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성과 가격의 심리학
늦은 점심을 먹으러 평양냉면 맛집으로 향했다. 몇 년 만에 찾은 종로 골목의 자랑이 된 이곳은 이제 딴 세상처럼 느껴졌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라 당연히 바로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충격적이게도 대기 인원이 무려 50팀이었다. 평일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식당 앞에는 1~2시간은 끄떡없다는 듯 삼삼오오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다른 곳에서 먹을까 잠깐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왕 온 거 인내심을 갖고 일행과 옆 카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결국 1시간 30분을 기다린 끝에 서울의 전통 있는 4대 평양냉면집 중 한 곳에서 평양냉면과 불고기를 맛볼 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식사라 그런지, 1인당 1.5인분의 넉넉한 양도 거뜬히 먹어치웠고, 비싼 가격도 전혀 아깝지 않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음식의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평양냉면이라는 음식 자체의 희소성과 기다림이 만든 감정적 가치가 가격 저항을 상쇄했기 때문이다.
이 희소성의 가치를 요즘 브랜드 마케팅에서도 절실히 체감하고 있다. 최근 브랜드 영상 제작을 준비하며 배우, 스타일리스트, 포토그래퍼,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섭외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마치 작은 시장 경제를 실시간으로 체험하는 듯했다.
“이 배우와 배우 전담 스태프의 비용은 왜 이렇게 비쌀까?”
비용 구조를 세심하게 살펴보면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마케터로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됐다. 알고 보면 단순히 실력이 좋아서 높은 비용이 책정되는 건 아니었다. 동일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격 차이는 컸다. 그 차이의 핵심은 오히려 ‘희소성’ 여부다.
예를 들어, 여배우의 경우 비슷한 이미지의 여배우가 없는데 많은 브랜드에서 이 여배우를 브랜드 모델로 기용하기를 원한다면 가격이 한없이 높아진다. 거기다 최근 그 배우가 인기 있는 작품을 막 마쳤거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면 부르는 게 값이고, 오히려 배우가 브랜드를 택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배우가 오랫동안 함께한 스타일리스트의 경우, 단순한 감각과 테크닉 이상의 ‘심리적 안정감’과 ‘커뮤니케이션의 숙련도’가 비용에 포함된다. 이처럼 대체 불가능한 가치는 희소성을 만들고, 그 희소성은 자연스럽게 가격을 결정짓는다.
희소성은 단순히 수량이 적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가 “이건 나에게 꼭 필요해”, “이건 대체할 수 없어”라고 느낄 때, 비로서 진짜 희소성이 탄생한다.
에르메스(Hermès)의 버킨백 전략
에르메스에는 ‘돈이 있어도 쉽게 살 수 없는 가방’으로 버킨백이 있다. 대기 명단, 매장별 극소량 입고, VIP 고객 우선 시스템을 통해 고의적으로 접근성을 낮춘다. ‘살 수 없는 것’이라는 희소성이 오히려 소유 욕구를 극대화한다.
팝마트 라부부 인형의 랜덤 박스 마케팅
팝마트의 라부부(Labubu)는 랜덤 박스 형태로 판매되며, 어떤 디자인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소비자는 ‘운이 좋아야 가질 수 있는’ 특정 인형을 얻기 위해 반복 구매를 하며, 일부는 중고 거래에서 프리미엄까지 형성된다. 이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희소성 기반의 수집 욕구를 자극하는 구조다.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의 한정 경험
일반 매장에서는 볼 수 없는 리저브 전용 음료와 바리스타 테이블, 한정 굿즈 등을 통해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한다. 매장 수 자체가 적기 때문에 방문 자체가 일종의 ‘프리미엄 경험’이 된다.
기억에 남을 만한 '기다림의 가치'
평일 오후에도 50팀이 넘는 대기. 단순히 맛이 아닌 “줄 설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희소성을 만든다. 고객 스스로 '이 시간과 기다림이 의미 있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경험 설계가 필요하다.
높은 기술 허들 – 대체 불가능한 조리법
평양냉면은 기술적인 진입 장벽이 높고, 동일한 맛을 내기 어렵다. 이처럼 제품 자체가 쉽게 복제되지 않는 구조라면, 브랜드는 자동으로 희소성을 갖게 된다.
감정적 보상 – 기다림을 상쇄하는 경험
1시간 30분을 기다린 고객은 단순히 음식을 먹으러 간 것이 아니라, '기다린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주문한다. 브랜드는 이 감정에 대한 만족을 끌어올려야 한다. 이 식당에서는 맛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서비스가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함께 나온 정갈한 밑반찬과 마지막 디저트로 제공된 신선하고 맛있는 수박은 일행들 모두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바이럴과 충성도 높이기 – 팬덤이 되는 고객들
평양냉면을 처음 접한 MZ세대들이 만약 위의 기다림의 가치, 높은 기술 허들, 감정적 보상을 모두 느꼈다면 자발적으로 바이럴을 내주면서 브랜드의 충성도 있는 앰배서더가 된다. 이렇게 선순환이 되면 이 브랜드의 희소성은 더욱 극대화된다.
사람들은 가장 비싼 것이나 가장 저렴한 것을 고르는 게 아니다.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한다. 희소성은 단지 수량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 관계, 기억이 만들어낸 가치의 문제다.
브랜드가 오래 살아남으려면, 기능보다 먼저 사람의 기억에 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결국은 '나다움'이 있어야 한다. 남들이 한다고 해서 무작정 따라가거나, 단순히 요즘 트렌드만 좇는 브랜드는 진정한 희소성을 만들 수 없다.
트렌드를 읽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우리다움'이 고객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오직 나를 위한'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때, 비로소 진정한 희소성을 갖게 되고 경쟁 없는 시장에 도달할 수 있다.
희소성(Scarcity)
단순히 수량이 적은 것이 아니라, 대체가 어렵고 감정적으로 연결될수록 프리미엄 가치가 형성된다.
지정 경험(Designated Experience)
고객이 ‘자신이 먼저 선택했다’고 느끼는 경험은 브랜드 충성도로 이어진다.
감정적 대체불가성(Emotional Irreplaceability)
기능보다 감정, 상품보다 관계. 기억에 남는 브랜드는 흔치 않기 때문에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남는 것이다.
감성 희소성 설계(Sentimental Scarcity)
실물로 희소성을 만들 수 없다면, 감성·관계·기억을 통해 유일함을 설계한다.
가격 프레이밍(Price Framing)
가격을 낮추는 대신, “왜 이 가격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스토리를 설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