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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Nov 15. 2015

테카포 호수에서 보낸 밤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21


테카포 호수에서 보낸 밤

Lake Tekapo, Canterbury

New Zealand  



늦은 오후에야 테카포 호수 바로 앞에 위치한 캠핑장에 도착했다. 구름이 낮게 낀 꿉꿉한 크라이스트처치를 떠나, 메인 사우스 로드를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다가 제럴딘-페얼리 하이웨이라는 이름마저 혀가 꼬이는 꼬부랑 산길을 오후 내내 달린 후였다.


눈이 시리게 푸르면서도 안개 같은 우윳빛이 도는 호수는 고요했다. 꼭 같은 모양으로 색깔만 다르게 핀 루피너스 꽃이 가득한 캠핑장에 텐트를 단단히 세워놓고 호숫가로 나갔다.


꼭대기에 눈이 살포시 덮인 건너편 산등성이로, 너무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보랏빛이 감돌며 해가 넘어갔다.



산속인데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호수 앞이라 그런지 곧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크라이스트처치의 뽀송뽀송한 호스텔에 잠시 머무는 동안 깊이 박아두었던 옷을 모두 꺼내 단단히 껴입고, 별이 가득 수 놓아진 밤길을 달려 마을에 하나뿐인 술집에 도착했다. 딱히 술이 마시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불이 켜진 곳이 거기 뿐이라 차를 세웠다.


텅 빈 술집 주차장을 서성거리며 별구경을 하다보니 몸이 차가워져서 오늘 밤 입 돌아가는 거 아니냐며 진담 섞인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핑계로 돈을 모아 술집에서 파는 가장 큰 보드카를 한 병 사서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사방은 천지 분간 안될 정도로 캄캄한데 잠은 아직 멀리에 있었다. 보드카 병을 휘두르며 달이 홀로 빛나고 있는 호숫가로 나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평평한 돌을 골라 앉았다.



동그랗게 빛나는 달 아래서, 폐가 상쾌해질 만큼 청량한 공기를 안주 삼아 병을 돌려가며 독한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앉은 누군가의 근사한 플레이리스트가 운치를 더해주었다.


은근한 노래가 깔리고, 아주 멀지 않은 곳에서 차가운 물 냄새가 코로 스미는 달밤의 호숫가에 앉아 있으니, 세상에 모든 근심 걱정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앞에 두고 무언가 걱정할 거리가 떠오른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말도 없이 앉아 노래를 듣고 잊어버릴만하면 술병을 돌리며 입술을 적셨다. 독한 보드카가 뜨거운 입김을 남기고 넘어가면, 곧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폐를 식혀주었다. 이상하리만치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이래서 추운 나라 사람들이 독한 술을 많이 마시는가 보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을 즈음에, 우리는 텐트로 돌아와 세 마리의 애벌레처럼 침낭에 웅크려 잠이 들었다.


엄청나게 밝고 큰 달 아래서 푸른 호수 위를 걷는 꿈을 꾸었다. 나는 찬 공기에 취해 호수 위를 또박또박 천천히 걸었다. 온 방향으로.


한없이 자유로웠던 테카포 호수에서의 밤.



다음 날 아침 확인해보니 다행히 입은 돌아가지 않았다. 산발한 머리로 일어나 동시에 중얼거렸다.


"역시 보드카의 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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