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없이 살기 위해서는 감정을 컨트롤해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갈등들에는 사람의 감정이 깊게 관여하고 있다. 치약 짜는 법이 달라 이혼까지 하게 된 아무개 씨의 싸움에도 '저 놈/년이 내 부탁을 무시하고 또 치약을 저렇게 짜네?'라는 짜증, 무시당한 기분, 분노가 개입했을 것이고, 수십 년간 함께한 가족을 등진 채 하룻밤의 욕정을 이기지 못한 아무개 씨도 자신이 쌓아온 가족과의 추억들이 그날 밤의 쾌락보다 더 값짐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감정은 그만큼 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는 가장 큰 숙적이다. 내 감정을 잘 컨트롤할 수 있는 만큼, 더욱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수월하다.
그 누구보다 이성적 판단이 가장 필요한 '법인'을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법인은 실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된(법적으로 인정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법인의 가장 큰 목적은 보통 이익을 내는 것인데, 이를 위해 수십, 수백 번의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이런 의사결정 과정에서 누군가 자신의 감정이 들어간 의견을 낸다면 이는 법인의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저지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감정 그 자체는 이익을 내기 위한 의사결정에서 충분한 근거로 받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안에서도 구성원 각자가 느끼는 감정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감정이라는 모호한 근거만으로는 법인이라는 하나의 인격체를 움직이기 위한 충분한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없다. 애플이 환경을 위한 여러 가지 캠페인을 하는 것도 애플이 지구를 지키고 싶고 더 이상 파괴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라 친환경 이미지가 소비자들이 제품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덕분에 애플에게 더 큰 수익을 안겨줄 것이라는 구체적인 지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정을 완벽히 컨트롤하는 사람이 비로소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감정을 모두 컨트롤하고 이성적 판단만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효율적인 로봇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이 되기는 힘들다. 감정이야말로 인류가 한계를 돌파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것은 시민들의 분노였고, 미국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쓰면서 닐 암스트롱을 달에 보낸 것도 러시아를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이었다. 만약 감정 없이 모두가 이성적 판단만을 내렸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까지 3.1 운동에 참여한 애국투사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정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이기도하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부모의 사랑이 우리를 키운 것이고, 힘들 때나 슬플 때나 나를 좋아해 준 친구가 옆에 있기에 우리는 외롭지 않았다. 길을 가다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이 때로는 우릴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감정은 이처럼 이성적인 판단만으로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가능하게 해 준다. 만약 누군가 세상을 전부 이성과 논리로만 이해하려 한다면, 세상의 반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감정이 사람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함께 가는 협력자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의사결정에서 감정을 지워내고 이성적 판단만으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과 내 감정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이성적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항상 감정에 솔직해야만 한다. 내가 감정을 제대로 직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의사결정의 협상 테이블에 내 감정을 올려놓을 수 있다. 만약 내가 배우자의 치약 습관 때문에 짜증이 나고 무시받는 감정이 든다면, 우선 그 감정의 주인은 상대방이 아닌 바로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그다음에 내가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정말 사소한 치약 하나 때문인지, 이런 사소한 문제들이 지속된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이런 감정을 버틸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시 멈추고 내 감정을 되돌아볼 때, 내가 화가 났다는 감정에 솔직해질 때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얼핏 보면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감정을 지워버리거나 다른 감정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화를 삭이는 것, 질투를 무관심으로 덮는 것, 외로움을 바쁨으로 채우는 것 모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감정을 지움으로써 해결하려는 모습이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역효과가 날 확률이 높다. 결국 그 감정은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은 내 감정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함이고, 그래야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억지로 이겨내려 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감정 컨트롤은, 내 감정을 지워버리는 삭제 버튼이 아니라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시 멈추고 내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잠시 멈춤 버튼이다. 이 잠시 멈춤 버튼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망치는 감정의 노예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동반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