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교환학생 일기
5개월간의 교환학생 생활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잠시 동안은 유럽을 방랑하는 생활을 하겠지만, 그래도 이곳이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만큼 많은 것들을 배운 지난 5개월. 나에게 교환학생 생활은 어떤 의미였는지 정리해본다.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나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인천 공항에서 게이트가 닫히고 마중 나오신 부모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걱정과 설렘은 동시에 커져갔다. 오랜 시간 하늘을 날아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는 밤 12시였고, 으스스한 중앙역의 분위기에 잔뜩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도 안 되는 상황에서 무거운 짐을 끌고 학교까지 물어물어 찾아갔을 때의 힘들었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새로움'은 끝나지 않았다. 라면밖에 끓여보지 않았던 내가 비싼 북유럽의 외식물가 덕에 필사적으로 요리를 해야 했고,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 친구들과 애써 친구가 되어 보겠다고 재미도 없는 파티에 밤늦게까지 남아있어 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동사무소 근처에도 갈 일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모든 서류를 혼자 알아보고, 작성하고, 신청해야 했다. 유럽 곳곳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여행 계획을 세워 봤고, 캐리어가 아닌 배낭 하나에 짐을 꾸려 봤으며, 전날에 즉흥적으로 비행기 표를 끊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휘몰아치는 새로움 속에서 나는 고정된 스케줄 없이 물 흘러가는 대로 '그 날 그 날'을 살았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매 순간이 작은 도전들의 연속이었다. 지난 대학생활 3년간 배우고 익힌 것들보다 더 많은 경험들을 한꺼번에 배우게 된 5개월이었다. 단지 많은 것들을 배워서가 아니라, 새로움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한 것 같아서 좋다. 원래부터 경험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더 없어지게 되었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서 크게 염려하지 않게 되었고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도 크게 후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홀로 낯선 곳에서 시작하여 완전히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며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떻게든 풀리게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럽 중에서도 영어를 잘 하는 북유럽에 속하는 덴마크에서는 따로 덴마크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국민들이 영어를 잘 했다. 심지어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는 할머니들까지도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영어를 도구로서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생활하며 느낀 바로는 더 이상 영어는 도구가 아니다. 우리나라를 넘어 더 넓은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건 무조건 필수다.
여행을 다닐 때는 생각보다 영어가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길을 묻고, 가격을 묻고, 흥정을 할 때 사용하는 영어는 초등학생 수준의 영어만 하면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외국인 친구와 '페이스북 친구' 이상의 관계를 원한다면 영어로 하는 농담을 알아듣고,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친절한 친구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농담을 던져 줘도 잘 알아듣지 못해서 sorry? 만 연발한 것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그토록 원하던 외국인 친구가 먼저 다가와주는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건 내 쪽이었으니까.
사실 한국인 친구들과 많이 놀러 다녀서 인지 생각만큼 영어가 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영어가 중요하다는 사실만큼은 너무나도 확실하게 깨닫고 돌아가게 되었다. 영어 공부할 동기가 생긴 이상, 영어 공부가 예전처럼 따분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 교환 학생을 와서는 수업을 정말 패기 넘치게 신청했다. 선수 과목을 듣지 않았더라도 과목이 재미있어 보이면 신청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소셜 데이터 프로세싱’이라는 수업이었다. 석사 수업이었는데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 조금 독특했다. 아침 9시에 강의실로 들어가면 교수님과 조교님들은 앞에 가만히 앉아 계시고 학생들은 원하는 자리에 앉아서 이어폰을 꽂은 채 교수님께서 미리 올려둔 온라인 강의를 듣는다. 강의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교과서와 보조교재까지 함께 읽어야 하다 보니 영어가 잘 안 되는 나에게 수업시간 3시간 동안 그날의 과제를 끝내는 것은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여행을 다니느라 수업을 몇 번 빠지다 보니 점점 따라잡기가 힘들었고, 결국 3주~4주 정도 진도가 밀리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다들 뭔가 열심히 달려 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노트북에서 나는 오류 때문에 아직 프로그램을 실행도 못하고 있을 때면 짜증이 나기도 하고 열등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내 컴퓨터에서 나는 오류를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조교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몇 주가 그냥 흘러갔고 나는 내가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여 점점 수업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그리고 첫 번째 팀 프로젝트 과제가 나왔고, 같은 팀이 된 외국인 친구들과 조를 짜고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들도 겨우 1~2주 차 과제를 해결해가며 끙끙대고 있었는데, 나만 뒤쳐지고 있다고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웠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내가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느끼며 잃었던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른 과목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물리학과 석사생들보다 물리 문제를 잘 푸는 경우도 있었고, 컴퓨터 수업에서 코딩 문제를 제일 빨리 푼 적도 있었다. 우물을 벗어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했고, 자만심과 위축감 사이에서 자존감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북유럽, 그중에서도 덴마크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한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이곳에서 '여행자'로서가 아닌 '거주자'로서 지내다 보면 사소하면서도 꽤나 큰 충격을 주는 장면들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교환 학기가 끝나고 나를 포함한 교환학생들이 가지게 되는 공통적인 생각은 '덴마크는 참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자전거 수신호를 지키는 사람들
코펜하겐은 자전거 전용 도로가 아주 잘 설비되어 있다. 중심가로 나가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사불란하게 오고 가는 자전거들을 볼 수 있는데,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엔 단 한 번도 자전거 사고를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가 없어도 자전거 신호를 잘 지키고,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혼자 달리다가도 우회전하기 전에 오른손을 들어서 신호를 한다. 덴마크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행동들이 상대에 대한 배려의 차원을 넘어 당연히 해야 하는 습관처럼 굳어진 듯했다.
주차는 도로에 딱 붙여서
도로가 그렇게 좁은 것도 아닌데 모든 차들이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나누는 보도블록에 딱 붙여서 주차해 놓는다. 어떤 차들은 돌멩이 하나 집어넣을 자리조차 없을 정도로 보도블록과 맞닿아 있다. 다른 차들이 조금이라도 도로를 넓게 쓸 수 있도록 하는 배려심에서 비롯된 행동일까? 정말 이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걸까?
사람이 보인다면? 일단 멈춤!
도로를 건너갈 때 '이곳이 북유럽이구나'라고 느낀 적이 가장 많았다. 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었는지, 누가 먼저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봐도 그냥 지나칠 법한 속도로 다가오던 차들이 눈 앞에서 보란 듯이 멈춘다. 미소를 띠며 먼저 지나가라고 손짓을 하는데, 그게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나는 아직도 노리포트에서 본 그 신사의 손짓이 잊히지 않는다. 비싼 차가 아니었는데도 명품 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재활용 정신
북유럽 사람들의 투철한 자원 절약 정신은 노르웨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노르웨이의 한 박물관에서 티켓을 사면 박물관 지도와 설명이 적힌 팸플릿을 나누어준다. 관람이 다 끝나고 나면 팸플릿은 필요 없어지고 처치 곤란한 팸플릿은 아무 곳에나 버려지기 일쑤인데, 이 박물관에서는 출구 바로 앞에 팸플릿 수거함을 만들어 놓았다. "재활용을 위해 팸플릿을 놓아주세요". 정말 간단한 일인데 재활용을 해야 한다고 '알고만' 있는 우리는 보통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숙소의 호스트 아주머니도 냄비로 물을 끓을 때 꼭 뚜껑을 덮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왜 그러냐 이유를 묻자, 아주머니께서 뚜껑을 덮어야 가스 자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충격을 받기도 했다.
북유럽 사람들의 배려 또는 생활 습관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러한 행동들이 '어깨에 힘을 주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편의를 위해 내가 불편을 감수하고 희생하는 느낌이 아닌,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정작 본인들은 그러한 행동들에 대해 불편함도 못 느끼고 의식조차 못하는 이 성숙한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나 부럽게만 느껴진다.
교환학생을 오기 전, 큰 걱정거리 중 하나가 바로 '요리'였다. 항상 집에서 어머니께서 해주신 밥을 먹고 살아왔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학교 식당에서 만들어준 밥을 사 먹기만 했던 내가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계란 프라이'와 '라면' 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부모님께서도 내가 교환학생을 가서 너무 못 먹지는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할 때 되면 다 하게 된다"라고 부모님께 큰소리를 치고 대책 없이 덴마크에 왔지만, 칼 잡는 것부터 쌀 씻는 것까지 모든 게 어색해서 한 번 밥을 먹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항상 핸드폰으로 네이버 블로그를 켜둔 채 그대로 따라 하느라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요리를 시작한 지 1~2주 정도가 지나니 모든 것들이 익숙해졌고 계량에 대한 감도 생겨서 더 이상 블로그를 보지 않고도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요리가 생각보다 맛있게 된 날에는 그 자체가 너무 재밌고 뿌듯해서 다음번에는 어떤 요리를 할지 기대되었다.
처음 한국인 교환학생들이 다 같이 모여서 음식을 먹던 날에는 고작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이었는데 밥을 태우고, 팬을 태우고, 그걸 씻겠다고 식초를 뿌려서 온 컨테이너에 꼬랑내가 진동했었다. 그로부터 고작 3개월 뒤 우리끼리 재미로 열었던 '덴마크 한인 요리대회'에서는 다들 정말 놀라운 실력들을 보여주었다. 세 명이 한 팀이 되어 2만 5천 원 정도의 예산만으로 2시간 만에 요리를 했는데, 수육, 수제 햄버거, 토르티야 등 너무나 풍족한 저녁 식사가 만들어져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요리가 늘었는지 실감했다.
이제 여행을 가서도 요리를 해 먹을 수 있게 되어 여행경비가 줄어들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가끔씩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릴 수 있게 되었고, 미래의 와이프에게 사랑받는 남편이 될 자격도 갖추게 되었다.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던 '요리'에 대해 알게 되니, 라면밖에 끓이지 못하던 이전의 나는 얼마나 생활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는지 느끼게 된다. 교환학생에서 요리를 배워온 것만으로도 참 많이 배워온 것 같다.
나와 같은 컨테이너를 살던 친구들은 석사과정 친구들이 많았다. 우리나라(특히 우리 학교)의 석사생들과는 달리 친구들의 일상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는데, 점심과 저녁은 항상 만들어 먹었고 공부나 연구도 우리나라 학생들처럼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인턴을 하던 친구조차도 틈만 나면 나에게 저녁때 같이 놀러 가자고 꼬셨다. 한 학기 교환학생을 온 나야 시간이 많다 쳐도, 연구 성과를 내야 하는 석사과정 학생들이 이렇게 많이 놀아도 되나 싶었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많이 느꼈는데, 특히 북유럽 사람들이 굉장히 여유로워 보였다. 날씨가 풀리고 해가 비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공원 잔디밭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은퇴하셨을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 회사를 다닐 것 같은 아저씨 아주머니들, 남녀노소 모두 나와 태양빛을 맞으며 책을 읽거나 태닝을 한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며 노는 무리도 많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부러운 감정과 함께 "한창 일해야 할 것 같은 이 시간에 저렇게 놀면 일은 대체 언제 하나"라는 마음도 든다. 함께 교환학생을 온 형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는지 한 친구에게 "너희는 이렇게 맨날 놀 수 있어서 참 부럽다"라고 말했는데, 돌아온 대답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노는 게 아니야. 이건 그냥 사는 거야.
우리나라 학생들이 들으면 기가 차다 못해 화가 날 법한 대답이지만 이곳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확실히 알게 되는 대답이었다. 왜 덴마크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목적지를 향해 곧장 달려가는 삶이 좋은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참 당연하면서도 한국에서는 실감하기 힘든 사실을 이곳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돌아간다.
세계 3대 축제라는 니스 카니발, 아이슬란드에서 본 오로라,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에서 탄 카약, 런던의 뮤지컬, 독일의 동화 같은 마을들을 포함해서 너무나 많은 추억이 한꺼번에 생겼다. 6번의 여행과 이웃사촌처럼 지낸 10명의 한국인 친구들, 영어를 못해도 나를 잘 데리고 놀아준 컨테이너 F 친구들, 그리고 봄날의 코펜하겐 날씨처럼 따듯하고 친절했던 덴마크 사람들.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많이 느끼고 감동을 받아도 기록하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의 기억이기에, 기를 쓰고 브런치에 꼬박꼬박 일기를 적었다.
훗날 이때의 기억이 흐려지면 일기를 보면서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 기간만큼 여유롭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날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런 날들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해도 이제 괜찮을 것 같다. 이때의 기억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