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스며든 울림 같은 떨림
사람들의 입에서 그의 노래가 다시 불리어지고, 겨울 볕 같은 짧은 생애와 수수께끼 같은 죽음이 회자될 때마다 마음 한편이 늘 불편하게 일렁이곤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좋아했다’는 고백, ‘그 음성이 그립다’는 말이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오래 곁을 지킨 친구가 “진작에 좀…” 하고 내뱉던 깊은 숨이 떠오르면서, 어쩌면 나 역시 같은 생각을 지나쳤던 건지도 모른다.
미리 좀 좋아해 주시지,
사람 속 다 태워버리고...
— 동물원 멤버 김창기 인터뷰 중
음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여전히 옳지만, 대중의 평가는 언제나 유행과 흥행을 중심으로 갈라진다. 이는 특정 음악인이나 그룹에 대한 평가를 넘어, 장르와 시대적 기조 전반에 스며 있는 관습적 질서이기도 하다. 1990년대는 낡은 시대가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감각이 전면에 부상하던 시기였다. 대중음악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큰 강을 건너듯 급격히 변했고, 영상 매체의 확장과 물질적 풍요는 음악을 ‘즐길 거리’의 축으로 이동시켰다. 그 흐름 속에서 인간의 감성, 사회에 대한 사유를 담은 음악은 통기타의 잔향과 함께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다.
화려한 무대에 가려 방송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자신을 잠식하는 쓰라림을 품은 채 소극장 무대에 성실히 올라섰던 그의 노래는 늘 애잔한 기척을 남겼다. 힘이 빠진 듯한 말투, 작은 체구 아래로 드리워진 두 눈은 자주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서늘한 그늘을 품고 있었다. 사라질 듯 위태로운 노래를 지켜내려 속을 태우다 끝내 생을 놓아버린 뒤에야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조심스레 찾아 들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음악을 다시 더듬는 일은 언제나 미안함이 먼저 다가온다.
그럼에도 그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라고, 폐허에 돋아난 가시 속에서도 너의 평범함을 외면하지 말라고. 평범한 재주를 비범한 결로 새겨 넣던 목소리, 김광석을 다시 불러내 본다.
반토막에서 거인으로: 한 목소리가 빚어낸 시간의 음향
김광석은 196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그의 학창 시절도 그 도시에 뿌리를 내렸다. 음악에 대한 감각은 일찍 찾아왔다. 바이올린과 오보에 같은 클래식 악기를 익혔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부에서 성부 사이를 오가며 호흡을 배웠다. 체구가 작아 친구들이 붙여 준 ‘반토막’이라는 별명은 오래도록 그를 따라다녔고, 그 때문인지 세상 앞에 설 때면 특유의 수줍음과 머뭇거림이 그림자처럼 곁에 머물렀다.
그가 음악을 자신의 길로 삼게 된 것은 명지대학교 진학 이후였다. 비교적 늦게 만난 통기타가 결정적인 인연이었고, 그 시대 대학가에서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노래패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통과의례에 가까웠다. 1984년, 그는 그렇게 민중가요 동아리 ‘새벽’의 일원이 되었다.
우연히 접한 민중가요 관련 서적을 통해 사회와 노래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학전 소극장의 김민기—<아침이슬>의 그 김민기—의 눈에 들어 시대극 뮤지컬 ‘개똥이’ 무대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전 검열이라는 거친 모래바람 속에서 안치환, 배호 등과 결을 맞추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결성했고, 닫힌 골방이 아닌 거리와 광장을 향해 노래가 건너가는 일의 전율을 온몸으로 배웠다. 1987년 《노찾사 1집》 활동을 통해 집회 현장과 발표회 무대에 서게 되었고, 김지하의 시를 노래로 옮긴 <녹두꽃>은 현장에서 자주 울려 퍼졌지만 정작 방송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채 리코딩 코러스만 남겼다.
김광석이라는 음악인의 뼈대는 그 시절 노찾사에서 형성되었다. 노찾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그의 목소리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노래극 배우를 뽑는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도, 그 제작자가 김민기라는 사실을 쉽사리 연결하지 못했다는 회고는 그의 순진한 경외심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그의 음악 속에 흐르던 ‘시대와 일상의 중창’이라는 방향성은 노찾사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었다. 이름을 얻은 뒤에도 그는 그 시절의 음악과 인연들—배호, 백창우—을 꾸준히 이어 갔다.
6개월의 짧은 군 복무를 마친 뒤, 그는 고려대 근처에서 ‘고리’라는 카페를 운영했다. 사실상 지인들의 아지트에 가까웠고, 그 인연은 다른 카페 ‘무진기행’의 일곱 친구로 이어졌다. 이들이 모여 결성한 밴드가 ‘동물원’이다. 김창기의 작곡 실력에 주목한 ‘산울림’의 김창완이 젊은 음악가들을 돕겠다며 팀을 밀어 주었고, 1988년 《동물원 1집》이 세상에 나왔다. 누구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한 곡이 뜻밖의 바람을 일으켰다. 김창기가 만들고 김광석이 부른 <거리에서>였다.
동물원 멤버들은 전업 음악가를 꿈꾸는 이들이 아니었다. 김창기는 의사 수련 중이었고, 나머지 멤버들도 연구와 진학 등 각자의 진로가 이미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2집 작업도 특별한 조급함 없이 흘러갔다. 그 와중에도 김광석은 묵묵히 기다림을 택했고, 종종 방송에는 혼자 나가 “동물원에서 유일하게 탈출했다”는 농담을 던지며 자신을 낮추었다. 1989년, 동물원은 2집을 끝으로 잠정 해산했고, 그는 혼자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로 서 보기로 결심했다.
솔로 1집에는 <너에게>와 <기다려줘>가 실렸고, 예상을 넘는 반응을 얻었다. 이어 2집에서는 한동준의 <사랑했지만>,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이 대중의 심장 가까이에 도달했다. 김광석은 한동안 불교방송 라디오 DJ를 맡으며 청취자들과 호흡을 이어 갔고, 정기 공연을 통해 자신의 노래가 머무를 자리를 넓혀 갔다. 그 과정에서 ‘변절’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오히려 이를 정면 돌파하듯 3집을 만들었다. <나의 노래>가 시대의 기척을 품고 청중에게 닿으면서 그는 진정한 포크의 계보를 잇는 목소리가 되었다.
김광석은 처음부터 곡을 직접 쓰는 유형의 싱어송라이터는 아니었다. 그의 자작곡이 자리 잡은 시기는 4집부터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곡을 선택하고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로 변주해야 하는지를 아는 드문 감각을 지녔다. 다양한 작가의 곡들을 자신의 결 속에 묶어, 마치 오래 품어 온 자작곡처럼 들리게 하는 힘이었다. 그는 주변의 뛰어난 친구들을 인정했고, 그들과 깊이 연결되었으며, 그들의 노래에 먼저 귀를 기울였다. 음악을 향한 그의 공감 능력은 그런 관계 속에서 빛을 발했다. ‘반토막’ 꼬맹이라 불리던 친구가 어느새 무대를 채우는 거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삶과 노래가 세상에 남긴 울림은 그 우렁찬 함성만큼이나 길고 깊었다.
서른 즈음에 부르는 생의 마지막 떨림
1993년,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음악 여정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한 달을 훌쩍 넘기는 장기 공연을 기획하고, 자신의 노래가 서 있는 두 축—포크와 민중가요—을 차분히 정리하는 음반 《다시 부르기–1》을 세상에 내었다. 스물아홉이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를 다시 불러냄으로써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리메이크 앨범’이라는 장르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이 흐름은 다음 해 발표한 4집까지 이어졌다. 〈일어나〉는 〈나의 노래〉에서 이어진 내적 선언처럼 들렸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서정적 포크의 결을 블루스의 음영과 섞어내며 감정의 뼈대를 절제된 선율로 다듬었다. 그리고 〈서른 즈음에〉—오늘까지도 가슴의 깊은 층위를 울리는 이정표 같은 노래—가 그 앨범에 자리했다.
1995년, 다시 장기 소극장 공연에 돌입하며 《다시 부르기–2》를 발표했다. 1집이 자신의 흔적을 정리한 작업이었다면, 2집은 한국 모던 포크가 걸어온 고독한 궤적에 대한 헌정에 가까웠다. 김목경, 김의철, 한대수, 양병집(밥 딜런), 이정선, 백창우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복원해 내는 집대성이었다. 동명의 공연에서 녹음한 라이브와 그의 소박한 멘트가 더해지며 시간의 결이 선명하게 각인되었고, 그는 그 여세를 모아 전국 8개 도시를 도는 ‘Green Tree Story’ 투어로 포크의 계승자가 누구인지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그는 “또 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매일무대에 섰다. 1995년 8월, 마침내 1000회 공연이라는 믿기 어려운 금자탑이 세워졌다. 그날, 나는 학전 멤버로 초대되어 공연장에 있었다. 중고생부터 청년, 그리고 예순이 넘은 노부부까지 두 달 넘게 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 사이에 흐르던 공기에는 오래 잊지 못할 떨림이 있었다. 운 좋게 공연 뒤풀이에도 합석했는데, 하회탈처럼 잘 웃던 그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소주 두어 잔이 들어가자 금세 붉어진 얼굴로 연신 웃음을 건네던 그 순간이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지금 돌아보면, 끝내 자신도 알지 못한 마지막 궤도의 전조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해 11월, 그는 미국 초청 공연까지 마친 뒤, 1996년 1월 5일 박상원의 HBS 「겨울나기」에 출연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과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부르던 그 모습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무대가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노래를 부른 지 7시간 30분 뒤, 그는 자택에서 싸늘한 몸으로 발견되었다. 방송 후 〈내 사람이여〉를 함께 작업한 동지 백창우를 만나 새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새벽녘에 귀가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는 팬클럽 회장에게 “앞으로는 TV에도 자주 나가고 유명해져서 돈도 많이 벌겠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다음날 오전의 일정까지 잡아둔 상태였다. 초저녁에는 음반 관계자와 식사를 하고, 집 앞에서는 안치환·백창우와 현대시를 음악으로 살리는 작업을 논의했다고 한다. 그렇게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뒤, 그는 계단에서 전깃줄에 목이 감긴 채 발견되었다.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증거 부족이라는 이유로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었다. 수많은 질문이 남겨진 채였다.
그날 그와 함께 있었던 이들은 오랫동안 충격에 잠겼다. 특히 백창우는 김광석이 “한 잔만 더 하자”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며 만류하고 돌아선 일을 자책하며 오래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류근 시인이 작시하고 그가 노래했던 말이 떠오른다. 다시는 사랑으로 오지 않겠노라 다짐하듯 속삭이던 목소리. 그 말은 이별을 예감한 자의 선언이었을까, 아니면 남겨진 우리가 그리움을 감당하기 위해 붙잡은 마지막 해석이었을까. 너무 아프게 사랑한 것이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그의 노래는, 사실 우리 모두가 그에게 미처 다 건네지 못한 마음의 무늬를 조용히 감싸 안는 위안이었는지도 모른다.
몸으로 부른 노래, 일상의 숨결
김광석은 엄청난 가창력을 지녔다거나 미려한 음색으로 승부하는 가수는 아니었다는 평가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노래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파장이 숨어 있다. 흔히 ‘염소창법’이라 말하는 촘촘하고 짧은 파형의 바이브레이션, 그 미세한 떨림은 실제 무대에서 그의 몸을 함께 울리며 번져 나왔다. 두성과 흉성이 뒤섞인 음의 결이 몸 전체를 통해 토해지듯 뻗어나갔고, 그 진동은 곧 청자의 가슴 안쪽에서 또 다른 울림으로 되살아났다. 몸으로 부르는 노래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난다.
정작 그는 이런 떨림을 오래 콤플렉스로 지니고 살았다. 어릴 적 노래만 부르면 “고만 좀 떨어라”라는 핀잔이 따라붙었고, 그래서 성악을 배우기 위해 추계예대 편입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창의 절정은 오히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와 〈사랑했지만〉 같은 곡에서 빛난다. 3옥타브 고음의 정점을 힘 있게 밀어내는 순간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이라고 여겼던 떨림을 가장 강력한 표현의 무기로 전환하고 있었다.
“〈사랑했지만〉을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사랑하는데 바라보기만 한다는 가사 때문이었죠. 그런데 어느 할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이 노래가 1926년생인 본인 마음에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불러일으켰다고.”
1995년 8월, 소극장 학전블루에서 열린 1000회 라이브 기념 공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늘 겸손했다. 자신은 그저 소리를 열심히 내는 사람이고, 누구의 노래든 부를 수 있으면 기꺼이 부르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스스럼없이 남겼다. 그의 음악에는 그래서 포장지가 없다. 노랫말과 음성이 마치 피부처럼 그 자체로 드러난다. 슬픔에는 슬픔의 음색을, 기쁨에는 기쁨의 온기를, 비장함이 필요할 때는 거의 포효에 가까운 힘을 실어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그를 ‘9번 타자’라고 불렀다. 하위 타선의 미약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황당한 이야기와 과장된 이미지로 노래하지 않았던 ‘마지막 진짜 타자’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그의 노래는 특별한 사건을 좇지 않았다. 조각구름이 흩어지는 하늘, 별들이 은은하게 번지는 밤, 국화와 장미, 사루비아가 피어 있는 어느 점원의 풍경처럼, 일상의 결을 담담하게 노래했다. 다반사 같은 일상에는 ‘황당함’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짝사랑의 쓸쓸한 언저리에는 〈사랑했지만〉, 군대에 들어서는 청춘에게는 〈이등병의 편지〉, 이별에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이라는 문턱에서는 〈서른 즈음에〉, 사랑을 붙잡지 못하는 순간에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좌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일어나〉, 시대의 정의를 외칠 때에는 〈광야에서〉, 인생의 황혼길에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가 함께했다. 그의 노래는 한국인의 생의 곡선을 따라 조용히 흘러들며 감정의 결을 어루만져 왔다.
그의 음악을 음악적 기준으로만 논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포크 음악을 흔히 저항의 노래라 규정하지만, 그것은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맥락이 만든 좁은 정의이기도 하다. 포크의 저항은 체제나 권력에 대한 대결을 넘어, 인간의 욕망과 무지에 대한 경고이고, 자연과 시대, 세대의 흐름을 성찰하는 고요한 시선이다. 김광석이야말로 이 넓은 의미의 포크를 가장 충실히 수행한 음악가였다.
포크 음악은 결국 ‘성찰의 음악’이다. 성철 스님이나 이어령 선생처럼 거대하고 원대한 사유도 있지만, 문예반에서 시를 쓰던 어린 친구의 이름 모를 성찰 또한 포크의 한 결을 이룬다. 성찰은 거창한 번뜩임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들으며 잊었던 추억을 소환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추억을 다시 건져 올리는 일은 곧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고, 그렇게 삶의 결을 더듬어 보는 과정이 성찰이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불현듯 깨닫게 된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쳐 왔는지. 시간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어떻게 한낱 작은 권력만 붙잡고 살아왔는지. 산다는 것은 결국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향하는 함께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연스레 옆과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발견한 일상의 틈들이, 마치 큐비즘 회화 속 사물처럼 각기 다른 면을 드러내며 우리의 자화상을 다시 그리게 한다. 김광석의 노래가 지금도 다시 불리고, 다시 들리고, 다시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남아 있다.
누군가의 외투처럼 건네진 노래
김광석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게 살아 있다. 그의 노래 때문일 수도 있고, 반달눈 같은 표정 때문일 수도 있고, 석연치 않은 죽음과 저작권 분쟁의 그림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미해결의 이야기들로 깊이 들어갈 생각은 없다. 서른셋에 세상을 떠난 그가 오십둘이 된 내게 건네는 의미는 이미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 집안에서 자라, 1991년 불교방송 〈밤의 창가〉를 진행하며 법정 스님을 비롯한 불교계 인사들과 교유했다. 법정 스님에게서 ‘원음(圓音)’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훗날 그가 지은 건물의 이름도 ‘원음 빌딩’이 되었다. 둥근 소리라는 뜻의 그 이름은 자연스레 팬클럽의 이름으로 이어졌다. 동네에 살던 김민기 선생 덕분에 학전 소극장은 주머니 가벼운 복학생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내주었고, 나는 그곳에서 김광석의 전성기 무대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둥근 소리’ 사람들의 모임에도 종종 함께했다.
대학 초반까지 빠져 있던 록 밴드를 접고, 다시 통기타를 잡게 만들어 준 노래를 잊기는 쉽지 않다. 1996년, 러시아 유학길에 오르던 날이었다. 친구 한 명이 응원한다며 고기를 사주었고, 허름해 보였던 내 차림이 마음에 걸렸는지 입고 있던 두터운 외투와 목도리를 벗어 주었다. 나는 그에게 돌려줄 만한 것이 없어 가장 아끼던 물건을 건넸다. 《김광석 다시 부르기 1집》이었다. 《2집》은 내 배낭 속에 넣어 러시아까지 가져갔다. 누군가 버린 기타를 고쳐 기숙사 방에서 그 음반을 틀고 따라 부르던 밤들이 있었다. 내가 김광석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나를 둘러보아 준 이들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광석의 노래는 듣는 이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애잔하고 애틋해지고, 그럼에도 서늘한 슬픔 틈새로 따뜻한 위로가 번져든다. 이제 내 기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젊은 날 들여다보던 악보들도 손에서 떠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젊은 세대가 다시 통기타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방송과 미디어에서 그의 노래가 다시 울렸다. 그를 기리는 거리가 만들어졌고, 김광석을 테마로 한 버스가 다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허전함과 그리움이 더 깊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나 또한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확인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립고 그리워할수록 그리움은 더 커지는 법이니까.
오십을 넘긴 뒤의 삶은 종종 고달프다. 노래 한 곡 들을 여유도 없이 지나가는 날들이 겹겹이 쌓였다. 김광석의 노래를 피하며 살았다. 그 노래가 다시 무너뜨릴까 두려웠다. 오래된 고장들로 몸과 마음은 이미 쉽게 주저앉을 만큼 낡아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노래는 늘 먼 곳에서 불빛처럼 따라왔다. 혼자 남은 밤이면 노래를 부르자고, 삶의 언저리에 희망 몇 송이를 다시 피워 보자고, 그 노래가 내 눈물을 환하게 비추어 줄 것이라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라고, 봄의 새싹처럼 일어나 보라고 말해 주었다.
혼자 남은 밤
이렇게 슬퍼질 땐
노래를 부르자
삶에 가득 여러 송이 희망을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
김광석의 노래에는 고독이 머물고 외로움이 흐르지만, 기묘하게도 마음을 짓누르지 않는다. 그 애잔함은 방향을 잃은 사람을 더 깊은 수렁으로 데려가는 대신, 손바닥만 한 불빛처럼 은근한 힘을 건넨다. 밤의 결이 짙어지고, 홀로 지새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목소리는 어둠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거리라도 걸어보자고, 혼자라면 노래라도 불러보자고, 그렇게 말없이 등을 떠밀어 준다.
하얀 별빛이 고요히 이마를 비출 것이고, 그 빛들이 한 송이씩 피어올라 희망의 꽃다발이 되리라는 믿음을 건네는 목소리. 골방 같은 삶의 좁은 틈에서조차 외로움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던 노래. 그의 음성은 지금도 그렇게, 어둠 속에서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작은 길을 열어 준다.
맑고 향기롭게
말없이 넌 말하지 더욱 같이 하는 걸
조금씩 날 물들이지 더욱 너를 닮도록
은은한 내 마음결 따라 피어오는 꿈 속에
맑고 또 향기로움이 멀리 있진 않구나
한때 내 블로그의 이름은 ‘맑고 향기롭게’였다. 삶의 속살이 흐려질 때마다 마음을 정화해 주는 주문처럼 오래 붙잡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 구절은 이해인 수녀의 시에서 작사가가 영감을 얻어 태어난 표현이라고 한다. 노영심이 작사·작곡하고 김형석이 편곡한 곡이기에 그 말의 결이 더욱 곱고 단정하게 빚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 짧은 문장에는 단순한 수식 이상의 온기가 깃들어 있고, 그 말 안에서 예쁜 생각들이 조용히 자라난다.
잊어야 하는 마음으로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 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누군가의 빈자리는 둘이 하나를 이루며 견디던 사람에게 가장 깊게 파고든다. 온전했던 100이 하루아침에 50으로 깎여 나간 것처럼, 남겨진 절반은 홀로 버티기엔 너무 크고 쓸쓸하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추억도 물처럼 스며 사라진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시간을 견디는 이는 한밤을 새우며 기억의 미세한 결들을 끝없이 더듬는다. 날이 밝으면 방은 어제보다 훨씬 넓어 보이고, 그 넓어진 만큼 그리움도 부풀어 오른다.
김광석은 이런 결핍의 감정을 찌질함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애절한 시의 호흡으로 끌어올릴 줄 알던 가수였다. 상실이 지닌 고요한 비애와, 눈을 감아야만 들리는 마음의 떨림을 노래로 길어 올렸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이별의 서늘한 온도를 품고 있으면서도, 끝내 그 온기에 무너지고 마는 인간의 나약함을 품어 안아 준다.
영화 〈홍반장〉에서 고 김주혁 배우가 남긴 잔상처럼, 그의 노래는 일상의 틈새에서 느닷없이 떠올라 마음 한쪽을 다정하게 울리고 간다.
꽃
꽃이 지네 산과 들 사이로
꽃이 지네 눈물같이
겨울이 훑어간 이곳
바람만이 남은 이곳에
봄이 다시 돌아온 이곳
그대 오지 않은 이곳에
민중가요의 맥을 잇는 〈광야에서〉와 〈동지를 위하여〉를 만든 이는 문대현이었다. 김광석의 노래는 웅변처럼 묵직하게 밀려오면서도, 그 안쪽에서 시가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듯한 울림을 지닌다. 목청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말의 결을 가다듬어 음에 실어 보내는 방식에 가깝다. 성악을 배우며 익힌 호흡과 발성이 민중가요 특유의 투박함과 겹쳐지며 독특한 균형을 만들었고, 그가 왜 유독 선명한 파동을 남기는 가수였는지 그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그의 창법에는 노래패 시절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견뎌야 했던 시대의 공기가 깊게 배어 있다. 단순한 선동이 아니라, 함께 버티고 함께 건너야 했던 시간의 체온이 담겨 있다. 그래서 문대현과 다시 만난 노래는 함성의 외침과 시의 호흡이 한 데 맞물려, 듣는 이의 가슴에 오래도록 머무는 울림이 된다.
너에게
나의 어릴 적 내 꿈만큼이나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랑
내가 그것들과 손잡고
고요한 달빛으로 내게 오면
내 여린 마음으로 피워낸 나의 사랑을
너에게 꺾어줄게
마음이 뒤척일 때면 이 노래를 찾곤 했다. 눈을 감는 순간 장면이 환하게 열려, 오래도록 나를 붙들었다. 가벼운 조각구름이 흘러가는 저녁 하늘, 별빛이 살얼음처럼 반짝이며 멀리까지 이어지는 그 깊은 공간, 그리고 국화와 장미, 사루비아가 겹겹으로 피어나는 정원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풍경의 입구에는 문이 하나 서 있고, 이상하게도 그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마치 마음이 부서질 것 같은 날에도 들어설 수 있는, 온기가 남은 어떤 자리처럼.
이 노래는 김광석의 콘서트 마지막 인사였던 “행복하세요”라는 말의 다른 형태 같다. 말로는 다 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마음을 멜로디에 실어 전한 듯한, 다정하고 소박한 온기가 있다. 김형석이 작곡가로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던 시기의 작품이라 더 싱그럽고 투명한 결이 느껴진다. 아직 이름이 완전히 굳어지기 전의 젊은 창작자가 지닌 감수성, 한 사람의 세계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이던 순간의 숨결이 그대로 배어 있어, 들을 때마다 그 문장과 음들을 천천히 더듬게 된다.
그래서일까. 세상의 소음이 높아질수록 나는 다시 이 노래를 찾는다. 그 열려 있는 문을 지나 잠시 머물다 보면, 소란했던 마음의 물결이 조금 가라앉고, 잊고 지냈던 다정함이 희미하게 제 얼굴을 드러낸다.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바람이 불면
나를 유혹하는 안일한 만족이 떨쳐질까
바람이 불면
내가 알고 있는 허위의 길들이 잊혀질까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동물원 2집에 실린 이 곡은 김창기의 손끝에서 태어난 노래다. 본과 3학년,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잔뜩 조급해진 어느 밤의 기색이 그대로 배어 있다. 가사는 묘하게 비어 있다. 왜 편지를 쓰는지, 누구에게 보내는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조차 말하지 않는다. 다만 책을 덮어 두고, 쌓여가는 상념을 견디지 못해 일단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말의 결핍이 오히려 불안과 고독의 온도차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노래는 김광석과 함께한 마지막 활동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하다. 김창기가 처한 현실적 제약들이고, 김광석의 절박함과 고단함도 엷게 뒤섞여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진솔하고, 어떤 설명보다 깊은 우정의 결이 묻어난다. 노래 하나를 친구에게 편지처럼 쓴다는 감각, 그 단순한 행위에 두 사람이 공유한 시간의 무게가 담긴다.
후렴에서 터져 나오는 김광석의 스캣은 놀라울 정도로 강렬하다. 비틀즈의 〈Hey Jude〉 마지막 대목을 떠올릴 만큼 힘이 실려 있고, 그 거친 호흡의 파동이 곡 전체를 끌어올린다. 정제되지 않은 절규와도 같은 그 소리 덕분에 이 노래는 더 오래 남는다. 말의 빈칸을 소리로 채우고, 소리의 잔향 속에서 우정과 삶의 균열이 동시에 빛난다.
그래서 이 노래가 좋다. 담담함과 격정 사이를 잇는 투명한 다리처럼, 그 시절의 감정과 숨결을 지금도 그대로 불러오니까.
친구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어디 있겠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뮤지션에게 영감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을 우리는 흔히 ‘뮤즈’라 부른다. 김광석의 어깨 위에도 아마 두 명의 뮤즈가 앉아 있었을지 모른다. 한 명은 동물원을 결성하게 이끌어 준 김창완, 또 한 명은 노래의 길을 잃지 않도록 곁에서 다잡아 준 김민기였다.
김광석을 둘러싼 친구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가족이라는 굴레가 때로는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친구라는 울타리는 그 안에서 따뜻한 빛이 된다. 구멍을 파는 저음으로 <친구>(원곡 김민기)를 부른 그의 목소리도 좋았지만, 김광석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나눈 순간들의 진정성이 더 오래 남는다.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의 노래 속에, 그 음과 숨결 속에 친구들의 흔적이 살아 있는 것처럼.
※ 참고
• '영원한 33세 김광석이 저편에서 이편의 사람을 일깨우는 이유' : 월간 조선
• '김광석 평전 - 부치지 않은 편지' : 세창 미디어
• '김광석,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 미디어어스
• '퍼포먼스·스마트시대…우린 왜 김광석에 열광하나' : 헤럴드 코리아
• 그리고 나무위키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