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지구 반대편 파타고니아까지 왔으니 파타고니아에서만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매일 경험해야 하지 않겠냐고 내 안의 다른 내가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그럴 이유 없잖아. 파타고니아를 그냥 느끼러 온 거잖아. 꼭 무슨 Excursion이니, Expedition이니를 해야 해? 그냥 바닷가 산책이나 좀 하면서 전망 좋은 방에서 뒹굴어!' 둘이 싸우고 있다. 우린 이것을 '마음의 갈등'이라고 한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했는데, 9박을 있을 생각을 하니 뭔가를 해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일요일 오후에 여행사에 들러 다음 날 월요일 막달라섬 펭귄투어를 예약했다. 그리고 금요일 차 없이는 가기 힘든 곳을 둘러볼 마음으로 렌터카 예약을 했다.
렌터카 예약이 쉽지 않은데 이유는 예약방법이 너무 많고 비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숙소를 예약하는 부킹닷컴은 렌터카 예약을 10% 할인해 준다고 은근히 끈질기게 메시지와 이메일을 보낸다. 자주 들여다보는 스카이스캐너 앱에도 렌터카 예약이 있다. 구글검색을 하면 가장 윗줄에 항상 나오는 렌털카닷컴도 있다. 이동할 것도 아니라서 렌터카를 호텔에 재우기는 싫다. 밤에 자면서도 렌터카가 잘 있는지 신경이 쓰일 것이 뻔하고, 빌린 차를 밤새 묵힌다는 것에 마음도 편치 않다. 사이트들을 이리저리 들락날락하다 보니 가능한 렌터카 회사는 Econorent와 Mitta란 회사로 수렴된다.
Econorent의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푼타 아레나스 공항 지점도 있지만 시내 지점도 있다. 시내 지점은 호텔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아침 9시에 시내 지점에서 픽업하여 당일 오후 6시에 반납하는 일정(사무실 오픈 시간에 맞춰)으로 기아 Sonet을 예약했다. 추가보험까지 해서 8만 원 이내다. 다른 렌터카 예약 플랫폼보다 훨씬 저렴하다. 그런데 홈페이지에서 결제가 안된다. 사무실 와서 해야 한단다. 상관없다.
28,000km 뛴 기아 Sonet을 받았다. 차 상태가 아주 좋다. Sonet은 현대의 Venue와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공유한다. 주로 인도와 중남미에 팔 생각으로 개발한 차다. 상관없다. 더구나 혼자 타는데 아무렴 어떠냐. 이즈음 렌터카를 받는 자리에서 360도 비디오 촬영을 한다. 나중에 서로 딴소리 못하게.
일단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Punto Arbol까지 구글맵에 도로가 있으니 남미 대륙의 가장 남쪽 끝까지 가볼 요량으로. 기분 내키면 Punto Arbol에 주차하고 한 시간 걸어서 산이시드로 등대(섬이 아닌 육지 최남단의 등대란다)까지 가볼 마음도 있으니. 왼쪽의 마젤란 해협을 따라 하염없이 내려간다. 오른쪽은 바다를 보며 지어진 집들이 제법 있다. 분명 살고 있는 집들도 있고, 여름 별장 같은 집들도 많다. 왕복 2차선 포장도로를 여유 있게 50여 km 왔을까, Punto Arbol 18km 사인을 좀 전에 봤는데 갑자기 비포장 도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비포장도로의 상태는 양호했지만 차를 돌렸다.
'더 간들 뭐가 달라지겠냐?'
더 산들 뭐가 달라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언젠가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버티다가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할까 두렵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죽음이다.
푼타 아레나스 외곽에 있는 골프장에 도착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골프장이다. 숙소와 행사를 하는 건물도 함께 있는 진정한 컨트리클럽이다. 그렇지만 골프장 클럽하우스가 문이 잠겨 있다. 골프장 페어웨이의 잔디가 깎여 있는 것을 보면 여름 장사를 하기 위한 준비는 하고 있는 것 같다. 햇빛은 쨍하지만 바람은 장난 아니다. 이 바람 속에서 골프를 치고 싶은 사람 있을까? 드라이빙 레인지도 있는 것이 신기하다. 그린 위의 잔디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다. 바싹 밀어놓았을 뿐이다.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무언가를 먹을까 했는데 이렇게 썰렁하니 어디로 가지?
푼타 아레나스는 동쪽으로는 마젤란 해협에 면해 있고, 서쪽은 천천히 높아지면서 산지와 연결된다. 그 산 정상 부근에 스키장이 있다. 스키장 리프트를 타고 푼타 아레나스와 마젤란 해협을 내려다보는 사진을 최근에 보았다. 혹시나 하며 스키장으로 차를 몰았다. 다행히 스키장의 카페테리아가 문을 열고 있다. 주문받는 아가씨와 주방 보는 아줌마가 난로가에 앉아 스마트폰을 각자 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기다리는 것도 노동이란 생각이 스친다. 치킨과 피자가 가능하단다. '난 왜 한평생 치킨이 먹고 싶은 적 없을까? 의문이다.'
푼타 아레나스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20여 km 떨어진 공항을 지나 막달라 섬 펭귄투어를 떠났던 선착장을 지난다. 여기까지는 이미 익숙한 길이다. 왕복 2차선 국도가 푸에르토 나탈레스까지 연결된다. 푼타 아레나스 다음 행선지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정하고 버스표까지 이미 사놓은 상태라 곧 버스 타고 갈 길인데 하며 운전하고 있다. 고속도로 수준으로 차들이 달리니 나도 밀려서 달릴 수밖에 없다. 점점 아무것도 없어진다. 큰 풍력 발전기들만이 보인다. 파타고니아에 풍력 발전기가 어울린단 생각이 든다.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가 아닌가? 좌우로 지평선만 보인다. 앞에는 길게 죽 뻗은 도로만 있고. 이 길을 달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파타고니아에 다시 온 것이다.
어디서 차를 돌리나 망설이며, 이러다 푸에르토 나탈레스까지 가겠다 하며 계속 가는데, 왼쪽(서쪽)으로 갈림길 사인이 나온다. 이 때다 싶어 갈림길로 빠졌는데 도로 상태가 더 좋다. 고속도로 같던 길은 콘크리트 포장인데 여기는 아스팔트 포장이다. 이 길이 어디서 끝나나 보자며 가는데 셀룰라 데이터가 연결 안 된다는 메시지가 뜬다. 갈림길로 접어든 이후 차를 한 대도 보지 못했다. 전화도 안되고 통행하는 차도 없는데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싹튼다. 나도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지 모른다. 미리미리 확인하고 준비하고, 심지어 항상 백업까지 생각하며 사는 것을 보면.
'남은 생의 백업은 없는데.'
풍경은 바뀌었다. 왼쪽으로 멀리 바다도 보이고 설산이 나타났다. 안데스의 완전 끝자락이 보이는 것이다. 좌우 양쪽으로 양들이 보인다. 양을 키우는 에스탄시아(Estansia) 목장들이다. 푼타 아레나스가 번성하게 된 것은 양털을 유럽으로 수출하는 항구로 시작되었다고 어디서 읽었다. 그리고 파나마 운하 개통 전에 마젤란 해협을 지나는 배들의 중간 기착지로 발전했다고.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왕래하는 차도 없는데. 결국 San Eduardo란 곳의 에스탄시아 정문 앞에서 차를 돌렸다. 반납할 시간도 다가온다. 주유소를 찾아 휘발유도 가득 채워야 하고.
종일 272km를 달렸다. 평균 연비가 17km/liter 이상이다. 현기차가 제법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