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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의 바람

by 재거니

칠레 파타고니아의 푼타 아레나스에서 4박을 하고 난 새벽, 바람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이중으로 내려진 블라인드를 올리니 마젤란 해협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채워져 있고 밤에 비가 온 흔적이 도로에 있다. 창문으로 보이는 큰 나무들이 몸부림치고 있다. 바다는 바람이 만든 하얀 파도로 가득 차 있고, 파도 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바람이 보인다. 아직 일출 전이지만 사위는 이미 훤하다. 웅웅 거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내가 아직 따뜻한 침대의 온기 속에 있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파타고니아의 바람을 보고 있다.


어제도 그제도 날씨가 너무 좋았다. 바람도 거의 없고 해도 쨍쨍했다. 오늘 같이 바람 많이 부는 날 관광을 하거나 트레킹을 해야 한다면 끔찍할 것 같다. 10년 전 1월 중순 한 여름, 파타고니아에 있는 5일 동안 이런 바람을 경험하지 못했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파타고니아는 바람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람을 날려버리는 태풍보다 강한 바람이 일상적이라고.


아침식사를 챙겨 먹고 오늘도 호텔을 나서야 한다. 룸메이드가 싱크대의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내일 먹을 아침거리를 냉장고에 넣어주는 루틴을 할 시간을 줘야 한다. 호텔 현관에서 옷매무새를 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파타고니아의 바람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하는 순간이다. 딱히 갈 곳은 없다. 먼저 오는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종점까지 가볼 생각이다. 시내버스 요금은 타면서 기사에게 현금 350페소를 지불하면 된다고 어제 오후 프런트 직원이 알려줬다.


한국의 시내버스보다는 조금 작은 빨간 중형버스들이 다닌다. 요금은 370페소라고 출입문에 적혀 있다. 500페소 동전을 기사에게 주자 거스름돈과 작은 버스표를 떼어준다. 버스 입구에는 카드단말기도 있다. 혹시 컨택트리스 신용카드로도 되는지 궁금하다. 칠레에서는 음식점, 편의점 등에서 트래블로그 카드 사용이 가능하다. 현금을 사용할 일 거의 없다. 음식점에서는 10% 팁도 함께 카드로 결제해 버리니...


푼타 아레나스 다운타운을 벗어난 버스는 외곽 주거단지를 돌고 돈다. 똑같이 지어진 집들이 나란히 서있는 단지들이 많다. 인구유입이 계속되고 있는가 보다. 12만 명 내지는 15만 명의 도시라는데 도시 범위가 넓다. 30여분 푼타 아레나스를 휘저으며 북쪽으로 가던 버스에서 어느 순간 남아 있던 승객들이 다 내린다. 종점일 거라 예상하며 나도 따라 내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걸었다. 매서운 바람이 내 등을 세차게 민다. 바람막이 재킷이 부들부들 거린다. 생각해 보니 반팔티셔츠에 조끼와 방풍재킷만을 입고 나왔다. 어딘가 바람을 피해 들어가 따뜻한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Zona Franca'라는 쇼핑몰에 들어섰다. 구글맵의 리뷰를 여니 3년 전 한국사람들이 남긴 리뷰가 나온다. 이 변두리의 쇼핑몰에 무슨 연유로 들렀다 리뷰까지 남긴 것일까? 시간 죽이기는 쇼핑몰만큼 좋은 곳 없다. 다음 주 트레킹을 위한 털모자와 장갑을 살까 하고 둘러보다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었다. 버거와 샌드위치 가게들 뿐이다. 날씨 앱을 열었다. '오늘부터 바람이 지역적으로 치명적일 예정'이란다. 기계번역인 모양이다. 바람이 치명적이라니...


오후에 호텔 침대에 기대 밖을 본다. 아직도 바람소리는 창문을 뚫고 웅웅거린다. 하늘의 구름은 다 없어져 파랗기만 한데 바람은 오히려 더 세진듯하다. 이 바람 경험하겠다고 파타고니아 온 것 아니던가? 나가지 않고 창문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 바람맞고 있을 때는 어디 숨을 곳만 찾았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파타고니아의 대표적 봉우리인 '피츠로이'를 검색했다. 피츠로이는 찰스 다윈이 탔던 비글호의 선장이다. 항해와 지도제작에 능하고 영민한 해군 장교였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항해의 말동무로 찰스 다윈의 승선을 허락했다. 처음에는 둘 사이가 좋았지만 다윈이 점점 진화론을 정립해 가자 사이가 틀어졌단다. 창조론을 부정하고 진화론에 동의하지 못한 것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고 학계의 중심에 섰을 때, 피츠로이는 이렇게 말했단다.


"비글호에 찰스 다윈을 승선시킨 것은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멋들어진 봉우리에 피츠로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산타크루즈 강을 따라 250km 정도 내륙으로 들어간 탐사대가 멀리서 신비한 봉우리를 발견하고 그 존재를 지도에 그려 넣었단다. 영국 해군이 처음 존재를 발견한 피츠로이에게 봉우리 이름을 선사한 것이다.


10년 전 배낭그룹패키지여행 중에 엘칼라파테에서 모든 사람이 모레노 빙하 트레킹을 가는데, 딱 한 분이 빙하트레킹 대신 엘찰텐으로 1박 2일 트레킹을 갔다 왔다. 그분은 파타고니아에서 모레노를 포기하고 피츠로이를 보겠다고 한국에서부터 마음먹고 온 분이다. 나는 그때 피츠로이가 뭔지도 모르고 파타고니아에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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