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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수미 Sep 21. 2024

태동

임신 25주가 되었다. 일주일 사이에 눈에 띄게 배가 커졌다. 태동도 세졌고, 잦아졌다. 태동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신기한 기분이다. 몸 안에서 뭔가가 놀고 있는 게 정확히 느껴진다. 생명체가 배 안에 있다. 꾸물렁거리는 배 위로 손을 얹을 때마다 다짐한다.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국제팀에서 일하는 영상 인제스트 직원과 밥을 먹으면서 나이 이야기가 나왔다. 90년대 초반 생, 30대 초반이라고 했다. "아유 애기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지. 근데 그런 생각 안 들죠? 그때는 너무 늦었다, 생각 많이 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진짜 어린데. 40대에 접어든 다른 후배와 우리끼리 주거니 받거니 후회를 했다. 


30대 초반, 그때의 나는 이미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었다. 그 시절 혼잣말로 자주 했던 문장 중에 하나가 '죽으면 썩어질 몸'(ㅎㅎㅎㅎㅎ) 이었다. 곧 죽을텐데 지금 있는 체력 다 쓰자, 뭐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매일 일만 하고 술마시고 사람 만났지. 나를 펑펑 낭비했다. 밥술 사는데 돈도 아끼지 않았다. 요즘은 카드값이 그 시절의 3분의 1로 줄었다. 정확히 재기는 어렵지만 칼퇴하고 잠 많이 자는 요즘 나의 체력과 정신력도 그만큼 세이브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 부자연스러운 얼굴에 때로 좌절하고 화가 나더라도, 이내 감사하게 된다. 얼굴을 잃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충전하고 있다. 안면마비가 아니었다면, 휴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스로를 달달 볶으면서 소모하고 있었겠지. 찰떡이도 없었겠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들도 몰랐겠지. 길흉화복은 정말이지, 언제나 함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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