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쇠퇴기 5 ㅡ(수문제와 수양제, 그리고 고구려 침략)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1
ㅡ 고구려 쇠퇴기 5 ㅡ
(수문제와 수양제, 그리고 고구려 침략)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벌어진 네 차례의 전쟁은 사실 고구려 선제공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은 수나라 영향력이 요동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먼저 요서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양국 간 긴장이 급격히 고조 되었고, 격분한 '수문제'는 직접 고구려 원정을 명령하게 된다. 그는 같은 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이것이 바로 <수나라의 1차 고구려 침략>이다.
1. 수나라 1차 고구려 침략
'수문제' 1차 침략 원정은 장기간 강행군과 열악한 보급 문제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고구려는 험악한 자연지형과 기후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수나라 군대를 막아냈고, 결국 수문제는 큰 전투 없이 그리고 큰 피해도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2. 명군(名君) 수문제 내치
수나라 초대 황제 수문제는 중국 역사 속에서 성군·명군으로 평가되는 인물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고구려 침략 실패 이후 그는 명군답게 대외정복을 과감히 포기하고 전적으로 내정안정에만 집중했다.
그가 추진한 대표적 정책은 다음과 같다.
1) 남북조 시대 300여 년 분열을 끝내고 중국 통일 완수
2) 균전제, 조용조, 법제 정비
3) 불교 장려, 운하 건설, 도로망 확충 등 국가 인프라 구축
이러한 수문제 통치는 수나라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고 이는 후대 당 제국이 세계적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수문제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고 정치적 갈등 격화되면서 그는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공식 기록에는 604년 병사(病死) 한 것으로 나오지만, 여러 사료에선 둘째 아들 양광(수양제)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아버지를 강제로 죽였다는 설이 더 신빙성 있게 전해 내려온다.
3. 황위를 찬탈한 수양제와 113만 대군
둘째 아들 양광, 즉 수양제는 형과 아버지를 제거하고 황제를 차지한 인물로 즉위 후 아버지와 정반대 길을 걸었다. 그는 612년, 고구려 침략을 위해 113만 대군이라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힘든 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보급병력까지 포함하면 약 30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구려 전체인구보다도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질 정도의 엄청난 숫자였다. 게다가 평지·포장도로도 아닌 수천 리 험한 길을 무거운 병장기와 식량 들고 이동해야 했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지 상상해 볼 만하다.
많은 학자들은 이 수치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 기록이 '중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고 해도,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당시 중국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원정을 위해 지금 베이징(북경)에서 출발하는 데만 40일이 걸렸고 행군하는 병력이 수백 리에 걸쳐 이어졌다고 한다.
4. 수나라 군사력은 약하지 않았다.ㅡ 오히려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고구려가 수나라를 큰 피해 없이 이겼다”는 이미지 때문에 수나라 113만 대군을 약체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당나라 군대'라는 표현처럼 잘못된 인식의 결과다. 당시 수나라는 오히려 세계 최강급의 군사대국이었다. 수양제 고구려 침공 당시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ㅡ 중장기병만 9만 6천 명 편성
ㅡ 수나라 24개 군단 소속 기병은 전원 중장기병
동서양을 통틀어 근대 이전에 이 정도의 중장기병 전력을 보유한 국가는 거의 없었다.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당시 수나라는 현대 미국에 비견될 만큼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초강대국이었다.
그런 수나라의 정예군을 상대해 살수에서 30만 야전군을 전멸시킨 장군이 바로 '을지문덕'이었다.
5. 을지문덕,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없는 대승을 만들다
을지문덕이 격파한 것은 단순한 대규모 병력이 아니라 당대 동아시아 최정예였다. 고구려 군은 이를 단순 저지한 정도가 아니라 살수(현 청천강)에서 완전히 괴멸시켰다.
수나라 기록에 의하면, 305,000명 중 2,700명 생환했다
즉 전체 병력 99.11% 손실, 사실상 완전한 전멸이었다.
솔직히 현대식 무기도 아닌 고전적 무기로 단기간에 30만 명을 살해했다는 기록은 쉽게 믿기 어렵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중국 한족, 즉 수나라가 자기들이 당한 것을 더 과장해서 기록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는 전 세계 전쟁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 전투에서 괴멸적 타격이었다. 비유하자면, 현대 대한민국 한 장군이 미국 선별된 최정예 30만 명을 맞아 만나 싸워 전멸시킨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을지문덕의 이 한 번 대첩은 수나라 멸망을 재촉했을 뿐 아니라, 이후 중국세력들이 한반도 국가들 군사력을 높게 평가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는 후대 우리나라 외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6. 한국사 3대 대첩 중 가장 압도적인 승리,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장군
을지문덕은 ‘이순신’, ‘강감찬’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 주역이다. 그러나 을지문덕 삶에 대해서 출생, 성장과정, 장군이 된 과정, 죽음과 최후 등 그 어떤 것도 밝혀진 게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그리고 중국 사서> 속 '살수대첩' 관련된 적은 기록뿐이다.
그렇기에 을지문덕 대중적 인지도는 오히려 이순신· 강감찬 보다 낮지만 살수대첩 전과만큼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대규모 대승이며 세계사적으로도 중국 대륙세력 팽창 한계를 확인한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다음 편에서는 을지문덕 살수대첩 전개와 그의 생애를 둘러싼 사료·전승을 보다 깊이 있게 정리하겠다.
― 초롱박철홍 ―
1. 수문제
2. 수양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