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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남편 학원

[소설을 빙자한 남편 반성문]


"입교를 환영합니다."


넓은 운동장 단상 위에 걸린 현수막이 펄럭였다. 빳빳한 빨간색 각진 모자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우리를 내려다보며 연설했다. '젠장, 다시 군대에 온 건가?' 모두가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줄 맞춰 서 있는 풍경은 영락없는 신병 훈련소였다. 영식은 이게 꿈이길 바라며 볼을 꼬집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여러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학원에 들어오셨습니다. 오늘 하루 열심히 교육을 받으시고 시험을 통과하시는 분은 집으로 귀가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시는 분은 통과할 때까지 계속 교육을 받게 되니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관은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이곳을 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하루 동안 열심히 집중해서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좋은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좋은 남편이라니?'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교육을 받으라고?'


영식은 알 수 없는 황당함에 그저 남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지정된 책상에 앉으니 '42번 교육생'이라는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꽤나 형식적인 시스템이었다.


[1교시 음식 영역]

아까 그 빨간 모자 교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교실에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영식에게 질문을 던졌다.

"42번 교육생, 하루에 몇 끼나 드시나요?"

"사람이 몇 끼 먹긴요? 세끼 아닙니까?" 영식은 불쾌함을 숨기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교관은 안경을 고쳐 쓰며 비웃듯이 한 마디 덧붙였다.

"제가 보기엔 간식까지 합쳐서 네 끼를 드시는군요."

'아니, 내가 일하는데 이만큼도 요구를 못 해?'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살벌한 분위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교관은 칠판에 충격적인 분류를 적었다.

교관1.png
사식 놈, 삼식이, 두식씨, 일식님, 영식신

"본인은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시나요?"

'나보고 놈이라고?' 모멸감에 화가 끓어올랐지만, 얼굴을 붉히며 영식은 간신히 대답했다.

"사식놈이네요." (젠장,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말이었다.)


"여러분, 스무 살 넘은 성인입니다. 언제까지 아내에게 의지할 것인가요?"


교관의 목소리가 강당을 울렸다.


"본인이 요리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는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칼질부터 한답니까? 처음에 된장찌개를 끓이면 발 냄새가 나기도 하지요. 요리 레시피를 찾아 한 끼라도 자신 손으로 해결해 보세요."


그리고는 한 끼 식사를 멋들어지게 차려내는 한 사내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하는군.' 영식은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있었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저 빨리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2교시 언어영역]

이번에도 또 그 밥맛없는 교관이다.


"여러분은 쓰디쓴 약을 그냥 먹나요? 보통 캡슐에 담아서 알약 형태로 먹죠. 쓴 약이 몸에 좋지만 먹기에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내한테는 냅다 쓴 약을 먹으라고 주나요?"


교관은 헛기침 한번 하고 칠판을 툭툭 쳤다.


"일단 쓰지 않게 잘 포장해야죠. 잔소리나 비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완곡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마치 캡슐에 담듯이 말하세요."


영식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포장은 무슨 포장이야, 솔직한 게 최고지.' 하지만 옆자리의 38번 교육생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3교시 쇼핑 영역]

다음 교시에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한 아주머니가 단상에 올라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라? 누군가 했더니 우리 마누라잖아?' 영식은 깜짝 놀라 눈을 비볐지만, 아내는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제 소원이 남편이랑 장을 보는 것이에요.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평생 장 본 일이 3번도 안 될 거예요. 무거운 짐 혼자 들고 오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남편은 모를 겁니다. 냉장고를 열더니 '먹을 것이 없네'만 연신 이야기한다니까요."


아내의 목소리는 서글펐다. 영식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 흔한 마트 카트조차 끌어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4교시 소파 영역]

교관이 화면을 띄웠다.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소파에 누워있는 건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아내가 빨래를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여러분, 소파는 왕좌가 아닙니다."


교관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퇴근 후 피곤한 건 당신만이 아닙니다. 아내도 똑같이 하루를 보냈습니다. 직장에 다니든, 집에서 아이를 돌보든 말이죠."


영식은 뒷목이 따끔거렸다. 매일 저녁 소파에서 리모컨을 쥐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거지 한번, 빨래 한번 개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소파에 앉으면 중력이 열 배로 늘어나서 못 일어나십니까?"


교관이 비꼬듯 물었다.


"집안일은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같이 해야 할 일입니다."


[5교시 디자인 영역]

이번에도 동영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화면 속에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옷 가게에서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아주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아저씨에게 옷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거 어때?"

"괜찮아."

"저거 어때?"

"괜찮아."

아주머니의 인상이 점점 찌그러지더니 짜증이 점점 차올랐다.

"이 앞에 놓인 옷은 어떤 것 같아?"

"괜찮아."

아주머니는 결국 버럭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괜찮아 밖에 할 줄 아는 말이 없어?"


동영상이 끝나고, 맘에 안 내키는 교관이 다시 등장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자주 목격하시던 장면이죠?"


교관은 천천히 교실을 둘러보았다. "무성의한 답변에 아내는 폭발하게 되어있습니다. 무관심은 독입니다. 그러니 아내가 '이거 어때?' 하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말해주어야 합니다. '색깔은 어떤데, 당신 집에 있는 어떤 옷이랑 잘 어울리겠다'처럼 말이죠."


교관은 칠판에 크게 한 문장을 적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영식은 그제야 조금씩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 '좋은 남편 학원'이라는 곳이, 정말로 필요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 시험]

오후 다섯 시, 마지막 종이 울렸다. 교육생들은 시험장으로 안내되었다. 영식의 손에는 다섯 문항이 적힌 시험지가 들려 있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 세 가지를 쓰시오.

아내의 음력 생일은 언제입니까?

아내가 최근 한 달간 가장 힘들어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해"라고 말한 날짜를 쓰시오.

아내가 당신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식은 펜을 쥔 채 굳어버렸다. 첫 번째 문항부터 머릿속이 하얘졌다. '김치찌개? 아니, 된장찌개였나? 아, 잠깐... 뭘 좋아한다고 했더라?'

결혼한 지 십 년. 매일 같은 집에서 자고,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었건만, 그는 아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시험지를 내려놓으며 영식은 깨달았다. 이곳을 나가는 것은 시험 점수에 달린 게 아니었다. 진짜 시험은 집에 돌아간 후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교관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여러분, 오늘 하루 수고하셨습니다.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오늘 배운 것을 잊지 마십시오.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은 하루 만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매일이 시험입니다."


영식은 시험지를 가방에 넣고 학원 문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 그는 마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 오늘은... 장이라도 봐볼까.'


카트를 끌며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영식의 발걸음이, 어제보다는 조금 가벼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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