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자 워홀러의 취업전선
어른의 사전적 정의는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제일 먼저 찾아본 것이 어른에 대한 정의다. 그 정의를 확인하고 제목을 어른에서 미완의 어른이로 바꿨다. 육체적으론 다 자랐을지 몰라도 아직 나의 성장은 현재진행형이다. 아직도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확고하게 정하지 못했으며, 또 내가 선택한 일에 완벽하게 책임을 질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어린이와 어른의 중간 어딘가에서 성장통을 앓고 있는 미완의 어른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어린 왕자>에서 주인공의 엄마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인생계획표를 들이민다. 하루 일과는 물론 앞으로의 생일마다 받게 될 선물 리스트까지 빼곡하게 적힌. 짧게는 10분 단위로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은 모난데 하나 없이 네모 반듯해 어디 하나 틀어지기라도 하면 모서리에 손을 베일 것 같다. 아이를 틀에 박힌 어른으로 만들기 위한 감옥에 가두어 놓고 엄마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너도 언젠가 홀로 살아가야 해.”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아이를 움직이게 만든다.
“너도 언젠가 멋진 어른이 될 거야.”
유난히 불안해 보이는 엄마의 동공 너머로 비치는 아이의 불안한 모습. 부모의 불안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해지고, 아이는 알람이 울리는 시계를 보며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공장의 기계처럼 하루를 산다. 마치 그게 당연한 순리라는 듯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한다. 엄마가 말하는 멋진 어른이 되기 위해.
이 영화를 보고 처음 든 감정이다. 내 부모님은 이런 면에서 정말 관대하셨다. <어린 왕자>의 엄마가 생선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선을 잡는 법에 대해 너무나 철저하게 가르쳤다면, 내 부모님은 생선을 잡는 법도 스스로 터득하게 하셨다. 삶에 대한 결정은 모두 자기 몫이라고 가르치셨고, 내 선택이 인생이나 사회적으로 크게 빗나가지 않는 이상 큰 으름장을 놓는 일도 없었다. 대신 그 책임도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틀에 박힌 어른이로 자랐다. 웹툰 원작 드라마 <치즈인 더 트랩>의 홍설처럼 완벽하다고 믿는 어느 하나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한없이 추락하고 마는 위태로운 어른이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인생계획표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했다. 올바른 계획표라는 확신도 없이 하루하루 작은 목표를 이뤄가며 소소한 행복을 찾아야 했다. 나는 부모가 내민 계획표의 방향대로 살 수 있는 조금은 시시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맞다 틀리다 누구 하나 대답해주지 않는 빈종이에 삐뚤빼뚤 그려진 확신 없는 삶, 그게 가장 큰 독이 됐다.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뭐라도 해야 하니까 열심히 하고 보는 식의 학창 시절이 흐르고 흘렀다. 결론만 놓고 보면 나 역시도 시시한 어른이 됐다. 아직도 앞날의 확신이 없는 미완의 삶을 살고 있는.
학창 시절 내내 <어린 왕자>의 엄마처럼 누군가 대신 선택해주길 기대했다. 망망대해에 놓인 어린아이에게 어느 방향으로 노를 저으라고 말해줄 어른이 필요했다.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인생계획표가 너무도 절실했다. 계획표의 부재가 크게 느껴질 때마다 부모님을 원망해야 했다. 그게 아니면 스스로를 원망해 또 한없이 깊을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으므로. 그리고 호주에서의 1년 동안 평생 모르고 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오롯이 내 힘으로 버텨야 하는 외국. 처음으로 부모님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 그동안 생선을 잡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 줄만 알았던 나는 부모님의 낚싯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학원을 다니며 글쟁이의 꿈을 키우고, 부모님이 내주신 학비로 문학이니 심리학이니 하는 인생을 원 없이 배웠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진짜 망망대해에 홀로 떨어져 생각했다. 이제 생선을 잡을 낚싯대 없이 맨손으로 이 넓은 바다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뭇가지를 모아 내 생의 첫 낚싯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고심 끝에 호주로 떠난다는 말을 전했을 때 부모님은 역시 “그래.”하고 말았다. 그리고 호주로 떠나기 전 방학, 한 달에 두 번도 겨우 쉬며 호주에 갈 돈을 벌었다. 아침저녁으로 매장 청소를 하고 꼬박 9시간을 서서 일해야 하는고 된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행복했다. 선택에 대한 책임, 지금 무언가 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버팀목이 돼주었다.
호주행 비행기에 오르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버팀목에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국과 똑같은 취업난. 11년 동안 배운 영어를 어디 하나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무지함이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우여곡절 끝에 친구가 일하는 가게에 취직하고 잘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삼 주. 일한 시간을 전부 합쳐봐야 고작 30시간남짓. 출근하는 도중 오늘은 손님이 없을 것 같아 나올 필요 없다는 말을 들은 것만 5번이 넘었다.
이맘때 일기엔 온통 이런 문장으로 가득하다. 우울의 끝을 잡고 또 다른 우울이 줄을 지어 데롱거린다. 그렇게 2주를 허비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이리저리 따져보니 당장 일을 구하지 않으면 부모님의 낚싯대를 호주에까지 불러들여야 하는 상황이 올 거라는 계산이 나왔다. 손으로라도 생선을 잡지 않으면 살 길이 막막해질 게 뻔했다.
입시를 앞두고 영포자를 선언했던 나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영어를 못하면 영어를 배울 곳에 가야 한다. 영어를 배우려면 영어를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하다. 결국 한인 사장 밑에서 일하기로 결심하고 호주나라를 뒤져 한 곳씩 전화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인터뷰. 당찼던 건지 생각이 없던 건지 레쥬메도 없이 열정만 달랑 들고 갔다. 당연히 탈락. 레쥬메가 없다니까 콧웃음을 치던 매니저. 우울증을 지나 거의 조증 단계에 접어들었던 나는 ‘이제 하나 배운 거야. 다음엔 레쥬메를 들고 가자.’라 생각했다. (진짜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초’긍정적인 아이였다.)
두 번째 인터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안 된다고 하셨다. 어린 워홀러는 힘들면 말도 안 하고 도망가기 일쑤라는 핑계와 함께. 결론은 그만큼 그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결국 레쥬메가 있어도 탈락.
호주 인생을 바꿔 놓은 세 번째 인터뷰. 인터뷰어는 시종일관 힘들 거라며 지난주에 도망간 여자애 욕을 늘어놓던 까칠한 여자 매니저였다. 뜬금없이 아빠가 뭐하시냐고 물어 적잖이 나를 당황시켰던. 그래도 3주짜리 짧은 경력을 좋게 쳐주겠다고 말한 것을 믿으며 일주일을 기다렸다. 정확히 일주일 후 낯선 호주 번호로 전화가 왔다. 까칠한 매니저는 아직 일을 구하지 않았냐고 물어왔고 나는 기다렸다고 답했다. 그렇게 두 번째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회전초밥집에서 하루 5시간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바쁘지 않은 시간엔 매장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가장 바쁜 점심시간에 손님 응대를 했다.
문제는 정확히 2주 뒤에 터졌다. 예고 없는 시험. 주급을 올려주는 시험을 본다며 사장이랑 매니저가 손님 역할을 하고 이것저것 물어왔다. 100개가 넘는 메뉴에 뭐가 들어가는지 외우지도 못했을뿐더러 긴장으로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알 수 없는 언어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사장은 뭘 보고 쟤를 뽑았냐고 매니저를 쏘아 부쳤고 매니저는 의외로 담담했다. 처음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온 걸 진심으로 후회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아는 척하는 건 죄가 될 수 있어.”
매니저는 나를 구석 테이블에 앉혀놓고 계산서 뒷면에 뭔가를 써 내려갔다. 가게에서 사용되는 재료의 영어 이름과 대표 메뉴에 들어가는 재료들. 일단 오늘은 이 정도만 외우라며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한 손에는 큰 메뉴판을 들고 집으로 걸어오는 1시간 반을 내내 울었다. 영어를 못하는 게 한심하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민 계획표를 받아 들었고, 이 낯선 땅 어딘가에도 작게나마 기댈 곳이 있다는 게 감사했다.
매니저는 다음 날 시민권자인 동갑내기 알바생을 시켜 일하면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영어문장을 A4 2장으로 추려서 내 가방에 몰래 넣어놨다. 그리고 바쁜 시간이 지나면 나를 불러 매일 테스트를 했다.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한국에서 영어를 배워온 11년을 합쳐 내 생에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였다. 덕분에 나중에는 매니저와 둘이 풀타임으로 일하며 혼자서도 홀을 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도 나 자신이 미생임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모르는 건 죄가 아니야. 모르는 걸 모른척하는 게 죄야.’라는 말을 속으로 몇 번씩 되뇐다. 우리는 누구나 미생이고 완생이 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한 또 다른 문을 엶과 동시에 다시 미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미생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미생이었던 나는 시드니에서 낚싯대를 만들 나뭇가지를 모았다. 그리고 더 단단한 낚싯대를 만들기 위해 또 다른 미생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시드니를 떠났다.
“인생은 다가오는 문을 하나씩 열면서 살아가는 거야.”
웹툰 원작 드라마 <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다. 퍼스로 이사를 오면서 또 하나의 문을 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영어 레쥬메와 커버레터를 썼다. 카페나 레스토랑을 직접 찾아가 레쥬메를 돌리고 구인광고가 난 곳에 메일도 보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한 달을 그렇게 보내고 나자 같이 간 친구들과 나는 지치기 시작했고 모아놓은 돈도 바닥을 보였다. 한 친구가 한식당에서 일을 시작하자 불타오르던 의욕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하루는 친구를 따라 농구장 청소를 갔다. 더러워진 농구장 바닥을 청소하는 건지 내가 흘린 땀을 닦는 건지 구분조차 가지 않을 만큼 힘들었다. 그리고 농구장에서 만난 친구에게 들은 충격적인 소식. 퍼스 현지인이 운영하는 카페나 레스토랑은 아직까지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이 있고, 동양인을 뽑는다 해도 키친 핸드 같은 주방일이 아닌 이상 손님을 직접 응대하는 일은 시민권자 같은 믿을만한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 믿고 싶지 않았지만 한 달째 연락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고,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쓴 커버레터는 누가 봐도 형편없었다.
결국 초밥집을 돌아다니며 레쥬메를 넣었다. 한국 사장이 관리하는 테이크 어웨이 샵에서 면접을 봤다. 타이완 캐셔 2명, 한국 캐셔 2명, 주방은 독일 키친 핸드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인이었다. 그렇게 발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문이 닫혀버렸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존 러스킨-
오픈 준비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바쁜 시간을 제외하고 혼자 홀을 봤다. 처음에는 타이쿤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손님 손에 주문한 음식을 들려 보낼 때마다 머리 위로 점수가 쌓이는. 그렇게 호주의 하루하루가 흘렀다. 나중에 일이 익숙해지고 매일 오는 사람과 매일 같은 말을 주고받는 게 지겨워졌을 무렵 다시 책을 폈다. 지루한 게임을 그만두고 좀 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마냥 흐르기만 하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낼 순 없었다.
바쁘지 않은 오후 시간, 전날 외운 패턴을 적용해 단골손님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호주 사람들은 내가 버벅거리면 친절히 기다려주고 못 알아듣는다 싶으면 쉬운 말로 돌려 설명했다. 당시 바디랭귀지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내 20여 년 인생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리액션을 최대한 크게 했다. 그렇게 6개월, 가게에 들리지 않아도 창 너머로 인사하는 단골손님이 많아졌을 무렵 아쉽게도 호주를 떠날 시간이 됐다.
나 하나 없어도 가게는 잘 돌아가고 손님들이 날 찾는 일도 없겠지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마지막 날 눈에 띄는 단골손님에게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건넸다.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마다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붙여 괜스레 마음을 먹먹하게 했던 사람들. 한창 바쁠 시간이 지나고 아침에 다녀갔던 단골손님 한 명이 다시 찾아왔다. 마지막 선물이라며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뒤돌아서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받아 든 쇼핑백. 안에는 향수와 함께 편지가 들어있었다. 가게는 왈칵 뒤집혔지만 그 선물을 준 의도가 어떻든, 지난 1년을 보상받은 기분에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닫힌 줄만 알았던 문이 다시 열렸다.
그 무렵 SNS에서 존 러스킨의 말을 봤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고, 하루하루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언가로 채워가는 것이라는. 호주의 1년 동안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둔 시간에 비해 내가 가진 무언가로 열심히 채워가려 했던 시간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낚싯대는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어쩌면 낚싯대는 평생 미완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물고기가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내 발로 찾아갈 수 있을 테니까.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는 앞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기 위해서 나는 여전히 나뭇가지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