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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우 Jan 16. 2017

한식 세계화가 안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밖으로 나와보니 오히려 안의 상황이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예컨대 한국의 요리, 한식이 세계화되지 못하는 이유 같은 것 말이다.


한식이 다른 나라의 요리에 비해 열등하다거나 단지 홍보가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각 문화권의 요리 간에는 좋고 나쁨, 우월과 열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식이 한식보다 우수해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서양요리의 대명사가 왜 프랑스 요리가 되었느냐는 의문에 해답을 찾다 보니 한식이 왜 세계화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힌트도 찾을 수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유는 한식이라는 요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 비평 문화의 부재(不在)'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서양 요리하면 프랑스 요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프랑스는 17세기까지 이탈리아의 요리와 식문화 수준에 비하면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다가 18세기가 되어서야 요리가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카렘과 에스코피에 같은 천재적인 요리사들의 활약으로 프랑스 요리는 ‘발명’되었고 지금까지 서양요리의 대표주자로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재적 요리사들이 왜 하필 프랑스에서 나타나게 되었을까. 미 컬럼비아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프리실라 파크허스트 퍼거슨이 쓴 <맛을 설명하다:프랑스 요리의 승리>란 책에서 그 실마리가 엿보인다. 그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장(場)'의 개념을 빌려와 프랑스 요리가 어떻게 세계를 사로잡았는지 설명한다.


쉽게 말하면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특히 파리에서 음식에 대한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당시 파리는 전 세계의 지성들이 카페에 모여 온갖 사회적 과학적 철학적 담론을 형성하던 때다. 그 와중에 음식, 특히 미식에 관한 것은 지성인들끼리의 단골 주제였다. 교양 있는 신사라면 미식에 관한 자신만의 주관은 필수였다. 단지 맛이 있고 없음을 논하는 것이 아닌 왜 좋은 음식이 인간에게 필요한지, 어떤 음식이 좋은 음식인지에 관한 본질적 물음과 더불어 마치 문학이나 예술을 비평하듯 음식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파리의 요리 수준도 급격한 발전을 이뤘다. 그전까지 전통적으로 배운 방식대로 요리만 만들어 내면 된다고 생각한 요리사들은 자칭 미식가들의 비평을 의식하면서 요리를 내놓아야 했고, 최고의 요리를 만들기 위해 미식에 대한 고민을 하고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프랑스가 미식에 있어 급격한 발전을 이룩한 건 비평 문화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까이 일본을 보자.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일반 백성들은 고기조차 먹지 못했고, 된장국에 밥, 절임이 전부인 소박한 식단이 전통이었던 일본이었지만 근대 이후 음식문화는 급격하게 발전했다. 일본의 지성인들은 먹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일찍이 깨닫고 서양의 식문화들을 보고 연구하며 자연스럽게 음식에 대한 담론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요리인 '키타오지 로산진'은 1950년대 프랑스를 방문해 프랑스 음식이 생각보다 형편없다며 일본요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고민하기도 했다. 음식에 관한 연구나 번역, 비평 관련 서적만 찾아봐도 일본은 상당한 수준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요리와 음식에 있어 강한 자부심을 가진 이탈리아. 미식과 관련된 산업이 관광산업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때문에 비평 문화가 자연스럽다. 단지 한 식당의 요리를 평가하는 것부터 식재료 생산과 유통까지 전 영역에 걸쳐 거대한 담론이 형성돼 있고 학문과 정책의 영역에까지 맞닿아 있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이나 요리를 생산하는 것은 실로 자살행위에 가깝다. 엄격한 품질관리에 대한 자부심은 결국 식재료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결국 '메이드 인 이탈리아'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이유가 됐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아직인 듯하다. 우리도 과거 미식을 사랑하고 예찬하는 지성인들이 존재했다.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술과 음식에 관해 노래했지만 시대적 절망에 따른 울분을 다르게 표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땀과 피로 얼룩진 우리 근현대사에서 미식에 관한 이야기는 사치였다. 잘 먹고 잘 살게 된 지금에라도 식문화에 대한 진지한 담론이 있어야 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자본이 곧 식문화가 됐다.


자본의 힘으로 겉만 베낀 서양의 요리가 물밀듯 들어왔고, 근본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요리들이 전국을 뒤덮었다. 요리사들은 이 요리가 어떤 것인지도, 원래의 맛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수요가 있으니 만들어 팔 뿐이었다. 그 와중에 몇 차례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많은 이들이 자영업, 특히 요식업에 뛰어들었다. 결국 경험 미숙에서 오는 수준 미달의 음식이 쏟아져 나왔고, 수준의 격차를 과한 조미료로 메꿨다. 조리하는 이들은 잘 팔리면 그만이었고, 먹는 사람들은 적당히 맛있으면 그만이었다. 음식에 관해 불평을 하는 사람은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과도한 조미료의 맛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각을 잃었다. 결국은 전 국민의 식문화 수준 저하를 불러왔다. 산업화된 음식들 사이에서 한식은 길을 잃었고 한국에서 ‘미식’이란 서양식의 요리, 결국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로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걸었다.


오늘날엔 맛있는 김치찌개를 하나 먹기 위해선 수많은 맛없는 김치찌개 집들을 피해야 하는 지경이다. 어느새 '맛집' 검색은 집에 들어가면 거실 불을 켜듯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맛있는 김치찌개가 과연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매스컴과 인터넷에 기대어 소문난 맛집을 찾아다닌다. 과연 한국 고유의 맛이란 걸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앞으로의 세대들이 한식의 맛을 알게 하려면 한식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찾아 나서게 해야 한다. 그 토대가 돼야 하는 건 대형 포털의 맛집 섹션이나 블로그의 글들이 아니라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음식 비평 문화다. 홍어는 전라도 어느 집이 맛있고 김치찌개는 종로 몇 가의 어느 집이 맛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왜’와 ‘어떻게’에 대한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비평이 절실하다.


음식 비평의 시도는 꾸준히 있어 왔지만 자리잡기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음식에 관해 비평한다는 것은 결국 밥그릇을 건드리는 민감한 문제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음식 관련 글들은 맛있다는 칭찬 일색이다. 부족하고 아쉽다는 부분은 거의 없다. 비평은 없고 홍보만 있다. 자칫 밥그릇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는다. 천일염에 대해 꾸준히 비판을 제기해온 모 맛 칼럼니스트는 지금이야 그 빛을 보았지만 당시엔 관련 업계로부터 꽤 고초를 치렀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국내 모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대한 비평을 쓴 아무개 음식 비평가도 네티즌뿐 아니라 업계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공격을 받고 잠정적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저항이 거세다 보니 비평이 거세된 적당한 칭찬만 쏟아진다. 그러다 보니 기존 노포들을 찬양하는 글이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이다. 왜 맛있는지에 대한 근거는 없고 개인적 경험에 기반해 감성적인 글로만 채워진다. 대중들도 접하는 정보가 그 정도니 이름이 알려진 곳에만 몰린다. 이래서는 발전이 없다. 왜 맛이 있는지 왜 맛이 없는지, 맛있는 음식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만든 요리가 어떤 것인지 논할 수 있는 비평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으면 식문화 수준도 자연히 높아진다. 요리사들도 어떻게 해야 20-30대 여심을 공략해 돈을 벌 까란 고민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음식을 개선 발전시킬까 고민할 수 있을 수준까지 다다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고민을 하며 한식을 세계에 알리는데 공을 세우고 있는 젊은 요리사들도 있다. 요리사들은 비평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비평하는 쪽은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비평할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요리사도 많이 필요하지만 제대로 된 비평가들도 필요하다. 


미식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요리를 찾는다. 프랑스 요리에 지친 그들은 일본, 북유럽, 남미 등으로 그 관심대상을 옮겨갔다. 미슐랭 가이드의 한국 진출을 놓고 한식이 결국 세계의 인정받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국가차원에서 엄청난 재정을 써가며 홍보를 하지 않아도 제 발로 그들이 한국의 음식을 먹으러 찾아올 수 있게 하려면 결국 우리의 음식 수준을 높이는 것 외엔 없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좀 더 먹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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