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아빠 전상서
기러기 아빠 생활을 6년 정도 했다.
6년이라는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기쁨보다 고통이 많을 수밖에 없는 기러기 아빠 생활은 정말로 추천하지 않지만,
우리 처남을 포함하여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분들,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을 선후배 기러기 아빠들 또는 예비 기러기 아빠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남긴다.
기러기 아빠가 되고 처음 1년 정도는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기간만 다를 뿐 아마 대부분의 기러기 아빠들이 그럴 것이다.
물론 100% 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타트업씬에 있으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로 시너지 효과가 더해졌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러기 아빠도 전생에 지은 죄를 벌 받는 거 같고, 스타트업 대표도 전생에 지은 죄를 벌 받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은 것일까. ㅎㅎ
불면증에 시달려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하루 종일 피곤하고 일상생활이 힘들어지며 점점 병든 닭이 되어간다.
그래서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비용과 시간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주로 혼자 마셨고 많이 마시면 다음날 업무에 지장이 있어 소주를 반 병씩 마셨다.
초반에는 잠이 잘 왔다. 문제는 새벽 3시쯤 깨서 다시 잠들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코올 의존도가 점점 높아졌다. 악순환이었다.
3년 차 정도에는 우울감이 너무 심해져 매사에 부정적이고 의욕도 없고 침대 밖을 나가기 싫은 적도 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지는 않았지만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살짝 섞어 놓은 느낌이었다.
빨리 70세가 넘어 모든 책임과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벌려놓은 사업은 많고 돈은 벌어야 하기에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매일 출퇴근을 하는데 정말 고역이었다.
정신과 상담까지 고려해 봤으나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일단 패스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러닝과 헬스를 시작하면서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인생만사 모든 게 내 맘대로 안되는데 러닝과 헬스는 내가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500미터도 못 뛰던 나는 5킬로 이상을 뛰게 되었고 20%가 넘어가던 체지방율은 10%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슬픈 영화나 노래는 듣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라도 감성적이 되면 좋을 게 없다.
노래나 영화가 힐링이 되기도 하지만 억지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울음보를 터트리기도 한다.
평상심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감정의 기복을 최소화하고 일정 수준의 텐션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자식들 보고 싶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최악의 질문이다. 제발 상대방 생각 좀 하고 물어주면 좋겠다.
밥은 잘 먹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쓸데없는 질문이다.
음식은 단지 몸뚱이를 움직이기 위한 연료이자 사료일 뿐 맛집을 찾아다닐 여유도 이유도 없다.
단지 러닝과 헬스를 위해 조금 더 좋은 연료를 넣어주려고 노력한다.
하루 한 끼는 가급적 샐러드나 닭가슴살 등으로 클린 하게 먹고 한 끼는 먹고 싶은 것을 먹되 7시 이후에는 가급적 물 외에는 먹지 않는다.
술은 양과 회수를 계속 줄여나갔고 끊은 지는 2년 가까이 되었다.
술 마실 때만 피던 간헐적 담배 역시 완전히 끊었다.
술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술은 인간의 가장 큰 동지이자 적이다.
술이 위로가 될 때도 많지만 술로 인해 건강을 잃고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더 많다.
외롭다고 홀짝홀짝 마시던 술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소위 말하는 알코올 의존도가 높아졌고 안 취하면 잠이 안 오던 시절도 있었다.
당연히 건강은 나빠지고 체력도 떨어지고 업무에도 방해가 된다.
어쩌다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하게 되면 폭음을 하게 되고 헤어지기 싫어 3차, 4차까지 가자고 진상을 부린다. 완전 민폐다.
혼밥, 혼술, 혼숙, 혼자 영화 보기, 혼자 운동하기 모든 것이 편해진다.
오히려 여러 사람과의 식사나 운동 등이 불편하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가급적 혼자 먹게 되고, 운동도 혼자 하는 헬스와 러닝만 한다.
러닝 실력이 늘지 않아 러닝크루에 나가보았으나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번거롭고 1시간 운동하고 3시간 술 마셔서 그만두었다.
사과도 못 깎던 나는 이제 파스타는 물론 마라샹궈도 해서 먹는다. 차마 김치까지는 담그고 싶지 않다.
식사는 대부분 반찬 없이 가볍게 먹는다. 닭가슴살과 현미밥, 닭가슴살과 떡, 닭가슴살과 파스타 이런 식이다.
처음 몇 년은 어머님이 이런저런 반찬과 음식을 해주셨지만 주말만 집에서 식사하기 때문에 대부분 상해서 버리게 되어 언젠가부터 주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크고 작은 일도 많이 다투었던 마누라와는 사랑이 의리와 정신력이 되었다가 다시 사랑이 되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함과 친근함으로 바뀌었지만 자주 못 보게 되면서 다시 애틋해졌다.
자식들 또한 이제는 아빠랑 놀자고 매달리던 아이들이 아니었다.
소년이었던 큰 놈은 이제 면도도 할 만큼 제법 남자 냄새가 나고 애기였던 작은놈은 이제 청소년이 되었다.
아이들이 크고 바빠져 미국에 가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기 전에 몇 년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이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같이 살면서 서로 스트레스를 주는 것보다는 열심히 노력해서 기러기 아빠에서 독수리 아빠가 되어 자주 왕래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다.
정상인의 건강한 마음 상태가 10점이라면 기러기 아빠는 대충 3점~4점 내외가 될 것이다.
10점으로 살다가 3점으로 살게 되면 우울하겠지만, 3점으로 계속 살다 보면 3점이 평상시의 노말한 상태라고 생각되는 시점이 온다.
뭔가 막 고통스럽고, 외로운 것이 아니라 그럭저럭 살만해진다는 뜻이다.
고통이나 외로움에 익숙해지면 감정의 기복이 별로 없어지고 내면이 고요해짐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 그랬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도, 아무리 기쁜 순간도 곧 지나간다고...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정말로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그럭저럭 살아왔고 여전히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지인들은 내가 적응력이 좋아서 잘 버틴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 적응을 해야만 가족을 건사하고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응을 했다는 편이 맞을 듯하다.
현재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계신 모든 분들, 앞으로 하시게될 모든 분들이 나와 같이 술, 담배에 의존하지 않고 우울증을 겪지 않으면서 잘 적응하고 버티시기를 다시한번 간절히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