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단상 - 대림을 맞이하며
1.
사람들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 오르내리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이제야 보았다. 피치 못할 사정 탓도 있었지만, 정작 유행의 파도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에야 당도한 이 늦은 관람이 의외의 자유를 열어주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환호할 때 침묵할 수 있고, 여럿이 미간을 찌푸릴 때 느긋하게 호의를 건넬 수 있는, 세평의 소음이 걷힌 틈새가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틈은 영화와 나 사이의 호흡을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의식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있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 소위 ‘PTA’라 불리는 감독을 맹종하거나 신봉할 필요는 없지만, 동시대를 함께 통과하는 창작자로서 그가 포착해낸 X세대의 관념적 방황은 오래 가라앉는 잔향처럼 스크린 아래에서 퍼져 나왔다. 의미와 신념의 무게를 등에 지고 살았던 윗세대와, 실리와 자기만족의 가벼운 속도로 움직이는 아랫세대 사이에서 방황하던 이른바 ‘낀 세대’. 거기에는 한 시대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감각이 있었고, 그 미세한 부양의 흔들림이 영화 전체의 정조를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삶은 영화 제목처럼 ‘연이은 전투(One Battle After Another)’의 연속인지 모른다. 견고한 이념은 여전히 버겁고, 지나치게 가벼운 실리는 또 낯설어 잠시 머뭇거리게 만드는 그 경계에서, 우리는 매일의 크고 작은 결투를 치러내며 살아간다. 그 전투는 종종 외부의 적과 벌이는 충돌이기보다, 스스로의 방향을 묻고 다시 답하며 하루를 작게 정돈하는 내밀한 씨름에 더 가까웠다. 영화는 바로 그 조용한 전투들을 한 장면씩 끌어올려, 부서질 듯한 감정의 결이나 오래 지체된 질문들을 숨기지 않은 채 스크린 위에 놓아두고 있었다.
그 결과, 유행의 발화점에서 조금 비켜난 이 늦은 관람은 오히려 영화의 골격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경험으로 번졌다. 타인의 평가가 걷힌 자리에서 비로소 들려오는 음색이 있고, 뒤늦게 찾아간 사람만이 만끽하는 고유한 사유의 온도가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런 온도 아래에서 천천히 침전하며, 우리가 오늘도 감당하고 있는 존재의 과제를 조용히 호출하고 있었다.
2.
이 영화를 두고 씨네필을 자처하는 이들은 으레 <컴퍼니 유 킵>(2012)이나 <허공에의 질주>(1988) 같은 작품을 먼저 호출한다. 서사의 친연성을 근거로 자신이 지닌 영화적 지적 자산을 드러내려는 몸짓일 테고, 그런 몸짓 속에는 어딘가 은근한 우월감이 깃들어 있다. 그들이 말하는 핵심은 대체로 같다. 혁명가였던 아버지 세대가 뜨거운 이념의 불꽃을 거두고, 오로지 자식과 가족의 안위를 지키는 소시민으로 변모해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이 얼굴과 마음에 남긴 굽은 주름들. 그 흔적은 시대의 열정이 꺼져가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어떤 불가피한 통과의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과거의 뜨거운 이상과 현재의 차가운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그들은 한때 세계를 견인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삶의 작은 균열을 봉합하며 하루를 버티는 존재로 서 있다. 이 변화의 궤적을 쉽게 ‘변절’이나 ‘투항’이라 명명해버리는 시선도 있지만, 그 이름표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들의 삶을 이루는 층위는 생각보다 겹겹이 쌓여 있고, 어떤 선택들은 외부의 압력보다 더 강한 내면의 피로와 상처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그 변모는 차라리 ‘이념의 인간화’에 가깝고, 오랜 세월을 견딘 자만이 비로소 체득하는 ‘성숙’의 한 형식처럼 읽힌다.
물론 이런 관점을 두고 누군가는 나이 든 자의 비겁한 자기합리화라 공격할지 모른다. 그러나 삶을 지켜낸 자의 침묵 앞에서는 그 비난조차 쉽게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오래된 신념을 삶의 무게와 함께 다시 끌어안기 위해 치른 고독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바로 그 대가를 감내한 자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세월의 바람에 빛이 바랜 듯한 그 표정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닌 조용한 비애의 근원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가 비추는 한 세대의 뒤편에서, 이념보다 인간이 먼저 손에 잡히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3.
영화에 대한 주류 해석보다 내 마음을 깊숙이 파고든 장면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액션도, 정치적 함의가 선명한 대사도 아니었다. 주인공 부녀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돌연 주고받는 ‘암구호’ 복창이었다. 뜬금없이 보일 만큼 갑작스러웠지만, 그 낯섦이 오히려 장면의 진동을 키웠다. 암구호란 본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피아(彼我)를 식별하기 위한 군사적 프로토콜이다. 영화는 이 장치를 극적으로 전유해 위기 순간의 기척을 가르는 기준, 즉 신뢰할 것인가 경계할 것인가의 균열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암구호가 단순히 외운다고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말의 형식만 익힌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말이 일상 속에 스며들어 몸의 기억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망설임이나 계산 없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와야 비로소 암구호의 효력이 생긴다. 그것은 어둠을 가정한 채 살아가는 존재의 준비된 자세이기도 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을 앞두고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태도, 사소한 순간에도 경계와 사랑을 동시에 품는 마음의 수련. 이 준비의 다른 이름이 바로 ‘기다림’이었다.
이 기다림은 무작정 시간을 견디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예기치 않은 어둠을 향해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 능동적 행위에 가까웠다. 사랑하는 이를 향해 손을 뻗되, 그 손이 닿지 않을 것을 미리 아는 슬픔까지 함께 끌어안는 마음의 긴장. 영화 속 암구호는 그런 긴장의 밀도를 가장 압축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곧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지는 순간, 부녀가 나누던 그 짧은 호출과 응답은 극 중 관계를 넘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울리는 작은 신호처럼 다가왔다.
4.
영화 속에서 암구호와 비상시 대처 요령은 혁명가들에게 생존을 위한 제2의 이름과도 같았다. 16년이라는 시간을 삼켜낸 기다림 탓에 기억이 잠시 흐릿해져 길을 잃는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그 오래된 약속의 언어를 되살려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를 지켜낸다. 서로를 향해 던지는 짧은 문장 하나가 살아 있는 증거가 되고, 이 징표가 두 사람을 마지막까지 이어주는 생의 끈처럼 작동한다. 그 장면에서 암구호는 단순한 군사적 신호를 넘어 ‘오래된 신념이 어떻게 몸에 스며드는가’를 보여주는 은유로 확장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제의 전례력, 대림 제1주일의 복음 말씀이 겹쳐 떠올랐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단 하나, “깨어 기다려라”였다. 대림(待臨)은 본디 ‘임하심을 기다린다’는 뜻을 품은 말이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내려오신다는 의미를 강조해 강림(降臨)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기다리는 이의 능동적 태도에 방점을 두고 대림이라 부른다. 기다림이라는 행위가 더 이상 소극적 수동이 아니라, 도래하는 이를 향해 자신을 단단히 준비시키는 능동적 자세임을 인정하는 변화였다.
성경은 한 장면을 끌어올려 우리를 흔든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은 노아의 홍수처럼 불시에, 일상의 가장 평범한 순간 한복판으로 들이닥칠 것이라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던 그 시간, 거대한 물결이 모든 생을 삼켜버렸듯, 재림은 준비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냉정하게 나눌 것이다. 어둠 속을 가르는 암구호처럼, 그때의 구분은 미묘하지만 뚜렷한 한 마디, 한 태도에서 갈라질지 모른다.
도둑이 언제 들지 몰라 밤새 깨어 집을 지키는 가장의 마음을 복음은 예로 들었다. 이 이미지는 단순한 경각심을 넘어, 참된 기다림이 어떤 구조를 지니는지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막연한 시간의 소진이 아니라, 자신을 정돈하고 마음을 바로 세우며 예기치 않은 방문에 대비하는 치열한 준비의 과정이었다. 어둠 속 위기의 순간을 대비해 암구호를 몸에 새기던 영화 속 부녀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대림의 시간도 그러한 ‘깨어 있음’의 훈련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기다리는 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 미세한 긴장과 결의가야말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오래된 발걸음을 지탱하는 힘처럼 느껴졌다.
5.
이번 주부터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시기’가 도래했다. 성당의 제대 위에는 보라색 제의가 사제의 어깨에 걸리고, 공간 전체가 기다림의 호흡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다. 그 기다림의 마지막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 곧 성탄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묵상 중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이 떠올랐다. 기다림의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기다림이 언제나 ‘만남’으로 귀결되는가, 아니면 기다림이라는 시간의 층위 속에서 얻게 되는 발견과 자각이 더 근본적인 뜻을 품는 것인가.
돌이켜보면 기다림의 끝이 꼭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대상이 있다. 세상을 먼저 떠난 부모님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존재도 있고, 내 곁을 떠나 타인의 세계로 건너가 버린 옛 연인처럼, 애써 잊고자 해도 마음속 특정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인물도 있다. 혹은 기약 없이 미뤄지는 희망이 있을 수 있다. 어느 날엔 그 희망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듯하다 사라지고, 또다시 저 먼 곳에서 그림자만 예고하는 날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막막한 그리움을 ‘기다림’이라는 단어로 부드럽게 감싸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다림의 끝에서 비로소 맞닥뜨리는 서늘한 진실이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자각이든, ‘이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라는 냉정한 인식이든, 그것 또한 기다림이 남긴 명확한 응답에 가깝다. 기다림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내밀한 자기와 대면하게 하는 통로가 된다. 돌아오지 않을 이들을 위해 마음 한편을 정리하는 일, 가능하지 않을 꿈을 현실의 스펙트럼 안에서 다시 배치하는 일, 이 모든 과정이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진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기다린다는 행위의 바닥에는 간절한 바람이 서려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그 바람을 위해 몸과 마음을 조금씩 닦아낸다. 어둠을 마주하더라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불확실한 미래를 견디기 위해, 혹은 언젠가 올지 모를 실낱같은 기적을 향해 자신을 준비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내적 움직임을 ‘준비’라고 부른다. 대림 시기는 그 준비의 시간을 우리 앞에 다시 펼쳐놓고, 기다림이 어떤 형태로든 결국 우리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일깨워준다.
6.
기억을 더듬어 국민학교 시절로 돌아가 본다. 형이 입던 단정하고 멋스러운 단복에 마음을 빼앗겨, 4학년이 되자마자 보이스카우트에 입단했다. 그 무렵의 활동 대부분은 교실이라는 안전한 틀을 벗어나 야외에서 생존의 기본기를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고 지도를 펼쳐 지형을 읽었으며, 종이와 나뭇가지를 모아 해시계를 만들어 시간의 흐름을 짐작했다. 텐트를 치고 매듭을 묶어 낯선 땅에 잠자리를 마련했다가, 아침이면 다시 풀어내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반복 속에서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문명의 이기를 일부러 벗어두고, 조금은 불편한 야생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체험이었다. 스카우트의 인사는 언제나 짧고 강렬했다. “준비!”
그 한마디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어떤 태도의 이름처럼 다가왔다. 잼버리든 이름 없는 앞뜰 야영이든, 스카우트 활동은 흔히들 말하는 극기 훈련의 범주를 훌쩍 넘어선다. 그것은 닥쳐올지 모를 상황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는 대신, 그 상황을 버티기 위한 내적·외적 도구를 내 몸에 장착하는 ‘준비’의 시간이었다. 실제로 살면서 천재지변이나 극한 상황을 맞닥뜨릴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유년 시절에 체화된 ‘준비’의 감각은, 어른이 되어 전혀 다른 무대에서 부딪히는 삶의 불확실성을 견디도록 돕는 요긴한 가르침이 된다.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준비된 자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단순한 명제를 그 시절 몸으로 배웠다.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은 목적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 자체로 삶을 지탱하는 근육을 키우는 일에 가깝다. 미래의 어떤 순간을 위해 현재의 나를 가다듬는 시간, 그 시간이 쌓이며 서서히 내적 버팀목이 생겨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기다림이 품은 힘이자, 준비가 우리에게 건네는 조용한 효용이 아닐까. 준비하는 사람만이 기다림을 허무로 읽지 않고, 그 기다림을 통해 자신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나는 어린 시절 그 짧고 강렬했던 구호 한마디에서 배워왔다.
7.
한때는 내가 이룬 작은 성취들이 오롯이 나의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스스로의 재능을 과대평가하며, 세상이 조용히 건네온 우연과 호의를 무심히 지나쳤다. 그러나 세월의 결을 따라 조금씩 뒤돌아보니, 그 모든 성취의 밑바닥에는 ‘운’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나를 떠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서늘한 진실처럼 드러난다. 나의 의지로 이룬 것처럼 보였던 순간들이 사실은 수많은 조건이 우연히 맞물린 결과였음을, 나이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며 이러한 생각은 더욱 또렷해졌다. 같은 재능을 품었음에도, 삶의 갈래를 결정짓는 것은 종종 노력보다 ‘운’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두 인물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상연이 친구에게 월세 4천만 원 규모의 130억짜리 건물을 가볍게 증여할 수 있는 삶은 자본주의 사회가 이상화하는 성공의 표본처럼 비친다. 그 반대편에 서있는 은중은 상연에게 끝내 열패감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따지고 보면 은중은 이미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운의 미세한 기울기가 만들어낸 격차는 두 사람의 내면에 깊이 새겨진다.
인생이란 복잡한 장에서 잠시 발을 헛디뎠을 때, 그 실수를 온전히 ‘내 부족함’으로만 환원한다면 삶은 얼마나 잔혹한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가. 잘된 것은 감사히 맞이한 운의 덕분으로 받아들이고, 이루지 못한 것은 지나간 미련으로 조용히 건네 보내는 태도. 그 마음가짐은 패배의 합리화가 아니라, 긴 시간을 버티며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마음의 균형을 되찾는 방식에 가깝다.
어쩌면 이것이 삶을 견디게 하는 ‘참된 기다림’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시 운의 문이 열릴 것을 기대하며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 그 기다림 속에서 자신을 탓하기보다 삶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려는 태도. 나는 그 조용한 마음의 기울기가야말로 우리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고 느낀다.
8.
연이은 출간의 시간을 통과하며 마흔 즈음을 단단하게 건너가고 있는 작가 정지우의 말 중,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울리는 문장이 있다. 작가란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그는 주저하지 않는다. 작가는 “오늘도 쓰는 사람”이라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에’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은’ 쓰는 사람도 아니다. 그 말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보조사 ‘도’가 있다. 이 작은 음절 속에는 어제도 썼고, 그제도 썼으며, 내일 또한 기꺼이 책상을 마주하겠다는 지속의 결심이 겹겹이 쌓인다. 그는 1쇄에서 멈춰 선 책들을 이야기하며, 금세 잊히는 결과 앞에서 작가들이 얼마나 깊은 좌절을 겪는지 헤아린다. 그러면서도 묵직한 확신으로 말한다. 꾸준히 쓰는 이들에게는 결국 문이 열리고, 운이라는 예기치 않은 찬스마저도 어느 순간 조용히 다가온다고.
어떤 이에게는 이미 자리를 잡은 작가의 너그러운 충고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닫지 않고 귀를 기울이면, 이보다 더 단단한 격려도 드물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늘 불안과 어둠 속에서 손끝을 더듬는 일이며, 때로는 재능에 대한 의심과 자기 부재의 감각이 파고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라는 말은 다시 펜을 들게 하는 작은 등불처럼 다가온다.
여러 망설임과 저어하는 마음을 잠시 뒤에 두고, 나 역시 이 문장을 부적처럼 가슴께에 붙인다. 기교보다 성실이, 순간의 영감보다 축적된 시간이 결국 한 사람의 글을 빚어낸다는 믿음을 조용히 되새긴다. 그래서 다시, 오늘도 쓴다.
9.
누군가를, 혹은 어떤 사건의 도래를 기다린다는 것은 마음을 서서히 갈아내는 일에 가깝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붙잡아야 하니 고단함이 쌓이고, 기대와 두려움이 엇갈리며 마음은 늘 불안정한 진동 속에 놓인다. 그럼에도 기다림에는 묘한 생기가 있다. 심장 깊숙한 층이 미세하게 떨리고, 그 떨림이 희미한 불빛처럼 하루의 결을 조금 더 밝힌다. 기다림의 끝이 반드시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시간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의 자신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하고, 잊고 지냈던 감각들을 되살린다.
세상의 끝, 수평선 너머의 먼바다를 오래 바라보는 이의 뒷모습이 어쩐지 애처롭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희망의 잔광을 잃지 않기에, 그 모습은 한 인간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자세 중 하나처럼 느껴진다. 만남이든, 깨달음이든, 혹은 조용한 체념이든, 기다림은 결국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남기며 끝에 가서 한 겹의 성찰을 더해 준다.
내게 기다림이란 지금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우선의 과업에 가깝다. 이어지는 지연 속에서 체력이 깎이고 마음이 두터운 피로에 잠식될 때도 있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가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기대어 쉴 작은 벽 하나를 찾는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는 지금도 나를 떠받치며 자신만의 버팀목을 세우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을 떠올리면,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는 다짐이 조용히 되살아난다. 예전 별명처럼 ‘곰탱이’의 우직함을 스스로에게 불러내어, 내가 가장 익숙한 태도로 다시 하루를 연다. 기다린다. 깨어 준비한다. 그리고 마음속 파문을 가다듬으며, 오늘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