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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프로세스의 힘

프로세스가 문화를 만든다

by 남서진

"빠르게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요즘 조직에서는 '멀리'와 '빠르게'를 동시에 하라는 의미로 바꾸어 해석해야된다고 요구받는다. 기술은 초고속으로 발전하고, 고객의 기대치는 날마다 갱신된다. 그 속에서 신사업 부서들은 생겨나고,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업무언어 속에서 협업이라는 과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런 지점에서 ‘실리콘밸리 프로세스의 힘’(신재은, 2025)이 던지는 메시지가 빛난다.

이 책이 강조하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이유는 뛰어난 천재 개인이 아니라,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프로세스를 만들어내고 실행하는 조직력에 있다. 조직개발 컨설턴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성과를 만드는 시스템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혁신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프로세스에서 온다

많은 조직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그 아이디어가 실행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아이디어는 공기처럼 흩어지고, 남는 것은 허무한 회의록뿐이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택한 방식은 다르다. 그들은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곧바로 '퓨처백 아이데이션(Future-back ideation)' 프레임워크라는 프로세스에 태운다. 미래의 이상적인 고객 경험을 먼저 상상하고, 거기서부터 현재의 액션을 역산해서 설계하는 방식이다. 이어서 'PR/FAQ' 같은 구체적인 툴을 활용한다. 마치 제품이 이미 출시된 것처럼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고객이 실제로 묻고 답할 법한 질문들을 문서로 만들면서 제품과 서비스의 실체를 끌어내는 것이다.

국내 한 제조 대기업의 신사업팀 사례가 떠오른다. 이 팀은 사내 공모전에서 매번 좋은 아이디어를 냈지만, 실행 단계로 넘어가면 번번이 좌초됐다. 그러던 중 팀장이 프로세스 설계를 바꾸었다. 아이디어를 모은 후 곧바로 고객 FAQ를 작성하게 하고, 이를 근거로 다음 의사결정을 했다. 아이디어가 '좋아 보인다'는 감각 대신, 고객의 언어로 설명 가능한가를 기준으로 삼자 실행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혁신은 결국 프로세스를 만나야만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실행력을 만드는 건 속도가 아니라 일관성이다

조직개발 현장에서 자주 듣는 푸념 중 하나는 "회의는 많은데 일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프로세스가 일관되지 못하거나, 의사결정 구조가 모호해서 생기는 실행력의 부재다.

‘실리콘밸리 프로세스의 힘’은 실행력을 '빠름'이 아니라 '일관성'에서 찾는다. 아마존의 사례처럼,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마다 동일한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 작은 팀 단위로 목표를 세우고, 실행 과정을 공유하며, 일정한 리듬으로 검증한다. 이렇게 되면 팀 간 속도 차이, 우선순위의 혼선, 책임 소재의 불분명함이 줄어든다.

내가 자문했던 한 IT기업 신사업 부서는, 사내 다른 부서와의 협업이 많아지면서 일정 충돌과 자원 부족 문제가 반복됐다. 이들은 '공동 실행 캘린더'라는 프로세스를 만들어 그간 시도해보지 못한 간접 소통의 방식을 적용했다. 모든 신사업 프로젝트의 업무를 뜯어보며 세분하고, 단계별 마일스톤을 공유하고, 자원 배분을 그에 맞춰 조정해나가기 시작했다. 서로 이해하기 위한 소통의 시간 동안 갈등의 성장통을 겪었지만 빠르게 줄어드는 협업 스트레스가 보였고, 구성원들의 몰입도는 높아졌다. 실행력은 개인의 열정에서만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프로세스에서 비롯될 수 있다.


문화는 선언 자체가 아니라 프로세스에 녹아든다

많은 기업이 '우리의 핵심가치'를 외친다. 그러나 회의실 벽에 걸린 문구와 실제 일하는 방식이 괴리되어 있다면, 구성원은 냉소할 수 밖에 없다. 문화는 말로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가 전달해주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조직들은 문화를 프로세스 속에 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젠 너무 유명해진 아마존은 회의 방식, 여기서는 회의를 시작할 때 모든 참석자가 '내부 보도자료 초안'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왜 회의하는가의 출발점을 명확하고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는 루틴이기도 하다. 이 보도자료에는 고객 관점에서 본 서비스 가치가 담겨 있다. 즉, 고객 중심이라는 문화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모든 회의 프로세스에 내재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고객에게 문제를 일으킨 그 대상화된 문제의 단순 개선이 아닌, 그 문제 자체의 근원적 발생을 소거하는 고민, 그들이 핵심가치로 여기는 ‘고객중심’, 바로 그 고민에서 시작하도록 만드는 질문이 이 루틴 저변에 깔려있다.

내가 만난 한 스타트업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이들은 '실패를 공유하는 회의'를 정례화했다. 팀원 누구나 지난주 시도했던 작은 실패를 발표하고, 나머지 팀원은 그 시도로부터 배운 점을 짚어준다. "실패해도 괜찮다"라는 문화가 말이 아니라, 반복되는 프로세스로 자리 잡자 팀 분위기가 한층 자유로워졌다. 그 결과 더 과감한 실험이 가능해졌고, 실제로 새로운 서비스 출시 속도도 빨라졌다. 단기 성과가 아니라 ‘가짜 성과’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변화를 얻었다는 후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변화와 불확실성 시대, 프로세스는 안전망이자 가속기다

VUCA 시대라는 말이 진부해졌을 만큼, 불확실성은 일상이 되었다. 시장은 변덕스럽고, 기술은 예측 불가한 속도로 진화한다. 이런 환경에서 리더들이 가장 자주 묻는 질문은 "이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 팀을 어떻게 안전하게, 또 빠르게 움직이게 할 것인가?"이다.

여기서 프로세스는 일종의 안전망이 된다. 예측이 불가능할 때, 최소한의 일관성과 신뢰를 제공하는 장치가 된다. 동시에 그것은 가속기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더욱 '작게, 빨리, 자주' 실행해야 하는데, 프로세스는 그 리듬을 조직에 심어준다.

조직개발 컨설턴트의 입장에서 보면, 프로세스를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문화와 전략을 연결하는 다리'로 설계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세스는 또 다른 관료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비저너리와 오퍼레이터의 균형

책에서 특별히 주목할 점은 '비저너리(Visionary)'와 '오퍼레이터(Operator)'의 균형에 대한 통찰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혁신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비저너리였다면, 팀 쿡은 그 비전을 실행 가능한 현실로 만드는 오퍼레이터였다. 두 역할이 모두 있어야 조직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저자가 들려주는 영국에서 창업한 핀테크 스타트업 스프레딧(Spreddit)의 실패 사례도 이를 뒷받침한다. 뛰어난 비전을 가진 멤버들이 모였고 초기 투자도 성공적으로 유치했지만, 내부에 오퍼레이터가 부족해 결국 실패로 귀결됐다. 화려한 아이디어와 비전만으로는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어렵고, 이를 실제로 실행하고 정착시키는 운영 시스템이 필수라는 교훈을 얻었다. 핵심은 균형이다. 눈에 띄는 것은 실제로 요구되는 것과 달리 불균형적으로 보고되기 때문에 많은 기사와 미디어의 마케팅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여서는 편향되기 쉽다.


프로세스를 다시 묻자

우리는 종종 "좋은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인재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디어가 실행되고, 인재가 몰입하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프로세스가 있어야 한다.

‘실리콘밸리 프로세스의 힘’은 결과보다 과정을 보라고 채근한다. 혁신 제품을 내놓는 것도, 실행력을 높이는 것도, 강한 문화를 만드는 것도 결국 프로세스의 힘이다. 신사업 부서가 늘어나고 팀 간 협업이 필수가 된 최근 경영환경에서, 이것이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조직 생존의 조건으로서도 챙겨봄직한듯하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도 지속적으로 혁신을 만들어내는 비밀? 아마도 프로세스가 제약이 아니라 자유를 준다는 것, 그것이 현실이 되는 비결은 더 과감하게 프로세스를 수용하고, 더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합의하고, 일관된 방향 속에서 계속 실험하게 하는 일하는 모습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조직의 프로세스는 혁신을 가능케 하는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가?"

“우리는 프로세스를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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