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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전(無說殿)

늦은 아침 생각의 시창작

by 박 스테파노

진리가 있다면 말은 닿지 못한다

언어는 언제나 그 앞에서 멈춘다

그래서일까,

불국사 강당에 새겨진 무설전(無說殿)

말이 없는 법당,

그러나 가장 깊은 가르침이 머무는 자리


가을빛이 낮게 깔리던 날,

나는 그곳에 오래 서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설법을 대신했고,

낙엽은 제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날 이후 내 안에도 작은 무설전이 생겼다


항암의 계절, 입가가 헐고

입안이 쩍쩍 갈라

포진은 잊은 기억과 달리 제 자리를 잊지 않는다

면역이 약해질 때마다 그곳에서 다시 피어난다

나는 그 고통을 통해,

욕망이 얼마나 얇은 막 아래 숨어 있는지 깨닫는다

지우려 할수록,

그 자리에 되살아나는 것들은 언제나 있다


말을 숨기고 생각한다

남겨야 할 가을인가, 흘려보내야 할 가을인가

변한 듯 제자리로 돌아오는 욕심이 더 완고한 법,

그 더러운 고름을 안으로 삼킨 채

나는 오늘도 내 안의 균형을 궁리한다


면역과 결핍이 한 몸이듯,

빛과 그늘도 서로의 근거다

나는 이제 말보다 고요를 택한다

넘치던 말들이 가신 자리,

마음의 입술이 서서히 아문다


무설전. 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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