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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다시 찾은 길 위에서 ✦

2025.10.29

by 고병철

0일차 — 다시 떠난 길


무슨 일이 벌어지려면 계기가 있다.
항공 마일리지가 소멸된다. 올해도 없어진다.
그래, 이걸로 비행기표를 끊자.
그래서 찾은 곳이 대만이다.


10년 전쯤, 무슨 포럼 워크숍으로 갔었다. 패키지였다.
중국어도 입에서 바로 나올 정도로 절정기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기억이었다. 멀지 않고, 비싸지 않고, 지저분하지 않았다.
그때 생각했다.
‘중국이 발전하면 이 정도겠구나. 대만은 일본과 중간쯤이겠구나.’


출장 다니며 짐 싸는 일엔 이력이 났다.
하루 전날 밤에 꾸렸다. 26인치, 28인치.
자기 짐은 자기가 챙긴다.


갑자기 내려간 기온, 그러나 현지 대만은 따뜻했다.
비가 온다고 했고, 우리와 다른 기상에 맞는 옷차림을 고민했다.


아침 4시 기상, 5시 출발 목표.
씻고 최종 점검을 했다. SUV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정리함이 깊숙이 있었지만,
두 개의 캐리어를 눕혀도, 세워도 애매했다.
러기지 스크린을 떼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설치는 쉬웠는데, 빼기가 어려웠다.
결국 정리함을 뒷좌석으로 옮겨 공간 문제를 해결했다.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인천대교로 가는 길에 차가 왜 이렇게 많나.
아직 출근 시간도 아닌데.
공항 장기주차장도 만차였다. 공항 순환버스도 꽉 찼다.
‘어쩌다 공항 나들이하는 우리인데, 남들은 참 자주 다니는구나.’



그 많은 불편함을 모닝캄, 스마트패스, 자동출입국심사가 만회했다.
아이들과 아내가 미리 주문한 온라인 면세품을 인도받았다.
키오스크에 여권만 인식시키면 번호가 뜨고, 기다리면 된다.
편리한 시스템의 연속이다.
이러니 여행을 더 자주 가는 걸지도 모른다.


모닝캄은 탑승도 빠르다.
동반자도 함께 쑥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3-3-3 구조의 좌석, 이번엔 가운데 블록이었다.
서로 함께라 드나들기도 불편하지 않았다.
기대가 예전 같지 않은 기내식을 먹고, 조금 있으니 착륙.


역시나 따뜻했다.
겹겹이 입었던 옷을 벗어 백팩에 넣었다.


타오위안 공항. 깨끗하다.
그러나 UX는 깔끔하지 않다.
단순하지 않고, 뭔가 뒤섞인 느낌이다.


입국심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찜찜하다.
백팩 보안검사에서 불렸다.
수상한 봉지, 한국에서 먹다 남은 디저트.
농수축산물 아니라고 보여줬다. 통과.
작년 워싱턴에서 바나나로 혼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하물을 찾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교통카드를 찾으러 갔다.
아직 글자가 눈에 익지 않아 두리번거렸다.
안내엔 ‘나와서 왼쪽 끝’이라 했는데, 정말 거기 있었다.
보고도 못 본 것뿐이었다.


공항 MRT 익스프레스를 운 좋게 바로 탔다.
40분이 채 안 되어 타이베이 메인역 도착.
우리로 치면 서울역 같은 곳이다.


카드로 찍고 나와서, 지하철 파란선 Bannan Line(板南線) 을 찾아야 했다.
한 정거장만 가면 서문(Ximen)역, 거기에 호텔이 있다.
그런데 파란선을 찾아가는 길이 삼만리였다.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저기 가서 오른쪽 끝까지요.”
코엑스 삼성역에서 봉은사역까지 걷는 느낌이었다.


방향을 확인하고 타고 내렸다.
계단은 에스컬레이터가 일방향이다.
올라가려면 반대편 계단으로 가야 했다.
중간에 있는 노약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왔다.


이제 호텔은 어느 방향일까.
동반자는 점점 지쳐갔다.
출구로 나와, 매끄럽지 않은 길을 캐리어 끌고 걸었다.
번화하고, 번잡했다.
게다가 깔끔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명동거리 같았다.


어찌 되었든 찾았다.
호텔은 6층이 로비였다.
1단계 성공.
한숨을 돌렸다.


호텔 입구.jpg


1일차 — 첫날 저녁, 101의 불빛


카운터에 여권을 보여줬다. 예약 확인은 문제없었다.
하지만 방은 3시부터 준비된다고 했다.
얼리 체크인은 불가. 조금 징징대니 2시 반쯤 오면 가능한 방을 배정해준단다.
그것도 무료로. 고맙다, 알겠다고 했다.


가방을 맡기고 싶다고 하니 러기지 스토리지룸(Luggage Storage Room) 을 알려줬다.
셀프였다. 예상대로다.


기내식이 늦은 아침이었지만, 뭐라도 먹고 싶었다.
동반자는 향신료를 싫어한다. 대만 거리에는 냄새가 풍부했다.
구글 평점이 높은 디저트 카페에 들렀다.
직원에게 중국어로 몇 마디 했다. 국적을 직감하고 바로 한글 메뉴를 가져왔다.
시식용 케이크 조각을 내줬다.
동반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도 별로였다.
“좀 있다 다시 오겠다.” 하고 나왔다.


체크인을 마쳤다.
일본 프랜차이즈 호텔 특유의 컴팩트한 구조.
23층 방, 강이 보였다. 멀리 착륙하는 비행기도.
타이베이 메인역이 멀지 않았다.
시먼역과 중간쯤, 생각보다 위치가 괜찮았다.


오후 일정은 타이베이 101 타워.
지하철에서 내려 한참 걸었다. 주변은 화려했고, 거리도 깨끗했다.
101 내부는 더 현대적이었다. 명품 매장이 늘어서 있고,
1~5층 로비는 아트리움 구조. ‘더현대’ 느낌이었다.



전망대 카운터는 5층.
예매한 QR을 내고 긴 줄을 섰다.
패키지 단체는 다른 엘리베이터로 바로 올라갔다.
우리는 제지당했다.
89층 전망대, 야경이 어둑해지며 변했다.
어느 도시든 전망대는 가봐야 한다는 주의다.


101 타워 전망-2.jpg


지하 1층의 유명 딤섬집으로 내려갔다.
QR을 보여주니 “50분 뒤에 오세요.”
그동안 지하 쇼핑몰을 돌았다. 푸드코트, 슈퍼마켓.
일본 제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K-푸드도 있었지만 면적은 작았다.
대만은 일본을 좋아한다더니, 확 와닿았다.


기다리던 딤섬은 기대에 못 미쳤다.
나오며 사과와 오니기리를 샀다.
다음날 버스투어 간식용이다.



2일차 — 예스폭진지의 길


아침은 사과. 아삭아삭, 그 자체였다.
동반자가 감탄했다.
“여기 사과는 왜 이렇게 맛있지?”
온난화로 한국의 사과 산지가 북쪽으로 올라간다.
여긴 훨씬 남쪽인데도 이렇게 맛있다.
대만엔 3,000미터 넘는 산이 많으니,
고랭지 재배 덕분이겠지 하며 사회과부도 지식을 뽐냈다.


바나나를 하나 더 먹고, 로비의 무료 커피를 곁들였다.
“왜 이렇게 맛있지?” 하며 한 모금 더.


시먼역 5번 출구 앞, 버스투어 집합장소를 지나
중화민국 총통부로 갔다.
관람은 9시 정각,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입구 앞엔 줄이 늘어서 있었다.
우린 투어보다는 자유 관람이 좋았다.
총통부를 한 바퀴 돌며 생각했다.
우린 조선총독부를 철거했지만, 여긴 그 건물을 그대로 쓴다.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이렇게도 다르다.


버스투어는 정시에 출발했다.
예스폭진지(野柳·十分·金瓜石·九份) 다섯 코스를 도는 일정.

마지막은 지우펀 거리.
지난번엔 낮이었고, 이번엔 저녁이다.
홍등이 하나둘 켜지며 거리가 붉게 물들었다.

동반자는 가빈병가에서 ‘누가 크래커 풀매집’에 성공했다.
맛은 진짜였다.


"꽃보다 할배" 로 한국인 대만방문객이 10배, 년 70만명으로 늘었다 한다.

그들이 하나같이 등산복을 입고와서 대만 당국이 긴장했다고.

저 인원들이 모두 등산을 하면 산이 망가질텐데 하고..

여행용 전투복이라는 걸 알고 안도했다 들었다.


지우펀 홍등.jpg


3일차 — 고궁박물관의 청동기


이른 아침, 혼자 룽산쓰(龍山寺) 로 향했다.
시내 중심의 대표 사찰, 불교·도교·민간신앙이 어우러진 곳.
10년 전에도 왔었다. 이번엔 걸어서 30분.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스님 일행을 따라 신도들이 걸으며 읊조렸다.
“나무관세음보살.”
발음이 서로 다른 듯 닮아 있었다.
가족의 무사안일을 빌었다.
몇몇 서양인들도 경건히 서서 지켜봤다.


용선사.jpg


비가 부슬부슬 왔다.
길거리 아침식당에 들렀다.
만두는 입맛에 맞았고, 런빙은 향이 강했다.
지붕이 돌출된 ‘기루(騎樓)’ 아래를 따라 걷는 사람들.
비를 피하며 걸었다.


오늘의 메인은 고궁박물관(故宮博物院).
버스앱은 ‘곧 도착’이라 했지만, 실제론 30분 뒤였다.
같은 번호 버스에도 “中, 勝, CD” 같은 표시가 있었다.
기사에게 중국어로 물었다. “박물관 가나요?”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는 낡고, 시끄럽고, 흔들렸다.


박물관은 산 아래의 공원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미국인 부부가 사진을 부탁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갔죠?” 그들이 말했다.
“네, 경주에 왔어요. 천년 수도예요.”
그들은 잘 못 알아들었다. 천년이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이 우리 사진도 찍어줬다.
“좋은 시간 되세요.” 인사했다.


다음엔 도슨트를 동반해야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
지식이 얕으니 감동도 얕다.
돈을 더 벌어, 배움으로 치환해야겠다.


구궁박물관 외부.jpg
구궁박물관과 도슨트.jpg


돌아오는 길, 다시 101 타워에 들렀다.
푸드코트에서 불고기를 시켰다.
30분을 기다렸지만 맛은 별로였다.
바싹 굽지도 못하게 육수를 계속 붓는다.
“필요 없어요.”
“판이 타요.”
맛있는 불고기는, 역시 한국에서 먹는 거다.


슈퍼에서 사과와 초밥 도시락을 샀다.
호텔로 돌아와 커피를 마셨다.
로비 창가의 경치와 향이 좋았다.


방으로 돌아오니 동반자가 깜짝 놀랐다.
“지갑이랑 핸드폰 넣은 가방이 없어!”
로비에 두고 온 줄 알고 놀랐지만, 해프닝이었다.
캐리어 밑에 가려 있었다.
식겁한 동반자를 보며 웃었다.


4일차 — 비 오는 귀로


비가 내렸다.
부슬부슬이라기엔 제법 굵었다.
캐리어를 끌고 메인역까지 가기엔 어려웠다.


호텔에서 본 외부.jpg


우버 앱을 켰다. 마침 바로 앞에 택시가 있었다.
“메인역으로 가주세요. 공항으로 갈 겁니다.”
기사는 덩치가 있었다. 친절하지도 않고, 팔에 문신도 있었다.
조금 긴장됐다.
어제 확인한 익숙한 길로 향했다.
메인역 지하로 들어가더니 공항철도 입구 바로 앞에 내려줬다.
겪고 보니 착한 기사였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때는, 최소한 속으로만 해야 한다.


공항 익스프레스가 바로 왔다.
돌아가는 길은 순탄했다.


4일이 그렇게 지나갔다.
10년 전에도 왔으니,
이제는 10년 뒤에 다시 와야지.


비행기는 구름 위로 올랐다.

창밖에 비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사과의 단맛, 거리의 냄새, 버스의 흔들림이 떠올랐다.

여행은 낯선 곳에서 나를 다시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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