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8186-003*
운동을 시작하려고 몸을 풀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010-8186-003*? 모르는 번호이지만 010으로 시작하길래 스팸 전화는 아닐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ㅇㅇㅇ씨죠?"
젊은 남자 목소리인데 좀 다급하면서 불친절하다.
"네. 어디 신가요?"
"신한카드 배송기사인데요. 오늘 집에 계신가요?"
무례하게 느껴져 살짝 기분이 나빠진다.
"오후 늦게 있을 건데 무슨 일이신가요?"
"신한카드가 발급돼서 배송하려고요."
"신한카드요? 발급 신청한 적 없는데..?"
"ㅇㅇ년 ㅇ월 ㅇㅇ일, ㅇㅇㅇ씨 아니세요?"
뭐지? 신한카드라면 전에 발급받은 적은 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유효기간이 지났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재발급을 한다고? 전화번호, 이름, 생년월일이 다 맞기는 하는데 뭔가 찜찜하다.
"카드 발급 신청한 적이 없어서요. 제가 신한카드에 먼저 확인해 볼게요."
"집 주소가 성동구 ㅇㅇ동 ㅇㅇ번지 아니세요?"
화가 잔뜩 난 듯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건 우리 집 주소가 아니다.'라는 대답을 삼켰다.
"일단 제가 확인해 볼 테니"
"××! 아침부터 확인은 무슨. 바빠 죽겠는데 ×××"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느닷없이 쌍욕을 한다.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고 놈이 먼저 전화를 뚝 끊었다.
상황을 정리해 보면, 어떤 경로인지 놈은 나의 개인 정보를 탈취했고 그걸 기반으로 나를 낚으려 시도한 것이다. 단순히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일단은 가족들에게 개인 정보 유출 사실을 알려 이와 연관된 범죄 시도를 방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일인가. 이번에는 카**톡 채팅방이 먹통이다. 다른 기능은 되는데 딱 그것만 화면이 새까맣다. 느낌이 좋지 않다. 혹시 그새 이놈이 내 핸드폰에다 무슨 짓을 해놓은 건가? 호흡이 빨라지고 휴대폰을 든 손에 힘이 빠졌다. 뭐지? 인제 어쩌지? 가족들한테 전화를 돌려야 하나? 카**톡 고객센터에 문의해봐야 하나? 아니면 신한카드부터? 의문이 꼬리를 잇는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계 작동이 잘 안 될 때 전원을 껐다가 켜보는 것처럼 한 템포 숨을 고르며 상황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딱 5분만! 힙 어덕션에 앉기는 했지만, 운동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에 있는 헬스장에서 아침 시간을 보낸다. 국가공인 백수가 된 이후 만들어진 나의 루틴이다. 약간의 근력 운동을 하고 트레드밀에서 한 시간 정도 땀을 흘리면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평일에 오지 못한 직장인들을 위해 주말에는 나가지 않는다. 좁은 공간에 굳이 나까지 끼지 않으려는 작은 배려이다. 출퇴근 시간에는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대신 집 근처에 있는 북한산 둘레길을 걷는다. 숲은 계절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지만, 그 내면에는 언제나 변치 않는 고요가 있어 좋다. 내가 보내는 이런 시간은 '혼자'라는 측면에서 더 의미가 있다. 요새 친구나 가족보다 혼자 노는 법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친구들 모임에 전처럼 자주 나가지 않는다. 매번 똑같은 정치 이야기, 잘 나갔던 시절 추억담, 은연중에 늘어놓는 허풍을 듣고 돌아오면 괜히 나갔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시간도 아깝지만, 더 문제는 즐겁지가 않다. 퇴직 후의 삶에는 '즐거움'이라는 요소가 가장 핵심이다. 더욱이 같은 백수들끼리 뭐가 그리 바쁜지 약속을 정하기조차 어렵다. 각자의 성격이 점점 선명해져 극단적이 돼 가거나, 노욕(老慾)을 부려 판을 흔드는 태도를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들은 이미 따로 나가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있다. 아내는 아직 현직이지만 머지않아 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출근하기도 힘들 텐데 친정의 노모와 건강이 좋지 않은 오빠를 보살펴야 하고 부모가 살던 구옥의 임대 관리, 유지 보수 등으로 주말에도 눈코 뜰 새 없다. 해서 지금은 얼굴 볼 시간이 드물지만, 아내가 퇴직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많은 시간을 같이 붙어있다 보면 없던 간섭이 생기고 본의 아니게 부딪치는 일이 잦아질 것이다.
대기업 부사장으로 일하다가 퇴직한 선배가 있다. 한 번은 이 선배에게 '형수님은 잘 지내시죠?'라고 안부를 물었다. 선배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외교적인 관계는 유지한다'라고 대답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서로의 일정을 파악한다고 한다. 가급적 같은 공간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나? 역시 혼자 노는 법이 필요하다.
당연히 사이가 좋지 않거나 트러블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맞춰가며 살았다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독립된 생활을 보장해 준다는 차원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면 심각할 경우 황혼 이혼 같은 결론을 내리는 부부도 있다. 반대로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 어떤 지인은 여전히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놓는다며 '엄청난 부부애(?)'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살아보니 세상일은 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계획을 세우고 신은 그런 인간을 비웃는다 하지 않는가. 따라서 어떤 일이든 일희일비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루어지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지금 눈앞에 생긴 일을 좋은 일이라고 또는 나쁜 일이라고 누가 감히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점점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한테 상처받는 일이 싫다. 누구를 미워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런데 만약 사람한테 의지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그놈의 기대가 실망을 낳고 결국 문제를 일으킨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빈 공간을 강박적으로 메우려는 시도는 나 자신을 힘들게 만들 뿐이다.
고요 속에서 위안과 평온을 얻는 능력!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게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혼자 노는 법'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으며 오늘도 그런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헬스장에 '출근'했다.
그런데 그저 평온한 아침을 원하던 나를 010-8186-003*이 큰 혼란에 빠뜨렸다.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힙 어덕션에 앉은 채 휴대폰을 들고 멍하고 있는 나를 사람들이 힐끗거린다. 아, 맞다. 내가 지금 운동 기구 하나를 차지하고 있구나.
자리를 비키자 '마스크 맨' 아저씨가 불쑥 나타나 '나오셨어요?'하고 인사말을 건넨다. 운동 도구에 잽싸게 앉더니 끙끙 소리와 함께 다리에 힘을 줘가며 허벅지 근력 운동을 시작한다. 아파트 단지 내 시설이라서 그런지 평일 아침 시간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다. 가뭄에 콩 나듯 젊은 사람이 보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들은 있는 듯 없는 듯 티를 내지 않는다.
역시 나이가 지긋하신 이 마스크 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얼마 전 탈의실에서 샤워를 마친 후 옷을 입고 있는데 '자주 보는 거 같은데 인사나 하고 지내자'며 나에게 불쑥 말을 걸어왔다. 이 분은 운동하는 내내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반가운 척,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답해 주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반갑지는 않았다. 원래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만일 마스크 맨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려는 의도라면 나로서는 일단 조심스럽다.
다행히 카**톡은 그쪽 시스템 문제였던 듯 그 사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고 다른 특이한 변화는 없다. 다만 아직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나는 마스크 맨의 인사에도 대답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이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겠다 싶어 운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라고 인사했더니 마스크 맨이 왜 벌써 가느냐고 야단을 떤다. 그냥 눈인사로 대답을 대신하고 탈의실로 향했다.
샤워하는 내내 '그놈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집 주소가 다르다고 얼떨결에 대답하면 그놈은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여기로 전화하라거나, 문자를 보내 링크된 주소로 들어가 주소를 정정하라고 유도할 것이다. 거기까지 가면 일단 덫에 걸린 것이다.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거나 링크된 주소를 클릭하는 순간 벌어질 엄청난 비극은 너무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찍혀있는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어서 묻고 싶었다. 너는 누구 이냐고 그리고 이게 뭐 하자는 짓이냐고. 하지만 하면 안 된다. 나는 그놈이 얼마나 악한 놈인지 또 얼마나 독한 놈인지 모른다. 반면 그놈은 어떻게 알았든 나의 개인 정보를 알고 있다.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 내가 불리하다. 싸우려면 무조건 이겨야 하고 지는 싸움은 아예 하지를 말아야 한다.
점점 지능화되고 고도화되는 사기범들의 각종 범죄 행태는 특히 나이가 들어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노년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물론 젊은이라고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놈들이 노년층에 주로 접근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노인 한 분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일인 시위를 하는 장면이었다. 최근 노년층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파크 골프와 관련된 이슈였다. 파크 골프 인기가 높아져 부킹 대란이 벌어지자 관리 주체 측에서 온라인 예매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자 자신들은 소위 디지털 문맹이기 때문에 인터넷 예약을 할 줄 모른다며 시간 배정 등 특별한 혜택을 달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60세 이하 젊은이(?)의 라운딩을 금지해 달라고 주장했다.
그분의 기준에 의하면 나도 하마터면 젊은이가 될 뻔했다. 아니다. 세 살 차이로 늙은이가 된 건가? 어쨌든 지금은 나름대로 보이스 피싱 범죄자들의 악랄한 수법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기방어를 할 수 있지만, 내가 더 나이가 들어 디지털 문맹이 되거나 판단 능력이 떨어지면 언제든 범죄자들의 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고 소름이 끼친다.
보이스 피싱 범죄 초기 단계에는 단순히 전화를 걸어 정부 기관을 사칭하거나 환급금을 주겠다며 금융 정보를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몸 캠을 찍어 이를 공개하겠다고 공갈 협박하거나, 로맨스 스캠으로 피해자를 유혹하여 돈을 뜯어내거나, 가족이나 자녀가 납치 또는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속이는 방법으로 진화하였다. 최근에는 해킹, 파밍, 스미싱, 큐싱 등으로 지능화 및 고도화되어 피해자의 스마트폰에 악성 앱을 설치하고 금융 정보를 탈취하여 돈을 빼앗는 수법으로 사람들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해마다 그 피해액이 엄청나다고 한다.
그에 반해 이들의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자를 체포하여 엄벌에 처벌해야 하는 경찰력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사법 기능은 그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순식간에 덫에 빠져버린 피해자를 보호하고 구제하는 제도적 시스템도 전반적으로 미비하다. 일단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전제가 깔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역시 각자도생이다. 힘들지만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거나 방심하면 안 된다. 이 세상에는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
그나저나 남 등쳐먹으려다 뜻대로 안 되면 욕이나 퍼붓는 010-8186-003*, 이놈은 보이스 피싱이나 제대로 해먹을지 모르겠다.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