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리 방패의 역설- 쿠팡 고객 정보 유출에 비추어

휴대폰 번호는 어떻게 우리의 디지털 목숨줄을 쥐었나

by 박 스테파노

쿠팡에서 3천만 건이 넘는 고객정보가 한순간 새어나갔다. 기술적 해킹이 아니라 내부 구성원의 일탈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는 사실은, 보안 체계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 언제나 인간의 손끝에서 열린다는 오래된 진실을 다시 불러낸다. 데이터 보호 기술을 아무리 촘촘히 고안해도, 정작 그 기술을 다루는 사람의 양심과 공공선에 대한 감각까지는 설계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알고리즘이나 장비가 아니라, 식별 체계와 정보보호 규준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정책적 전환에 가깝다.


특히 ‘본인 휴대폰 번호 인증’이라는 제도적 관성은 이번 사안을 더욱 기묘하게 비춘다. 쿠팡 측은 주민등록번호나 계좌번호 등 이른바 S급 식별 정보가 유출되지 않았다며 사태를 축소하려 했지만, 오늘의 디지털 환경에서 휴대폰 번호는 사실상 또 하나의 절대 식별자로 기능한다. 핀테크 전반의 구조가 이미 휴대폰 번호를 중심으로 사용자의 패턴을 유추하고 금융 접근을 허용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호 하나만으로 신원, 사용 습관, 금융 활동이 촘촘히 연결되는 시대, 그 번호가 빠져나갔다는 것은 단순한 연락처 정보의 손실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인증번호 6자리를 입력해주세요.”


이 짧은 문장은 오늘의 한국인에게 일종의 디지털 통행문처럼 새겨져 있다. 금융 거래, 각종 서비스 가입, 비밀번호 재설정, 성인 인증까지.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휴대폰을 ‘디지털 신분증’처럼 제시하며 살아간다.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엄격히 금지한 이후, 그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휴대폰 번호가 채웠다. 표면적으로는 절대 식별자 하나를 감추는 데 성공한 듯 보이지만, 그 대가로 더 취약한 관문을 국가적·산업적 인증 체계의 중심에 배치해 버렸다.


보안의 관점에서 이 아이러니를 외면할 수 없다. 강철로 만든 금고(주민번호)를 지키기 위해, 정작 그 금고를 여는 열쇠(휴대폰 번호)를 투명한 유리 상자에 넣어 길목마다 걸어 둔 형국. 이것은 기술의 진보라기보다 위험을 더 얇은 층으로 외주화한 구조이며, 식별 체계를 강화했다는 착시에 머무른 ‘식별자의 역설’에 가깝다.


결국 문제는 기술을 얼마나 고도화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식별자로 삼고 어디에 책임을 둘 것인가에 있다. 인간의 일탈을 막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책은 그 빈틈을 줄이고, 위험이 특정 개인의 손끝에서 전체 사회로 번지는 경로를 최소화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인증이 아니라, 더 정확한 규준과 더 엄정한 식별자 관리다. 보안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구조는 언제나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S급 권한을 가진 B급 보안 정보


문제의 핵심은 데이터의 ‘중요도(권한)’와 현실에서 부여되는 ‘보호 수준’ 사이의 거대한 불일치다.


주민등록번호는 한국 사회에서 ‘S급’ 보안 정보로 여겨진다. 법은 수집을 사실상 봉쇄하고, 유출 시 기업을 파산시킬 만큼 강력한 징벌을 가한다. 그러나 휴대폰 번호는 어떠한가. 본질적으로는 단순한 ‘연락 수단’일 뿐이다. 명함에 찍혀 낯선 이의 손에 건네지고, 주차된 차 앞 유리 위에 보란 듯이 붙어 있으며, 택배 상자에 적혀 아파트 복도를 굴러다닌다. 사회적 통념 속 휴대폰 번호는 ‘B급’, 혹은 그 이하로 분류되는 공개 정보에 가깝다.


S급 위력의 B급 정보. Nano banana


하지만 이 B급 정보가 온라인에서 행사하는 권한은 주민번호와 맞먹거나, 때로는 그보다 더 강력하다. 한국 웹 환경에서 휴대폰 본인 인증은 단순한 신원 확인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실상 ‘만능키(Master Key)’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몰라도, 휴대폰 인증만 거치면 계정 비밀번호를 재설정할 수 있다. 누군가의 번호를 알고 기기를 혹은 심 정보를 일시적으로 점유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은행 계좌와 포털 이메일, 나아가 디지털 자산 전체를 탈취하는 일은 시간문제다.


가장 허술하게 관리되는 정보가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는 아이러니. 이 허점 위에서 작동하는 대한민국의 인증 체계는, 기술적 안전장치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휴대폰 번호라는 평범한 숫자 조합 하나가, 개인의 디지털 삶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현실. 보호 수준과 권한이 어긋난 이 기형적 균형은, 기술적 진보가 아닌 사회적 통념과 관습의 산물임을, 차갑게 드러낸다.



'연락처'와 '인증서'의 위험한 동거


데이터는 주고받음으로써 비로소 가치가 증폭된다. 주고받을 수 없는 데이터는 그 자체로 죽은 정보다. 그래서 기술 발전은 더 쉽게 데이터를 주고받도록 설계되어 왔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가 유출과 노출이라는 위협이며, 바로 보안의 그림자다.


보안의 근본 원칙 중 하나는 식별(Identification)과 인증(Authentication)을 분리하는 데 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리는 정보와 ‘내가 그 사람임을 증명하는 정보’는 본질적으로 달라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휴대폰 기반 인증 체계는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뭉뚱그려,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휴대폰 번호는 태생적으로 ‘연락처(Contact)’다. 나에게 연락하라는 신호로 남에게 주어야만 기능하는, 공개 지향적 속성을 지닌다. 반면 인증 수단은 오직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비밀 지향적 속성을 요구한다. 우리는 지금 동시에 두 가지를 수행하고 있다. 남들에게 “이 번호로 연락해 주세요”라며 명함을 건네는 한편, 은밀히 “이 번호가 내 금고를 여는 열쇠입니다”라고 알리는 셈이다.


공개되어야 마땅한 정보 위에 은밀해야 할 인증 기능을 덮어씌운 결과, 우리는 단순한 일상적 정보 노출만으로도 치명적 보안 위협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전화번호 한 줄이, 이제 개인의 디지털 금고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힘으로 전환되는 순간, 정보의 가치와 위험은 서로 뒤엉켜 끝없는 긴장을 만든다. 기술적 편리함과 구조적 취약성이 맞물린 이 아이러니는, 현대 디지털 사회가 품은 가장 은밀한 균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금고가 아니라 열쇠가 문제. Nano banana



대체 불가능한 '제2의 주민번호'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휴대폰 번호가 사실상의 ‘변경 불가능한 식별자’로 고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주민등록번호 유출이 두려운 이유는, 한 번 새어나가면 평생 족쇄처럼 따라붙기 때문이다. 휴대폰 번호 역시 이론적으로는 변경 가능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휴대폰 본인확인 서비스를 통해 생성되는 암호화된 연계정보(CI)는 온라인에서 우리를 식별하는 고유 코드다. 여기에 십수 년간 쌓인 인적 네트워크와, 관공서 및 금융기관에 등록된 각종 알림 서비스는 번호를 바꾸려는 시도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부과한다. 번호를 바꾸는 순간 잃게 되는 편의와 연결의 대가는 대부분의 사람을 포기하게 만든다.


결국, 한 번 유출된 번호는 다크웹에서 ‘검증된 DB’로 기록되어 영원히 유통된다. 보이스피싱과 스팸 메시지의 끊임없는 타깃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주민번호를 대체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수단이, 정작 주민번호와 다르지 않은 ‘고착화의 덫’으로 작동하게 된 아이러니. 안전을 위해 마련된 장치가 오히려 새로운 위험을 낳고, 그 위험은 사회적·기술적 구조 속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번호 하나가 개인의 디지털 삶 전체를 지배하고, 그 권한이 한 번 침해되는 순간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 우리는 편리함과 안전이라는 두 이름 아래, 또 다른 영원한 족쇄를 만들어온 셈이다.



편의성이라는 마약에서 깨어나야 할 때


물론 휴대폰 인증은 편리하다. 별도의 토큰이나 복잡한 절차 없이, 문자 한 통이면 모든 절차가 끝난다. 그러나 보안에서 편의성은 언제나 위험을 담보로 한다. 우리는 그동안 주민번호라는 ‘거대한 문’을 잠그는 데만 집중하며, 창문처럼 활짝 열린 휴대폰이라는 또 다른 통로를 외면해왔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휴대폰 번호를 기반으로 한 현재의 본인 인증 체계는 사상누각과 같다. 보호 순위가 낮은 정보를 최상위 인증 수단으로 겹쳐 놓은 기형적 구조를 그대로 두는 한, 개인정보 유출 사고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연락 수단과 인증 수단을 철저히 분리하고, 휴대폰 점유 인증에만 의존하는 ‘단일 실패 지점(Single Point of Failure)’을 제거하는 것, 이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다.


편리함에 취해, 대문 열쇠를 동네방네 뿌리고 다니는 꼴인 지금의 시스템을 방치한다면, 다음 피해자는 필연적으로 당신이 될 것이다. 주민번호를 무서워 피했더니, 더 교묘하고 취약한 괴물, 휴대폰 번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식별과 인증의 혼재. Nano banana


휴대폰 인증만이라도 절제하면, 잠시 불편을 감수하는 대가로 보안은 충분히 강화될 수 있다. 통신사 마케팅과 핀테크, 금융기관의 안일한 편의주의에 의존하는 대신, 정부가 원칙의 영역에서 나서야 한다. 규제로 단순히 억압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디지털 사회에서 필수적인 안정 장치를 세우는, 근본적이고 시급한 결단이다.


편의와 안전이 충돌하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손쉽게 열리는 문 하나가 가져올 위험을 직시하고,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보를 다시 올바른 자리로 돌려놓는 일.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디지털 식별 체계의 가장 시급한 윤리적 과제다.


그저 감정적으로 미국 기업이니, 불매운동이니 하는 책임감없는 목소리는 답이 될 수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문에 현답이 불가능한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