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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8

ㅡ 고구려 쇠퇴기 2 ㅡ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8

ㅡ 고구려 쇠퇴기 2 ㅡ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우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접하는 전래동화나 설화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정사인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고구려 당시 실존 인물 이야기다.


'삼국사기'에는 '온달'에 대한 기록이 꽤 상세히 나와 있다.


우선, '삼국사기' 일부 내용을 살펴보자.


1. '삼국사기'에 나타난 온달


溫達 高句麗平原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睟然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는 못생겨 우스꽝스러웠으나 마음은 순수하였다.”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낡은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다니며, 그때 사람들은 그를 ‘바보온달’이라 불렀다.”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 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평원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며 말했다.

‘네가 항상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서 사대부의 아내가 되지 못하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가야 할 것이다.’ 왕은 늘 이렇게 말하였다.”


요약하면, 평강공주는 16세가 되자 온달과 결혼했고, 이후 그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 뛰어난 장수가 되었다. 후주 무제가 요동을 침략했을 때, 온달은 선두에 나서 싸워 승리를 거두고, 왕의 사위로 인정받았다. 이후 아차산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죽은 후 관이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자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이처럼 ‘바보온달’ 이야기는 고대 설화임에도 문학적 가치가 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


만약 노벨문학상 작가인 '한강'이 세련된 문체로 바보온달 설화를 각색한다면 세계적인 동화와 견줄 만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디즈니랜드 동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2. ‘바보’ 온달의 진짜 의미


‘바보’라는 단어는 사실 온달의 순수함과 선량함을 나타낸다.


中心則睟然 → “마음이 순수하였다”


즉, 온달은 가난하고 남을 배려하며, 귀한 약재를 발견해도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적은 대가만 받고 팔았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바보’라고 불렀지만 온달 자신은 개의치 않고 웃어넘겼다. 요컨대, 온달은 ‘사람을 너무 잘 믿고 선량한 탓에 손해 보는 사람’이었을 뿐 진짜 바보가 아니었다.


1500년이 지나 또 다른 ‘바보’가 나타나니 바로 '바보노무현'이다.


3. 바보온달 이야기와 당시 고구려 사회


바보온달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 이야기뿐 아니라 당시 고구려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1) 신분적 자유: 지금보다도 신분차별이 덜했고, 신분 한계를 넘어 행동할 수 있었다.


2) 여성 권한: 평강공주처럼 자신 주관과 소신대로 행동할 수 있는 여성상이 존재했다. 현재도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는 재벌 딸이 바보가 아닌 일반인과 결혼해도 큰 뉴스가 되는 세상이다

(참고로, ‘평강공주’라는 이름은 공주 본명은 아니고, '평원왕'이 당시 '평강대왕'이라 불리어 왕의 딸이라 ‘평강공주’라 불린 것이다.)


당시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부풀어져 동화 같은 설화가 되어서 전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바보온달 이야기는 설화적 요소가 강하나, 당시 고구려 사회가 신분과 여성 권한 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음을 보여준다.


4. 바보온달 출신과 다양한 설


일부학자는 온달이 페르시아에서 고구려로 온 외국인 출신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온달이라는 이름이 고대 인도어나 아랍어 발음과 유사하다.


당시 고대 동아시아는 실크로드 교역을 통해 인도·중동과 활발히 교류했다.


고구려는 다민족 국가였기에 외국인 출신 장군도 충분히 가능했다.


또 다른 설은, 온달이 한미한 귀족 출신이었으며, 평원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온달을 평강공주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기존 귀족 세력들 반대가 너무 심했다.

이에 평원왕은 공주가 무단가출 하여 온달과 결혼한 것으로 꾸몄고, 온달을 몰래 돌보아 장군으로 만들고, 기존 귀족들을 견제했다는 설이다.


어쨌든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실을 기준으로 보면, 평강공주는 유력 귀족출신이 아니라 한미한 신분의 온달을 선택했고, 그를 교육하여 뛰어난 장군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온달 선천적 재능과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5. 평강공주와 온달의 명언


평강공주는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자 이렇게 말했다.


“古人言, 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可共乎?”

“옛사람 말에 ‘한 말의 곡식도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바느질할 수 있다.’ 단지 마음만 맞으면 되지, 꼭 부귀한 후에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날 여성들이 이 말을 깊이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또한 온달은 신라 정벌을 앞두고 이렇게 말한다.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甞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 수 이북 땅을 차지하여 백성들이 한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다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이 온달의 말을 통해 6세기 경 고구려와 삼국의 복잡한 정세를 알 수 있다.


6. 온달 죽음과 비장미


온달은 계립현과 죽령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신라 정벌에 나섰다.

결국 격전 끝에 흐르는 신라군 화살을 맞고 아차성에서 전사했다. (현재 아차성의 위치는 단양 또는 서울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가 전사한 후, 고구려인들이 시신을 관에 담아 장사 지내려 했지만 관은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평양성에서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돌아가시옵소서.”


라고 애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비장미가 흐르는 멋진 결말이다.


7. 바보온달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실린 이유


1) 온달이 역사적 실존 인물: 온달은 실존 인물이며 인내와 노력, 사랑의 힘을 강조하는 교훈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2) 문학적 가치: 한국 고대문학과 구술전통의 중요한 사례로 당시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자료가 된다.


3) 민족적 의미: 후대에 영웅적 인물로 여겨지며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도 이 세 가지 점을 생각하면서 설화 같은 내용을 정사에 자세히 기록했을 것이다.


결국 바보온달 이야기는 단순한 설화가 아닌, 역사적, 문화적, 교육적 의미를 지닌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화는 수나라 고구려 전쟁과 을지문덕, 살수대첩 이야기가 이어진다.


ㅡ 초롱박철홍 ㅡ


마지막 사진은 온달장군이 저 바위로 공깃돌 놀이를 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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