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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현대 문학/2016)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소설가’라는 부류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제목에서부터 나의 궁금증을 단숨에 해결해줄 것만 같았다.

 

책읽기는 즐겨하면서도 소설을 읽는 것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이지만 요즘 들어서 부쩍 소설에 관심이 갔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서툴러서, 잘 모르니깐 그것에는 막연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해결되지 않는 어떤 갈증이 있었는데 그걸 해결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책은 손에 잡아든 순간부터 단숨에 읽어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가정신을 읽는 것은 은근히 재미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답게 자신의 직업을 소신껏 영위해 온 사람이었다.

 

그가 책에서 말하려고 한 것은 단순한 ‘직업적 소설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작가로서 가져야 하는 올바른 신념과 소설가가 추구해야 할 참된 정신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연마해서 다져진 자신만의 작가정신을 표현하며, 진정한 프로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책에서 그가 말한 내용 중에 꼭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든 부분을 나의 독서 공책에 그대로 필사해보았다. 그 과정을 거치는 것만으로도 하루키의 생각을 다시금 확인하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내가 나의 독서 공책에 필사해본 내용을 쭉 적어본다. 많은 내용은 아니지만 그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통해 말하려고 한 핵심을 파악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무엇이 오리지널이고 무엇이 오리지널이 아닌가, 그 판단은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 = 독자와 ‘합당한 만큼 경과한 시간’의 공동 작업에 일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작품이 적어도 연대기적인 ‘실제 사례’로 남겨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즉 납득할 만한 작품을 하나라도 더 많이 쌓아 올려 의미 있는 몸집을 만들고 자기 나름의 ‘작품 계열’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입니다.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리지낼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 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소설가에게는 스토리에 필요한 소재를 꼼꼼히 수집하고 축적하는 작업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마 어떤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은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만일 당신이 세상 사람들과 어느 정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작가라면(아마도 대부분은 그렇겠지요) 당신의 작품을 읽어주는 ‘정점定點’을 하나든 둘이든 주위에 확보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정점이 정직하고 솔직하게 독후감을 말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얘기겠지요, 설령 비판을 받을 때마다 불끈 화가 나더라도.
시간은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매우 소중한 요소입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사전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 안에서 나와야 할 소설의 싹을 틔우고 통통하게 키워가는 ‘침묵의 시간’입니다. 
나의 어떤 작품도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일 잘 못 쓴 것이 있다면 그 작품을 쓴 시점에는 내가 아직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다. - 단지 그것뿐입니다. 유감스럽기는 해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부족한 역량은 나중에 노력해서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잃은 기회를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지속력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단 한 가지, 아주 심플합니다. - 기초체력이 몸에 배도록 할 것. 다부지고 끈질긴, 피지컬한 힘을 획득할 것. 자신의 몸을 한편으로 만들 것.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 – 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이 이론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예술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말을 바꾸면, 독자와 나 사이에 굵고 곧은 파이프를 연결하고 그것을 통해 직접 주고받는 시스템을 시간을 들여 구축해왔다는 얘기입니다. 매스미디어나 문학계와 같은 ‘중개업자’를(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거기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저자와 독자 사이의 내추럴한 자연 발생적인 ‘신뢰감’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무라카미가 내는 책이라면 일단 사서 읽어보자. 손해는 안 볼 것이다.’라고 생각해주실 만한 신뢰 관계없이는 아무리 굵은 직통 파이프를 연결한다고 해도 그런 시스템은 오래 굴러가지 못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가의 역할은 단 한 가지, 조금이라도 뛰어난 텍스트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텍스트라는 것은 하나의 ‘총체’, 영어로 말하면 whole입니다. 말하자면 ‘블랙박스’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덩어리의 텍스트로서 기능합니다. 독자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풀어서 저작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만일 독자의 손에 건너가기 전에 저자에 의해 풀리고 저작된다면 텍스트로서의 의미나 유효성이 대폭적으로 손상됩니다. 그래서 아마 나는 카를 융을, 가와이 선생님의 저서를 의식적으로 멀리해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감각적으로 ‘너무 가깝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멀리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소설가에게는 자신이 자신을 분석하기 시작하는 것만큼 부적절한 일도 없으니까요. 




도서정보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윤옥 옮김/현대 문학/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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