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것 같지 않은데 잃어버리는 것.
나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은 첫마디가 혹처럼 불룩 튀어나왔다. 어려서 글씨를 쓸 때면 늘 팔이 아팠다. 연필을 너무 세게 쥐어 손가락에 있는 힘껏 힘이 들어가서다. 그 덕분에 연필이 닿는 가운데 손가락 한쪽에 굳은살이 생겼다. 지금도 생각난다. 글씨를 쓰다 손과 팔이 저려오면 툭툭 팔을 털어내며 글씨 쓰는 일은 정말 지겹고 하기 싫은 일이라고 했던 것이.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은 매일매일 삼시세끼를 먹는 일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아 지기 시작했다. 직장에 다니며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컴퓨터 때문이었다. 연말이면 365일 날자가 적힌 회사 다이어리는 몇 장 쓰지도 못한 채 버려지곤 했다. 기록은 대부분 컴퓨터에 남겼다. 스마트 폰이 나오고부터는 더욱 줄어갔다. 덕분에 내 손가락 굳은살도 연한 살이 되어갔다.
몇 년 전. 회사 동료로부터 노트 한 권을 받았다. 동료는 참석했던 외부 세미나에서 노트 몇 권을 받았다고 했다. 모든 참석자에게 주는 것이어서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동료는 처치가 곤란해서였는지 나에게 한 권을 준 것이었다. 나는 선뜻 받기는 했지만 별 쓸모는 없을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서랍에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왠지 노트를 열어 보고 싶었다. 노트 겉표지는 시간이 지나도 해지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처럼 장수도 두툼했다. 줄 쳐진 여백이 가득한 노트는 자유로와 보였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노트를 보니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것이어서 친숙했지만 저린 팔을 툭툭 털어내며 지겨워했던. 하얀 종이 위에 펜을 쥔 손가락에 의지해 무언가를 쓰는 것을.
노트에 글씨를 써보았다. 어색했다. 손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떠오르는 문장과 펜을 쥔 손이 엇박자가 났다. 마음은 줄 끝에 있는데 손은 마음을 따라오지 못한 채 줄 중간에 있었다. 방금 깁스를 풀어 움직임이 어색한 팔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걸음마 하는 아이처럼 천천히 글씨를 써보았다. 줄이 넘어가고 장수가 늘어갈수록 손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다. 점점 마음과 손이 합을 맞추어 만들어낸 글씨가 노트 한줄한줄을 채우고 있었다.
사라질 것 같지 않은데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손글씨도 그중 하나이다. 이제는 기록할 것이 있으면 웬만하면 손으로 쓴다. 글씨가 채워지기 전 종이는 손이 베일만큼 뻣뻣하다. 그러나 글씨가 채워지면 종이는 연둣빛 봄 풀잎처럼 부들부들 해 진다. 글씨로 채워진 장수가 늘어갈수록 노트는 늙어간다. 그러나 늙어간다고 해서 초췌하거나 안쓰러워 보이지 않는다. 되려 노트는 든든하다. 성숙한 가을의 대지 같다. 지금도 집중해서 쓰다 보면 팔과 손가락이 아프다. 엷은 살색이던 뭉툭한 손가락이 벌겋게 된다. 그러나 글씨 쓰는 일이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어린 나처럼 툭툭 팔을 털고 다시 글을 쓴다. 나의 글씨로 손때가 묻어가는 노트가 소중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