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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의 궤도

늦은 아침 생각의 시창작 20

by 박 스테파노

발목이 잠기는 계절이었다. 석촌호숫길의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뼈마디마다 들이찼다. 새벽 다섯 시의 공기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얼리기에 적당했고, 나는 매일 흰 옷을 입기 위해 검은 길을 걸었다.


수녀님의 도장이 찍혀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유년. 신심은 어쩌면 얇은 천 위로 떨어지는 촛농처럼 뜨겁고도 따가운 것이었을까. 흔들리는 향로를 잡은 소년의 손끝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를 때, 미래라는 짐승은 아직 성당 문턱을 넘지 못했다.


오직 주머니 속에서만 굴러가는 세계가 있었다.

열 개의 알갱이와 하나의 매듭.


손가락 끝으로 더듬거리는 딱딱한 기도가 얼어붙은 허벅지를 위로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위해 만져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굴려야 했던 날들. 그 둥근 궤도를 따라 돌면, 어둠은 잠시 똬리를 틀고 물러앉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빵가게처럼, 혹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비보처럼.


우리는 나쁜 일을 상상하지 않음으로써 지금을 견딘다.


첨탑이 찌르지 못한 하늘은 여전히 높고, 골방의 어둠은 묵직하다. 그러나 찢어지는 이별도, 모두가 떠난 자리도, 결국 둥근 알갱이를 쥐는 악력 안에 있다.


내일은 알 수 없어 두렵고

오늘은 만질 수 있어 안전하다.


두려움이 발목을 덮기 전에 나는 다시 주머니 속에 손을 넣는다.


미래를 밀어내는 힘으로, 지금 여기,

딱딱하고 둥근 현재를 만진다.

Nano ban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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