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오늘과 다른 날이다.
배를 타고 대리석 동굴(Marble Cave)을 보고 왔는데 오한이 난다. 너무 추웠다. 앨러지 비염으로 콧물이 줄줄 흐른다. 감기 걸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감기약을 한국에서 들고 오기는 했다. 감기는 항상 목으로 시작하는데 아직 목이 아프지는 않다. 너무 추워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패트리샤가 묻는다. 내일 아침 7시에 카약킹이 있는데 갈 마음 있냐고? 망설였다. 이미 보트 타고 한 바퀴 돌았는데 카약을 타고 다시 간다고? 그럴 가치가 있을까? '경험을 사는데 주저하지 마라'는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내일은 오늘과 다른 날이다.
어제와 같이 주유소 매점에서 시나몬롤과 커피를 마시고, 단단히 옷을 입고(갖고 있는 옷 거의 다 입은 듯) 주차장에 나왔다. 산티아고에서 온 젊은 커플과 나 그리고 가이드 Brian. 20년은 된 쌍용 렉스턴을 타고 비포장길을 달린다. 카약이 즐비한 포구에 도착했다. 브라이언에게 내 복장을 확인시켰다. 다 벗으란다. 카약킹을 하면 땀나니까. 내 몸과 카약 사이를 덮는 장구를 가져와 시범을 보이며 입으란다. 난생처음이다. 그리고 카약킹에 대해 설명을 한다. 눈치로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2인용 카약에 산티아고 커플이 타고, 나와 브라이언이 같이 탄다. 다행이다.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이 혼자 카약을 타다가 카약이 뒤집어지면 어떡하지다.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약을 타고 동굴로 가는 것이 보인다. 오늘 아침은 호수면이 아주 잔잔하다. 2인용 카약의 앞에 자리를 잡으니 뒤에서 브라이언이 얼마나 열심히 노를 젓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도 열심히 노를 저었다. 500미터쯤 떨어진 대리석 동굴까지... 물빛이 옥색이다. 영어로는 'turquiose'라고 한다. 청색과 녹색이 섞인 청록색이다. 빙하 호수의 색깔은 청색과 녹색의 중간 어디인가에 있다. 물에 함유된 성분에 따라. 드디어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한다. 대리석을 가까이 보면 집의 테이블이 떠오른다. 이 큰 바위 하나면 식탁이 수백 개는 나올 것 같은데...
날씨가 더 좋았고, 더 수면 가까이, 더 동굴 깊숙이, 어제와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카약킹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비염이 심해서 앨러지 약을 먹었다. 방랑을 시작하고 처음 약을 먹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몸이 훨씬 좋아졌다. 날씨는 바람 불고 오후에는 비 예보도 있다. 왓츠앱에 메시지가 왔다. 오후 4시에 'horse riding'이 있는데 조인할 마음 있냐고? '비예보가 있는데 말을 탄다고? 아침에 카약킹할 때보다 바람도 더 부는 것 같은데.' 망설였다. 대리석 동굴을 배 타고 보고, 카약 타고 보고 실컷 봤는데, 말 타고는 호수를 내려다보겠지. 피곤해서 침대 밖으로 나가기 싫은데. 어쩌지? '경험을 사는데 주저하지 마라'는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푸에르토 트란퀼로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오직 대리석 동굴 관광을 위한 베이스캠프일 뿐이다. 도착한 첫날 마을을 둘러보다가 어느 여행사 앞에서 말 타는 모습을 근사하게 찍은 큰 광고를 보았다. 날씨가 안 좋아 카약킹을 못한다면 말타기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주고 왔다. 내가 조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 있으면 연락 달라고.
시간 맞춰 여행사에 도착하니 나이 지긋한 여인이 나보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프랑스에서 왔단다. 영어 발음이 알아듣기 힘들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부녀지간으로 보이는 남녀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차를 타고 북쪽으로 10여 키로를 달려 목장으로 갔다. 말이 12마리 있단다. 우아한 색깔의 '자카리야'란 말을 배정받았다. 말은 올라타고 내리는 것이 힘들다. 더 나이 들면 남의 도움을 받거나, 타고 내릴 때 발판을 사용해야 한다. 아직은 땅을 차고 한 번에 오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목장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가이드가 나름 확인하는 것 같다. 제대로 탈 수들 있는지를... 자카리야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 하기는 제일 무거울 테니. 자카리야 입장에서는 오늘 재수 없는 거다. 틈만 나면 바닥에 풀을 뜯으려 하고 재갈을 내가 쥐고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자꾸 옆으로 돌린다. 이제 차도를 건너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낭떠러지에 난 길을 따라 점점 위로 올라간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자카리야에 올라타 아찔한 경사길을 가려니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살아 있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고 앉아있는 것이 쉽지 않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건강수명을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유산소 운동과 근육 운동뿐 아니라 균형을 잡는 밸런스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결국은 균형을 잡지 못하여 넘어지는 순간, 크게 다치면 바로 건강 수명이 끝난다. 균형은 귓속에 있는 평형기관이 주로 담당하지만, 시각과 소뇌의 운동 조절과 균형 유지 기능도 중요하다. 소뇌가 위축되어 운동 능력이 떨어지고, 시각과 청각이 떨어지듯이 귓속의 평형기관도 감도(sensitivity)가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대세의 흐름을 어찌 막을 수 있겠나 싶다.
높은 언덕에 올라 호수를 내려다보며 가이드가 사진을 찍어준다. 청록빛의 헤네랄 카레라 호수와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들을 배경으로 근사한 사진이 만들어진다. 프랑스 여인이 말 타고 있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꼿꼿한 허리와 지긋이 멀리 바라보는 눈빛, 고개를 들고 가만히 있는 말이 만들어내는 목덜미의 곡선이 우아하다. 이 순간 왜 나폴레옹이 생각나는 것일까? 나폴레옹의 말은 앞 발을 들고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여인은 가이드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시범을 보이는 조교처럼 말을 달려 한 바퀴를 돈다. 승마 경험이 많구나 했다. 말 달릴 줄도 아니...
자카리야가 나를 태우고 오르긴 했지만, 말이 말을 잘 안 듣는다. 가이드가 자기와 말을 바꿔보지 않겠냐고 한다. 가이드가 타고 있던 말은 까만색이다. 가이드와 말을 바꿔 탔다. 그러자 가이드가 하는 말, "이 말이 자카리야보다는 훨씬 빨리 움직여요." 걱정되네. 안 떨어지려면 꼭 잡아야 하네.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이상을 말을 탔다. 온몸이 뻐근하다. 그렇게 힘주고 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