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전성기 8 ㅡ장수왕 3 (업적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문자명왕 )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38
ㅡ 고구려 전성기 8 ㅡ
(장수왕 3 ㅡ 업적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문자명왕 )
장수왕은 남방확장과 함께 북방에서도 요동과 요하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중부를 아우르는 동북아시아 최대강국으로 성장하였다.
내부적으로는 관직체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고, 불교를 장려하여 왕권의 정당성도 확보하였다.
평양천도로 교역이 활발해지고, 영토확장을 통해 얻은 자원을 바탕으로 경제도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정복지 주민통합 정책을 실시하여 내부결속도 다졌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존재하는 것이 역사적 진리이다.
1. 평양천도와 남진정책의 빛과 그림자
장수왕의 평양 천도와 남진정책은 단기적으로 고구려의 남방 영토 확장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북방 지역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어 만주 지역 상실로 이어졌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북방 변경은 중앙 군사·행정 통제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이 틈을 타 돌궐 ·거란·말갈 등 북방유목세력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고구려의 동북방 방어선이 약화되었다.
또한 평양 천도는 귀족세력 간의 지역적 분열을 초래했다.
기존 만주·요동 지역에 기반한 북방계 귀족(국내성계)과 한반도 중부·남부에 기반한 남방계 귀족 (평양계)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훗날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고구려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만주는 고구려 발원지이자 경제· 군사적 기반이었던 만큼 평양 천도는 고구려의 중심을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시켜 우리 민족의 주요 활동 무대를 만주에서 이탈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처럼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닌 정책이었다.
2. 조공왕 장수왕?
<삼국사기 장수왕본기>에는 북위와 남조에 대한 조공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특히 북위에 대한 조공 기록만 41회에 달하여, 장수왕은 ‘조공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단순한 사대의 표현이라기보다 당시 사료 결핍 문제와 관련이 깊다.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후기의 사료가 대부분 소실되어,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시 중국 측 기록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장수왕 시기 조공 기록은 실질적인 외교활동 반영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시대 사절은 대체로 ‘조공사’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조공기록’ 은 오히려 외교교류 빈번함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3. '신집'과 고구려 기록의 한계
'고국원왕' 대까지의 고구려 기록 은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는데, 이는 '소수림왕' 대에 편찬된 '유기'(100권)를 바탕으로
'영양왕'이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정리한 '신집'(5권)의 존재 덕분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집필할 당시 '신집'의 일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광개토대왕 및 장수왕 이전 기록은 비교적 충실하다.
그러나 장수왕 이후의 기록은 국내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전적으로 중국사서에 의존하였다.
이로 인해 장수왕 이후 왕들에 대한 기록은 조공 기사 위주로 단조롭게 구성되었고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 고구려 후기 인물들 역시 사실상 중국 측 시각에 의한 왜곡된 이미지로만 전해지게 되었다.
4. 국호 ‘고려(高麗)’의 정착
장수왕 대를 기점으로 고구려의 국호는 ‘고려’로 굳어졌다.
‘중원고구려비’에 등장하는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표현이 그 증거이다. 이 시기부터 중국사서들도 일관되게 고구려를 ‘고려’라 칭했다.
따라서 오늘날 Korea라는 국명은 단지 왕건의 고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이미 고구려 시기부터 사용된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건이 ‘고려’라는 국호를 택한 것도 고구려 계승 의식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왕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표기하면서 오늘날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이다.
<문자명왕 시대>
장수왕은 장수하여 아들 '고조다' (高助多)가 70세에 이르도록 즉위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결국 손자 '고나운' 즉 '문자명왕'이 왕위를 계승한다.
'문자명왕'은 장수왕이 구축한 전성기를 이어받았으나, 재위 후반에는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서서히 약화 조짐을 보였다.
북방의 물길·거란 세력과 남방의 백제(동성왕, 무령왕)가 모두 세력을 회복하면서,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만큼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지 못했다. 특히 한강유역을 일시적으로 상실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도 있다.
문자명왕 대에는 북부여를 병합하여 영토가 최대에 달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일부 사료 신빙성 문제로 학계에서는 논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영토가 6세기 초까지 광범위하게 유지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자명왕 말년부터 국세가 점차 약화되었고 이후 안원왕· 평원왕 대에는 고구려가 침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처럼 장수왕 시기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기틀을 이어받아 정치·군사·문화 모든 면에서 동북아시아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평양천도를 통한 남진정책은 한강 유역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만주 지역약화와 귀족분열이라는 문제를 남겼다.
문자명왕은 선대 유산을 유지했지만 점진적 쇠퇴의 징후가 나타났다.
결국 장수왕-문자명왕 대를 고구려의 절정기이자 전환기로 평가할 수 있다.
이어서 백제전성기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ㅡ
장군총(장수왕릉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