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량문명과 부족 리더십이 말해주는 미래상
1. 가벼워진 문명, 무거워진 질문
시대의 변화를 발빠르게 읽는 사람들은 서둘러 미래를 경고하거나 바뀌어야할 행동이나 자세를 추천하곤한다.『경량문명』에서 송길영은 오늘의 변화를 이렇게 짚는다. 기술은 더 가벼워지고, 인간은 더 많은 일을 위임한다. 검색, 계산, 번역, 심지어 글쓰기까지 AI가 맡아주니, 예전처럼 무겁게 배우고 익히던 지식의 필요성은 줄어든다.
겉으론 편리하지만, 사실 더 무거운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왜 여전히 함께 모여서 일해야 하는가?"
AI는 답을 제시하지만, 질문을 던지고 맥락을 부여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그래서 조직은 더욱 "왜"라는 질문을 붙잡아야 한다. 조직의 미래가 문화에 달려있음을 강조하며Dave Logan, John King, Halee Fischer-Wright가 쓴 ‘부족 리더십(Tribal Leadership)’은 AI 시대에도 유효한 통찰을 건넨다.
2. 부족 리더십의 언어로 본 AI 시대
Logan과 그의 동료들은 10년간 24,000명을 연구한 끝에 하나의 진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20명에서 150명 사이의 작은 집단, 즉 부족 단위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1단계: "인생은 엉망이다"(Life sucks)
희망이 사라진 상태. 범죄조직이나 파괴적 집단에서 흔히 보인다.
2단계: "내 인생은 엉망이다"(My life sucks)
냉소와 무력감이 지배한다. 규칙만 지키며 억눌린 조직에서 발견된다. 연구에 따르면 전체 조직의 약 25%가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3단계: "나는 잘났다, 너는 아니다"(I'm great, you're not)
개인 성취 중심. 전문가 조직, 성과주의적 직장에서 흔하다. 전체 조직의 약 49%가 이 단계에 있다.
4단계: "우리는 잘났다"(We're great)
공동의 목표와 가치로 연결된 단계. 협업과 성과가 크게 향상된다. 약 22%의 조직만이 이 단계에 도달한다.
5단계: "삶은 위대하다"(Life is great)
드문 단계지만(약 2%), 사회 전체에 기여하고 혁신을 선도한다. 경쟁자가 아닌 불가능에 도전한다.
AI가 본격적으로 일터에 들어오면, 3단계 문화가 가장 먼저 흔들린다. 개인이 자랑하던 기술이나 전문성은 AI 앞에서 순식간에 평준화된다. 코딩, 데이터 분석, 보고서 작성 — AI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해버리니, "나는 잘났다"는 선언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후 살아남는 조직은 자연스럽게 4단계와 5단계로 이동한다. AI가 성과를 만들면, 인간은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3. 현장에서 목격한 전환의 순간들
사례 1: Microsoft의 Copilot Champs Community
Microsoft는 2024년 AI 도구인 Copilot을 전 직원에게 도입하면서 흥미로운 변화 관리 전략을 구사했다. 그들은 탑다운 방식 대신 "Copilot Champs Community"라는 자발적 부족을 만들었다.
역할별로 AI 활용 선도자들이 동료들을 코칭하는 구조다. 데이터센터 직원들에게는 그들의 일상에 맞춘 프롬프트를, 영업팀에게는 CRM 시스템과 연계된 활용법을 peer-to-peer로 전파했다. 결과는 사용자의 77%가 "Copilot 없이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고, 영업팀은 주당 90분을 절약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면 3단계에서 4단계로의 전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AI라는 도구가 개인의 역량을 평준화하자, 조직은 "우리가 함께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로 초점을 이동시켰다. 부족 단위의 학습 문화가 성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례 2: Satya Nadella의 문화 혁명
Satya Nadella가 Microsoft CEO로 취임했을 때, 그는 즉각적인 전략 변화보다 부족 문화 이해에 먼저 집중했다. 수개월간 조직 곳곳을 돌며 사람들의 언어를 경청했다. 그가 발견한 건 3단계에 갇힌 조직이었다. 부서 간 지식 은폐, 성과 경쟁, "내가 아는 게 힘"이라는 문화였다.
Nadella는 이를 "growth mindset(성장 마인드셋)" 문화로 전환했다. 핵심은 "learn-it-all이 know-it-all을 이긴다"는 메시지였다. 개인의 똑똑함보다 집단의 배움을, 경쟁보다 협업을 강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Microsoft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 중 하나로 변모했다.
이는 부족 리더십에서 말하는 리더의 핵심 역할을 보여준다. 리더는 부족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진단하고,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레버리지 포인트를 찾아 개입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4. 새로운 리더의 역할: '가벼움을 버티는 무게'
조직개발의 언어로 보자면, AI 시대의 리더는 더 이상 지시·통제형 관리자가 아니다. 대신 해석자, 의미의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은 맥락과 스토리, 인간 사이의 신뢰다. 리더가 맡아야 하는 것은 "왜 이 일이 우리 부족에 중요한가"를 풀어내는 일이다. 즉, 리더는 무거운 데이터를 요약해 주는 AI 대신, 가벼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 무게 있는 질문을 지켜내는 사람이다.
리더를 위한 실천 TIP
① 부족의 단계 진단하기
당신 조직의 언어를 들어보라. 회의실에서, 복도에서, 팀 채팅에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은 무엇인가?
"어차피 안 될 거야" → 2단계
"내가 해결했어" → 3단계
"우리가 해냈어" → 4단계
"이건 세상을 바꿀 거야" → 5단계
언어는 문화의 가장 정직한 진단 도구다.
② 3→4단계 전환의 레버리지: Triad(3자 관계) 만들기
3단계 조직은 1대1 관계로 이뤄져 있다. 정보는 은폐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네트워크를 권력으로 사용한다.
4단계로 가려면 Triad(세 사람의 가치 기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A와 B를 당신이 연결하는 게 아니라
A와 B가 서로 연결되도록 촉진하고
세 사람이 공동의 가치를 중심으로 협력하게 만들라
이렇게 하면 정보가 흐르고, 협업이 자연스러워진다. 리더는 "허브"가 아니라 "촉매"가 되는 것이다.
③ "우리"의 범위를 확장하라
4단계에서 "우리"는 우리 팀이다. 5단계에서 "우리"는 산업, 사회, 인류까지 확장된다.
AI 시대에는 조직의 경계가 더욱 희미해진다. 글로벌 프로젝트, 크로스펑셔널팀, 외부 파트너와의 협업이 일상이 된다. 리더는 "우리 vs 그들"의 프레임을 넘어, "우리가 함께 만들 미래"로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
5. 부족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AI 협업은 부족의 정의를 바꾼다. 과거에는 같은 부서, 같은 공간, 같은 직급이 부족을 나눴다. 그러나 이제는 가치와 목적이 부족을 만든다. 글로벌 프로젝트에서는 국경을 넘어 하나의 부족이 형성된다. 스타트업은 빠르게 전문가 네트워크를 엮어 '임시 부족'을 만든다. 심지어 AI도 부족의 일원처럼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때 리더의 역할은 달라진다. 경계를 긋는 사람이 아니라 경계를 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단계의 "나는"을 4단계의 "우리"로 끌어올리고, 때로는 5단계의 "삶은 위대하다"로 연결해야 한다.
6. 미래의 일터, 그리고 리더십의 풍경
섣부른 확정은 할 수 없지만 지금의 변화흐름대로라면 앞으로의 일터는 이렇게 재편될 것이라고 한다.
성과보다 의미 : 성과는 AI가 만든다. 인간은 의미를 만든다.
개인보다 부족 : AI가 개인 역량을 평준화하면, 부족의 문화가 차이를 만든다.
속도보다 맥락 : AI가 속도를 높일수록, 리더는 맥락을 붙잡아야 한다.
따라서 미래 리더십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무게중심이 바뀐다. 과거에는 전략과 성과를 통제했다면, 이제는 문화적 성숙과 집단적 의미를 관리해야 한다.
7. 맺음말
오랜 시간 조직 현장을 다니며 배운 것이 있다면 변화는 시스템을 바꾼다고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나와 Logan과 그의 동료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언어가 바뀌고, 관계가 바뀌고, 스토리가 바뀔 때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진단 없는 처방은 어렵다. 쉬운 진단이 있다면 시도해봄직 하지 않을까. 부족의 현재 위치를 가늠해본다면, AI라는 도구를 문화 전환의 촉매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AI 도입을 고민하는 중이라면 자체 진단을 내려보며, 어떻게를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다.
"당신 조직의 부족은 지금 몇 단계에 있습니까?"
"AI를 도입하면 어떤 단계로 이동할 것 같습니까?"
"구성원들은 지금 어떤 언어를 쓰고 있습니까?"
경량문명은 인간의 일을 가볍게 만들지만, 부족은 오히려 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함께 하는가? 이 부족은 어떤 의미를 위해 존재하는가?"
AI는 뛰어난 답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답이 왜 중요한지, 누구와 함께 나눌 것인지는 인간만이 결정할 수 있다.
미래의 리더는 해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부족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맥락과 의미를 열어주는 사람이다. 바로 그 순간, 부족은 AI와 함께 '가볍지만 더 단단한'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다.
가장 강력한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방식에 있다. AI 시대에도, 아니 AI 시대이기에 더욱, 부족의 힘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Logan, D., King, J., & Fischer-Wright, H. (2008). Tribal Leadership: Leveraging Natural Groups to Build a Thriving Organization. HarperCollins.
송길영 (2024). 『경량문명』.
Microsoft Digital (2024-2025). Microsoft 365 Copilot 도입 사례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