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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울림의 기원 - 산울림에 대하여

피터팬의 그림자를 데리고 걷는 노래들

by 박 스테파노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거장의 손끝에서 태어난 작품답게, 음악이 장면의 숨결을 오래 머금는다. 주제를 은근히 되짚어 주는 첼로 선율 <르 바디나주>는 깊은 심연을 두드리며 서늘한 여운을 남기고, 비극의 절정을 마주할 때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고추 잠자리>는 익숙한 멜로디를 돌연 절규처럼 변주한다. 어릴 적 완곡으로 들을 기회조차 드물었던 노래가 스크린의 어둠 속에서 되살아나는 순간, 관객은 자기 내부의 시간까지 함께 재생되는 듯한 정서적 소환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이 기묘한 살인을 뒤로한 채 도주하는 길 위에서 들려오는 <그래 걷자>는 영화 전체에 미세한 균열과 숨 틈을 만든다.


산울림의 리더 김창완이 자신의 첫 솔로 음반 《기타가 있는 수필》(1983년)에 담아낸 <그래 걷자>는 기타 중심의 단출한 편성 위로 나른한 멜로디가 잔잔히 깔리는 ‘소품 같은 명곡’으로 회자된다. 일상의 감각을 스치는 은유적 가사와 말하듯 낮게 흐르는 창법이 어우러져, 한 편의 짧은 에세이를 읽는 듯한 분위기를 이룬다. 영화 속에서는 이 나른하고 모호한 말‧멜로디가 독백과 고백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며, 서사의 틈새에 작은 사유의 방을 마련한다.


김창완의 음악을 떠올릴 때 피터팬의 이미지가 함께 겹쳐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은 모두 ‘어른이 되기를 잠시 미루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한쪽은 현실 속에서 상상력을 세밀하게 길어 올리는 예술가이고, 다른 한쪽은 현실 자체를 거부하는 영원한 소년이다. 유년성과 자유라는 상징을 공유하면서도, 김창완의 서사는 결국 나이 든 몸의 무게와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일상의 자리로 귀환하는 쪽에 가깝다. 반면 피터팬은 끝내 네버랜드를 떠나지 않으며 성장이 내포하는 책임과 시간의 흐름을 기꺼이 거부하는 인물로 남는다.


피터팬 같은. 노컷 뉴스 제공


김창완의 음악 세계가 흔히 ‘사차원’, ‘될 대로 되라’로 요약되는 이유도 이러한 상상력의 방향성과 닿아 있다. 기존 질서를 비틀어 바라보는 장난스러운 태도, 규범이 지배하는 세계를 가볍게 통과하려는 자유의 감각은 네버랜드의 무중력성과도 어딘가 통한다. 산울림이 한국 록의 불모기에 보여 준 실험성과 무구한 에너지, 청년들의 욕망과 반발심을 대변한 자유로움은 어른의 세계에 대항하며 영원한 아이로 남으려는 피터팬의 정서와 기묘하게 공명한다.


그래서 영화 <어쩔 수가 없다> 속 <그래 걷자>의 재등장은 단순한 삽입곡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시대 마지막 피터팬’이라 불리던 김창완과 산울림의 음악은, 삶의 잿빛 결을 통과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안의 유년적 자유를 건드리는 어떤 은밀한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힘이 관객의 귀를 지나 마음의 내면을 스칠 때, 영화는 말로 다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열어 두고, 우리는 그 공간을 따라 잠시 걸어가게 된다.



투명과 몽환 사이의 메아리


‘좋은 노래’라는 말이 불러내는 풍경은 각자에게 늘 다르게 펼쳐진다. 곡의 구조가 감탄을 일으키며 마음을 쓸어 올릴 때도 있고, 가창자의 숨결과 결이 미묘하게 흔들리며 내면의 균열을 따라갈 때도 있으며, 문장처럼 다가오는 가사의 떨림 속에서 감각이 스스로 방향을 정할 때도 있다.


이런 기준들을 떠올릴수록, 1975년 등장한 '산울림'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정의로 포섭될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신중현이 열어젖힌 록의 문법을 자연스레 흡수하면서도, 당시 세계를 뒤흔든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거친 기운을 은근히 품어 올린 아마추어리즘의 반란. 그것은 단순한 음악적 시도가 아니라, 미학적 불순물과 경계를 의도적으로 흔드는 행위였다.


데뷔앨범 《산울림 1집》을 같은 시기 등장한 섹스 피스톨스와 비교하는 것은 표면적 공명에 불과하다. 숙련된 테크닉보다 솔직한 거칠음을 앞세워 주류 문법을 흔들었다는 점은 맞지만, 산울림의 본령은 훨씬 깊다. 그들의 음악은 정치적·사회적 이념과 무관하며, 미학적 규범이나 이론적 정답과도 무관하게 흐른다. 의도적 메시지를 포장하지 않는 태도, 그 무심함과 거리 두기 자체가 그들의 미학적 핵심이다.


초기 산울림의 음악이 사이키델릭 록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면, 4집 이후는 포크의 맑은 결로 이동하며, 김창완이 밝힌 것처럼 ‘동요’의 씨앗을 과감히 가져왔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마음을 흔들고 정서를 환기시키는 장치다. 순수함과 투명함이 극대화된 동요는 사상이나 주장이라는 불순물을 흡수하지 않는, 거의 원초적 노래 형태를 지닌다. 반면 사이키델릭 록은 몽환과 명상, 종교적 상상력, 전자 악기의 확장이라는 요소로 구성되어 ‘어른의 음악’에 가깝다. 이 두 극단의 긴장을 하나의 몸으로 담아낸 것이 바로 산울림이다.


1981년 산울림. 나무위키 제공


산울림의 음악 스펙트럼은 단순히 ‘넓다’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대의 규범에서 벗어난 상상력, 동요의 투명함에서 시작해 몽환의 어둑한 골짜기를 건너는 자유, 심지어 진지함마저 엉뚱하게 비틀어 버리는 태도. 이들의 미학은 음악적 문법과 감각의 영역을 동시에 확장하며, 듣는 이를 낯선 심리적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노래의 울림이 단순한 정서를 넘어 존재론적 체험으로 확장되는 순간, 우리는 오래된 멜로디 속에서 새롭게 열린 감각과 마주한다.


산울림의 음악은 단순한 장르적 실험을 넘어, 청각적 사유와 정서적 공간을 동시에 설계하는 미학적 구조로 읽힐 수 있다. 사이키델릭 록에서 포크와 동요로 이어지는 선율의 이동은 곧 시간과 기억, 그리고 감각의 층위를 교차시키는 장치다. 초기 사이키델릭 록의 몽환적 화음과 전자적 울림은 청자를 현실의 연속에서 떼어내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유영하게 만든다. 그 안에서 반복되는 코드 진행과 불협화음은 단순한 음악적 장치가 아니라, 존재의 불확정성과 감정적 틈을 드러내는 미세한 흔들림으로 기능한다.


반면 동요적 요소가 결합된 포크적 결의 곡들은 음의 투명함과 리듬의 단순성으로 마음속 깊은 곳을 깨끗하게 비춘다. 이는 단순한 향수나 순수함을 소환하는 차원을 넘어, 청자를 감정적 체험의 근원으로 인도하며 음악과 존재 사이의 직접적 접촉을 만들어낸다. 산울림의 미학은 이처럼 극단적 대비를 동시에 품어, 청자가 한 곡 안에서 몽환과 투명, 거칠음과 맑음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음악적 울림은 청각을 넘어 심리적 풍경과 존재론적 공간까지 확장되며, 듣는 이를 오랫동안 매만지고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독자적 미학을 완성한다.



이상한 순수의 파동, 산울림


1975년 이후의 한국 대중음악계는 말 그대로 잿빛 들판 같았다. 독재 정권의 ‘가요대정화운동’, 이어진 ‘긴급조치 9호’와 ‘대마초 파동’은 음악인의 삶을 깊이 파고들어, 많은 이들이 스스로 물러나거나 강제로 침묵을 강요받았다. 록과 포크처럼 시대의 기류를 흔드는 장르들은 더욱 가혹한 감시 아래 놓였다. 바로 그 무렵, 삼 형제가 작은 방에서 조용히 울림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울림’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어둠의 틈에서 솟아올랐다.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 서로의 숨결을 가장 가까이 들으며 자라난 세 형제는 계란판을 붙인 작은 방에서 싸구려 악기와 함께 자신들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1977년 MBC 대학가요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무이(無異)’라는 이름으로 참가했고, 둘째 김창훈은 속해 있던 ‘샌드페블즈’에서 나와 자작곡 <나 어떡해>를 넘겨주며 형제의 음악에 합류했다.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로 1위, 샌드페블즈는 <나 어떡해>로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재학생만 출전할 수 있다는 규정 탓에 이미 졸업한 김창완 때문에 무이는 탈락했고, 결국 본선의 대상은 <나 어떡해>를 부른 샌드페블즈의 몫이 되었다. 형제들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추억을 남기려는 마음 하나로 서라벌 레코드에 데모 테이프를 맡겼다. 당시 수백만 원에 달하는 녹음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레코드사가 무료 녹음을 제안하며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열렸다. 그렇게 탄생한 음반이 《산울림의 새 노래 모음》이다.


150곡에 이르는 자작곡을 엄선해 제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범했는데, 녹음 과정은 더욱 기이할 만큼 순수했다. 값싼 장비 탓에 곡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기타 줄이 풀려 조율이 불가능해지자, 평론가 이백천이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와 이펙터를 급히 빌려주었다. 그야말로 ‘아마추어’ 손끝에서 만들어진 이 음반은 40만 장가량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선정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5위에 오른 기록은 그 순도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보여준다. 바로 뒤 6위가 《산울림 2집》이었다.


형제들의 도모. GQ코리아 제공


이후 동생들이 군 복무와 취업으로 흩어지며 산울림은 1986년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 신해철이 중심이 된 재조명 열풍과 대중의 요구 속에서 형제들은 다시 뭉쳤다. 그 결실이 《13집》이었다. 이 앨범은 초창기(1~3집)의 질감으로 돌아가 인디씬의 새 감수성과 절묘하게 호응했다. 차가운 세태 비평과 아마추어적 감수성, 어린아이 같은 노래가 공존하던 시기, 70년대 산울림은 독립음악의 또 다른 원형으로 되살아났다. 그 시기에 태어난 노래가 <기타로 오토바이 타자>와 <무지개>였다.


그러나 2008년 1월 29일, 막내 김창익이 캐나다에서 지게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눈길 위 미끄러진 기계 아래에서 갑작스레 사라진 생이었다. 김창완은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떠난 이상 산울림이라는 이름으로 더는 활동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긴 시간 이어온 전설은 그렇게 조용히 문을 닫았다.


산울림은 처음도 끝도 가족의 놀이터에서 출발했다. 그 무르익은 놀이감처럼, 언더그라운드 인디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한 줄의 희망을 울린다. 황무지의 시대를 스스로의 음색으로 채워 넣었던 그들의 음악은, 어둠의 시대에 어떻게 한 줄기 울림이 되어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증언으로 남아 있다.



황무지의 메아리, 산울림이라는 이름의 빛


앞서 언급했듯, 산울림이 활동을 시작하던 시절의 공기는 전쟁 직후의 황막한 들판과도 비슷했다. 예술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혼돈의 풍경 속에서 산울림의 노래는 종종 오해를 감수해야 했다. 바로 ‘시대정신’의 결여라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작업을 충분히 듣고 사유한 끝에 내려진 판단이라기보다, 너무 이른 결론에 가깝다. 무엇보다 산울림은 당시 유난히 심의의 벽에 자주 부딪힌 팀이었다.


악보 검열과 가사 검열이 일상이던 시대, 《산울림 1집》의 모든 곡이 심의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환경이 얼마나 숨 막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퇴폐적이라는 이유, 지나치게 우울하다는 이유는 지금 들으면 기묘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니 벌써>는 결국 가사를 통째로 다시 써야 했고, 김창완은 개작 전 가사가 몹시 비관적이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3집》의 <황무지>는 <내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교체되었다가, 이후 김창완이 만든 리마인드 앨범에서는 <금지곡>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대표곡들 대부분이 당시 ‘검열의 필터’를 거쳤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곡들 속에 숨어 있는 온전한 목소리의 결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산울림은 1970년대의 황량한 가요계를 아마추어로 출발해 한 시대를 고되게 건너간 존재였다. 1980년대 중반, 김현식과 유재하, 그리고 동아기획과 하나뮤직의 흐름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 내기 전까지의 긴 암흑기를 버티며 한국 록과 포크의 숨을 붙들어 준 팀이었다. 거대한 공백의 시간을 더듬어 가며 자신들만의 길을 열어 젖힌 셈이다.


예술가라면 대개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인데, 산울림은 이 평범한 전제에서조차 벗어나는 팀이었다. 평론가 박은석의 말처럼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은’ 밴드라는 평가는 묘하게 정확하다. 당시 기술적 여건도, 환경도 누군가를 모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그들의 음악은 또 누군가가 곧장 답습하기에는 지나치게 낯설고 묵직했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 전후의 인디 밴드들이 오히려 산울림의 유산을 선명히 자기 음악 속에 새기며 등장했다는 점이다. 영향은 때로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제들과 함께여서 가능한 '산울림'.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제공


명반으로 꼽히는 《2집》은 《1집》 발표 4개월 만에 세상에 나왔다. ‘파격과 혁신의 메아리’라는 임진모 평론가의 표현처럼 그 시기의 산울림은 늘 자신보다 더 큰 산울림을 불러오는 존재였다. 《3집》의 <그대는 이미 나>로 이어지는 초기의 흐름에는 디스토션이 두드러진 공격적 사운드가 자리한다. 사이키델릭이나 프로그레시브의 영향으로 분류되기도 하나, 세심하게 들어보면 어느 계보에도 깔끔하게 귀속되지 않는 독자적 구조와 텍스처가 돋보인다. 굳이 언어를 빌린다면 ‘개러지 록’의 얼터너티브성에 가깝다는 정도일까.


이들은 스쿨밴드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던 ‘카피 연주’를 한 번도 하지 않은 팀이기도 했다. 이미 자신들의 곡을 만들어 내느라, 모방할 시간이 없었다. 연주 실력의 미숙함과 장비의 부족함도 오히려 독창성의 일부가 되었다. 프로그레시브 음악의 중심에 놓였던 신시사이저는 고가의 장비였고, 형제 중에 건반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도 없었다. 지금 한국 음악계에서 ‘샘플링’을 쉽게 창작이라 우기곤 하는 흐름을 떠올리면, 산울림의 작업은 진정한 창작이 무엇인지 오래 전부터 묻고 있던 셈이다.


초기의 음악이 록의 기반 위에 서 있었다면, 이 황량한 땅을 울리던 메아리는 80년대 중반 한국 록 전성기의 시발점에 가까웠다.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이펙터를 과감하게 사용한 음향은 한국 헤비메탈의 한 기원을 제공했다는 평가도 있다. 반대로, 21세기 초반의 인디 음악에서 산울림의 흔적을 찾는 일은 지금도 어렵지 않다.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았던 팀이 후대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셈이다.


동생들이 군복무에 들어가자 산울림은 잠시 호흡을 달리했다. 멜랑콜리한 포크와 영화‧연극의 주제곡을 묶어 《4집》을 냈고, 휴가 중 잠시 모인 틈에 《5집》을 만들었다. 《6집》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7집》의 <청춘>, 《8집》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처럼 대중적 감수성에 맞닿는 곡들이 이 시기에 잇달아 나왔다. 실험의 기운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지만, 보다 넓은 청중과 조응하려는 태도가 드러난 시기였다.


산울림의 음악은 <산 할아버지>, <개구쟁이> 같은 동심의 세계에서 <먼 나라 이야기>의 사회 비판, <독수리가 떴네!>의 환경 문제에 이르는 너비를 지녔다. 김창완이 <첫사랑 광주야>를 통해 민주주의와 사회적 상식을 노래로 건넸듯, 김창훈은 친일파와 일제 강점기의 부역자들이 쓴 시는 노래로 부르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 왔다. ‘순수’라는 인상만으로 이들이 시대와 무관한 노래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판단이다.


한 시대의 황무지를 통과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연보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한 줄을 적어 넣은 존재. 산울림은 그렇게 묵묵히, 그러나 누구보다 강렬하게 한국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채워 주었다.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던. GQ코리아 제공



심장의 빛, 산울림의 시간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산울림의 노래는 천편일률적인 사랑 타령을 반복하지 않는다. 건반 주자는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처럼 한음 한음을 또박또박 짚어 주고, 일그러지고 뭉개진 기타 톤과 극적으로 증폭된 사운드는 심장의 우심실과 좌심방을 동시에 자극한다. 변박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드럼의 전진은 수도자의 정진처럼 흔들림 없고, 묵직하면서도 유연한 베이스는 정직한 박자 위에 그루브의 숨결을 더한다. 산울림의 정수를 경험하고 싶다면 《1집》을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그 도입부에는 지금의 음악들이 쉽게 포기해 버린 정서의 빌드업이 담겨 있으며, 오늘 샘플링되어도 결코 촌스럽지 않은 구성이다.


산울림의 음악은 포크 음악이 지닌 구도의 엄숙과 명상적 강박, 그리고 록 음악이 꿈꾸던 혁명적 신화의 아집을 벗어던진 자리에서 생겨났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지금도 새롭다. 새롭고 독특한 것을 의도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진 신선함이다. 역설이거나 모순이 아니라, 음악 자체의 결을 좇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오늘날 우리는 도입부 1분에 전략과 욕심을 쏟아 놓느라, 나머지 3분의 시간과 결을 잃어버리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후반부의 3분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존재가 원래 지니고 있던 숨결일지도 모른다.


산울림의 음악은 <아니 벌써>에서 <황무지>로, <그대는 이미 나>에서 <청춘>, <내게 사랑은 너무 써>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시대를 관통하며 고유한 결을 지켜 왔다. 동심과 현실, 정치적 감수성을 아우르면서도, 결코 특정한 형식이나 장르에 갇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음악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라 시간과 심장을 함께 울리는 체험으로 전환된다. 지금 우리가 다시 들어야 할 산울림의 노래는, 사라진 3분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진짜 음악의 숨결을 마주하는 일이 된다.


'전설이라고요? 전설되기 참 쉽네요.'라고 김창완은 말한다. 엑스포츠뉴스 제공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예쁜 촛불로 그대를 맞으리
향그러운 꽃길로 가면 나는 나비가 되어
그대 마음에 날아가 앉으리


지금 세대에게는 ‘주단’이라는 말조차 낯설게 들릴지 모른다. 어머니 손을 잡고 시끌벅적한 시장을 거닐다 보면, 설빔과 예단을 맞추기 위해 들렀던 ‘주단 집’이 떠오른다. 그 촘촘한 무늬와 빛나는 결, 고요하게 깔린 주단 위로 걸음을 디디던 기억은, 음악의 한 도입부처럼 마음속에 남는다.


4개월 만에 내놓은 《2집》의 대표곡, 그리고 감히 산울림의 상징적 곡이라 부를 수 있는 이 노래는, 그런 기억과 겹쳐질 때 더욱 선명하다. 도입부의 전주는 단순한 반복 속에서 설렘을 키워 가는데, 그것은 마치 주단을 곱게 깔아 놓고 노래를 맞이하는 손길과 같다. 반복되는 음의 결 하나하나가 발끝을 스치는 설렘처럼, 청자를 조심스레 맞이하며 음악의 공간을 열어 준다.


이 전주가 주는 기대와 긴장은 곧 곡 전체의 세계를 예고한다.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기억과 감각을 풀어 내는 방식이다. 주단 위를 걷는 발걸음처럼, 노래는 차분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속에 자리하며, 청자에게 설렘과 온기를 동시에 건넨다.


https://www.youtube.com/watch?v=Od2zhI92gug



청춘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응답하라 1988>에서 김필이 불러 다시 세상에 울려 퍼진 이 노래는, 구슬픈 포크의 결을 그대로 지닌다. 그 구슬픔의 끝자락에는 묘하게 단단한 결심이 서 있다. 아련함 속을 지나치며 스며드는 정서는, 언뜻 모를 또렷한 의지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의 아내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며 지금까지 꾸준히 듣는다. 이 곡은 1981년 발매된 《7집》에 수록되어 있다. 시간을 거쳐 청춘의 한 자락을 지나고 나서야, 그 시절의 마음과 청춘의 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고, 지나간 뒤에야 그 무게와 빛을 비로소 보여 주는 법이다.


노래는 그 아련함과 결심 사이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며, 듣는 이의 마음 속에서도 시간을 지나온 흔적을 불러일으킨다. 구슬픈 멜로디와 단정한 전주가 함께 어우러져, 청자에게 지난날의 풍경과 마음을 조용히 열어 준다.


https://www.youtube.com/watch?v=cg6gfsdlzBQ



내 마음 (내 마음은 황무지)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놓은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이 곡은 《3집》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 때문에 검열의 벽을 넘어야 했고, 가사도 상당 부분 덜어내야 했다. ‘황무지’를 사랑으로 곱게 만들겠다는 마음을 담았지만, 군부의 눈에는 그 단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1998년, 신해철은 영화 <정글 스토리>를 위해 이 곡을 리메이크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도입부가 원곡 그대로였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연주해도 원곡의 그 특별한 결과 감정을 재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주의 한 음 한 음이 지닌 울림과 긴장은,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라 황무지에 꽃을 피우려는 마음이 깃든 숨결이었다.


음악은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원래의 결과 감정을 간직한 채 다시 우리의 마음을 스친다. 황무지를 꽃으로 바꾸려던 작곡가의 마음은, 검열과 세월을 거쳐도 여전히 청자에게 닿는다. 그 마음을 느끼며, 음악 속 황무지에 조용히 꽃을 피워 본다.


https://youtu.be/ujyKkXmtrRQ



너의 의미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슬픔은 간이역에 코스모스로 피고
스쳐 불어온 넌 향긋한 바람
나 이제 뭉게구름 위에 성을 짓고
널 향해 창을 내려 바람 드는 창을 접기


이 곡은 이른바 ‘히트곡’으로, 아이유가 리메이크하면서 또 한 번 세상에 울림을 남겼다. 노랫말은 단정하고 예쁘지만, 흥미롭게도 두 동생은 참여하지 않은 채 김창완의 솔로 앨범으로 발표된 곡이다.


사랑을 하다 보면 간절함과 함께 의구심이 함께 움튼다. 마음 한켠에 스며드는 이 의심과 기다림은, 결국 수수께끼가 되어 우리에게 숙제로 남는다. 기타를 타고 오토바이를 달리던 김창완에게도, 아마 그런 날이 있었으리라. 그날의 마음, 그날의 소용돌이가 한 음 한 음에 녹아, 지금 듣는 이의 가슴에도 묘한 설렘과 아련함을 남긴다.


음악은 이렇게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삶의 작은 질문과 마음속 결심을 함께 품고,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결을 드러낸다.


https://youtu.be/0TAY6q_L5Iw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에서 옛 향기가 스며 나온다. 참으로 섬세하고 셈나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누구에게나 아련한 추억과 힘겨운 기억은 함께 존재한다. 그날들을 떠올리고 기억하는 것은 잘못도 후회도 아니다. 다만, 어렴풋이 스며드는 옛 생각의 향기가 마음 한켠을 스치고, 시간 속에 묻혀 있던 기억을 불러낼 뿐이다.


그 향기를 따라, 그날의 노래를 다시 들어 본다. 음악은 기억과 마음을 조용히 흔들며, 지나간 시간과 오늘의 마음을 은밀히 이어 준다.


https://youtu.be/9QmSr0DUvM0



그래 걷자


그래 걷자 발길 닿는 대로
빗물에 쓸어버리자 이 마음
한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
빗물에 떠다니누나 이 마음
조그만 곰 인형이 웃네
밤 늦은 가게 불이 웃네
끌러버린 가방 속처럼
너절한 옛 일을 난 못 잊어 하네


영화 <어쩔 수가 없다>에서, 주인공 만수의 아들 시원이 친구와 함께 휴대폰 가게를 훔치고 경찰에게 쫓기는 장면에 흐르는 음악이다. 빗속을 달리는 어린 도둑의 자전거 패달은 경찰차를 따돌리며, 동시에 만수가 살인 후 도주하는 장면과 묘하게 겹친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기화된 아이러니한 처지 위로 울리는 음악은 겉보기에는 관조적이고 여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가사의 틈틈이 스며드는 의미는 빗물처럼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그 여유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끌러버린 가방처럼 너절한 내 사연은, 그저 곰인형이 웃고, 밤늦은 가게 불빛이 어슴푸레 웃어 주는 풍경 속에 남는다. 음악은 그렇게 시공간을 따라 마음을 흔들며, 동시에 관조와 긴장 사이를 오간다.


https://youtu.be/686MNCHrLxE?si=buxBXmKafI9FSK4B



※ 참조:
• 대중음악 100대 명반, 5위 산울림 ‘산울림 1집’ - 박은석/ 경향신문
• 산울림 - 임진모/ 네오뮤직 커뮤니티
• 황무지에 울려 퍼진 산울림, 또는 산울림의 독백 - 김창훈 인터뷰/ 웹진 Weiv
• 그리고,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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