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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2

고구려 쇠퇴기 6 ㅡ(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1)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2

ㅡ 고구려 쇠퇴기 6 ㅡ

(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1)


을지문덕은 한국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역사기록만 놓고 보면,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듯 등장해 수나라의 2차 침공 시 단 두 달 만에 대군을 궤멸시키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시 역사 기록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국내 사서 가운데 ‘을지문덕’ 독립된 전기는 전혀 없다. '삼국사기'에 을지문덕 열전이 있긴 하지만, 그조차도 < '수서' 우중문·우문술전, '자치통감'> 등 기록을 참고하여 살수대첩이 벌어진 두 달간 이야기만 적었을 뿐이다. 그나마 이 정도 기록조차 남아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을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구려는 귀족연립정권체제였고, 을지문덕은 그 안에서 군사 최고 통수권자이자 외교 협상권까지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귀족사회 내부에서도 최고위층에 속했다는 의미다. 중국 측 기록에 수양제가 장수들에게 “을지문덕을 반드시 사로잡으라”라고 밀명을 내린 사실로 미루어 봐도 당시 수나라 역시 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정도 인물임에도 생몰연도는커녕 출생 연도나 장소조차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역사학계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어느 하나도 정설로 인정받지 못한다. 전쟁 후 정치적 갈등에 휘말려 가문이 몰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다수설일 뿐이다.


‘을지’라는 성씨는 현재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지역에 몇 명 있다고는 하나 을지문덕 후손 여부는 알 수 없다.


또한 을지문덕 '을지'란 성이 수나라의 ‘율지'(尉遲)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율지는 '선비족'들이 쓰는 성씨였다. 그래서 을지문덕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반면 ‘을지’는 성이 아니라 ‘을(乙)’이 성이고 ‘지’는 존칭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고구려에서는 ‘을지’ 성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지만 ‘을’ 씨는 존재하는데, 진대법을 실시한 ‘을파소’가 그 예다.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도 을지문덕 이야기가 다뤄지지만, 대부분 지역에서 전해지던 신화나 전설을 바탕으로 창작된 이야기들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을지문덕은 안갯속 인물이라 그런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노래에도 그의 이름은 빠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을지문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을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무공훈장 중 하나인 ‘을지무공훈장’,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2번 함 ‘을지문덕함’,


서울의 중심 번화가 ‘을지로’,


한미 합동군사훈련 ‘을지훈련’

등이 모두 그를 기념한 것이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그가 해낸 공로에 비해 우리나라 역사 속에 너무 감춰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을지문덕이 우리 역사에서 수면 위로 떠 오른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1930년 대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인물 1위로 을지문덕을 꼽았다. 그리고 '을지문덕 전'을 신문에 연재했다.


사실 신채호 평가대로 '살수대첩'은 단순한 '대첩'이 아니다. 지금까지 일반사람들에게는 그 진가가 너무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살수대첩'은 한국사 모든 전투 가운데 가장 큰 승리이며, 적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전투였다. 동시에 세계사적으로도 중화문명의 팽창 한계선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수나라 30만 5천 명의 군사 중 압록강을 넘어 요동지역까지 살아 돌아간 병사는 단 2,700명에 불과했다. 손실률은 99.11%에 달한다. 인류 전쟁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 완전한 괴멸이었다. 이로 인해 수나라 최정예 병력은 사실상 증발했고, 이는 수나라 멸망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대첩은 단순히 수나라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중국인들에게 한국계 국가 군사력에 대한 경계와 평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후대 한국 왕조들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수나라는 동아시아 최강대국이었다.


그 최강 군대가 궤멸당했음에도 왕조교체(수→당) 수준 피해로 끝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 정도다. 다른 나라였다면 민족의 존망을 논했어야 할 참사였다.


살수대첩은 이후에도 중 화인들에게 강렬한 기억과 함께 심각한 자존심의 상처를 남겼다.


살수대첩이 있고 난 20여 년 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조차, 그는 먼저 고구려 '대수 전승기념물'이었던 '경관'(京觀)

을 철거하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해 결국 관철시켰다. 이 문제는 당시 영양왕을 사대주의자로 모는 연개소문 쿠데타 명분이 되었다


더 나아가 당태종은 요동으로 진격하던 중, 요택에 버려져 있던 수나라 장병들 유골을 모아 제사를 지냈고, 당시 당나라 장병들 모두가 크게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하는 촉박한 상황에서도 굳이 추모행사를 치렀다는 것은 이 사건이 당시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 마였는지를 보여준다.


살수대첩은 인류 역사상 고전적 병기를 사용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전투 가운데 하나이며, 손실률 면에서는 사실상 유례가 없는 기록을 가진 전투다.


세계 전쟁사에서 우리 민족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승리가 바로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대첩'이다.


중국기록 <수서·당서·동국통감> 등에서도 이 참패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死者略盡,還者無幾”

— 죽은 자가 거의 다였고, 돌아온 자는 거의 없었다.


ㅡ 동국통감 ㅡ


중국처럼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 한족 왕조인 수나라 군대가 거의 전멸했던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다는 점은 당시 중국 측 충격 크기를 말해준다.


그러나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살수대첩이 우리 민족에게는 통쾌한 대승이었지만, 인류라는 관점에서는 지극히 비극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단 한 지역에서 30만이라는 청년들이 몰살당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수양제라는 광기에 사로잡힌 황제였다.


사실 수나라에게는 1차 침략 이후 고구려를 다시 침공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수양제의 허영과 집착 때문에 그는 무려 세 차례 침략을 감행했고, 그 결과 고구려와 수나라를 합쳐 백만에 가까운 생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수나라와 고구려 인구 비율로 보면 총인구 10명당 1~2명이 죽은 셈이다. 미치광이 한 사람의 오만함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인류역사에는 이런 미친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등장했고, 오늘날에도 그 모습은 반복되고 있다.


결국 인류에게 ‘최고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것’은 영원한 숙제이다.


다음 편에서는 살수대첩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 나가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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