제주올레 15코스


여행이 주는 선물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포구의 정경이 너무 좋아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점점 어둠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챘고, 하루를 묵을 숙소를 찾기 위해 어느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갔다. 주인아주머니는 안타까워하시며 방이 모두 찼다고 했다. 십 분만 일찍 왔으면 방이 있었다고 했다. 포구를 어슬렁거리지만 않았어도 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리될지 알았어도 나는 포구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숙소에서의 휴식보단 이 포구를 돌아보는 것이 더 큰 휴식이기에. 덕분에 좀 더 비싼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열명이 자도 될만한 커다랗고 넓은 방에서.


고내 포구, 제주올레 15코스
고내 포구, 제주올레 15코스
고내리, 제주올레 15코스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때로는 운이 좋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숙소에서 묵을 수도 있는 것이고, 때로는 한순간의 차이로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여행은 시작부터 모든 것이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힘든 여행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잊지 못할 여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고 안 되고의 차이는 여행을 대하는 여행자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든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이든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이기에 즐겁다면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몸이 힘들어도 즐거운 것이 여행인 것이다. 그래서 즐거움은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최소한의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여행자는 그 선물을 사양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야 할 것이다. 누가 뺏어가지 못하도록 덥석 소리를 내며 말이다.


고내 포구에서, 제주올레 15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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