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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an 07. 2017

흐르는 대로 살아가 보자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10킬로그램, 마른 미역 한 봉지, 계란 한 판, 인스턴트 커피 한 박스, 조미김 한 봉지, 모닝빵 한 봉지, 검정색 팬티스타킹 다섯 개, 크리넥스 화장지 세 개, 그리고 빨간 사과 열 개. 영수증에는 94,050원이라고 적혀 있다.
<정한아 ‘애니’를 읽다가>



중학교 1학년 되는 조카가 자못 진지하게 묻는다.
“이모, 어떤 나이를 말할 때 중반 하고 후반을 나누는 기준이 뭔지 알아?”
“뭔데?”
“나이에 ‘ㅅ’이 들어가면 중반이고 ‘ㅂ’이 들어가면 후반이래. 이모는 서른여덟이니까 이제 후반이다. 맞지?”
그렇게까지 콕 집어서 말해주지 않아도 꺾어진 삼십 대인 거 안다,라고 어금니 꽉 깨물고 대답한 나. 정말 완벽히 30대 후반이 되었다. 내 나이 서른여덟, 낼모레면 마흔인데 엄마는 아직도 점심시간이 지나면 뭘 먹었는지 묻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묻는다. 엄마는 내가 뭘 먹고 다니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할까? 엄마가 물으면 김치찌개, 돈가스, 라며 단답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은 하지만 여전히 ‘엄마는 점심 뭐 먹었어?”라고 되묻지 못한다. 난 또 왜 그렇게 그 말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내가 뭐 먹었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할까


근데 참 신기한 건 엄마처럼 내가 남편에게 뭘 먹었는지 묻는다는 것이다. (소오름) 말 그대로 이런 내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이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거의 작용 반작용의 법칙처럼 자연스럽다. 최근 남편이 갑작스럽게 휴가를 내게 되어 당분간 집에 있는데 회사 다닐 때는 그저 뭐 먹었냐 물으면 그만이었지만 이젠 정말 뭘 먹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우리 집 냉장고 사정 내가 뻔히 아니까. 다행히 그는 라면이나 떡볶이를 좋아해서 굳이 삼시세끼 밥을 먹지 않아도 아주 잘 지내는 타입이지만 밥을 너무 안 먹으니 그것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다. 아침은 패스하고 점심, 저녁 하루에 두 끼 먹는 거 점심은 대충 그럭저럭 챙긴다 치고 저녁은 어떻게든 가정식을 먹이겠다는 생각에 퇴근하면서 부랴부랴 마트에 들러 찌개거리와 밑반찬 재료를 산다. 애호박 하나 두부 한 모 그리고 진미채 한 봉지와 달걀 한 팩을 사서 헉헉 마른 숨을 내뱉으며 언덕을 올라 집에 도착한다. 가방을 침대에 툭 던져 놓고 외투를 벗어 장롱에 대충 쑤셔 박은 다음 바로 주방으로 달려가 장 본 것들을 손질하기 시작한다. 애도 좀 둘러보고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내가 놀다 온 것도 아닌데) 시작해도 될 것을 쫓기는 사람처럼 싱크대 앞에 서서 뼈가 부서져라 쌀을 박박 씻는다.
“된장찌개 할 건데 괜찮지?”
미리 정한 메뉴대로 재료를 샀으면서 괜히 긴장된 마음으로 남편에게 묻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허락하는 사람 같다고 느끼는 건 기분 탓인가. 정작 당사자는 저녁 메뉴 따위 별 관심 없다는 표정이다. 사실 뭘 해줘도 다 잘 먹는다. 뚝배기에 멸치 몇 마리 띄워 넣고 물이 끓이면 된장을 풀고 호박과 두부를 썰어 넣는다. 팔팔 끓어오르면 파를 송송 썰어 넣고 간을 보고 마무리. 이 간단한 걸 왜 내 손으로 해야만 안심이 되는 걸까. 밥을 차려 놓고 남편과 아이를 식탁에 불러 앉히면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제 입으로 밥이 들어가는데 나는 아이 입에 먼저 밥을 떠 넣는다. 찌개는 식어가고 내 밥은 굳어가지만 애한테 밥 먹이는 게 우선이다.

illust by 윤지민

이쯤에서 또다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놀다 온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동동거릴까. 아이가 밥을 오물거릴 동안 급하게 한 숟갈 떠먹는다. 그러다 생각한다. 맞아. 우리 엄마도 그랬지. 일 갔다 오면 앉지도 않고 밥해서 먹이기 바빴지. 내가 딱 그러고 있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남편이 빨리 와서 밥 차리라고 명령 내린 것도 아닌데, 내가 저절로 움직여 놓고 왜 신세 한탄하고 있나. 내 몸은 이미 아내, 엄마라는 직분으로 다듬어져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 같다. 뭔가 만들어 먹는 거보다 사 먹는 게 더 합리적인 요즘 그냥 대충 먹으면 될 것을 왜 끼니마다 뭐 먹을지를 걱정하고 있나. (그렇다고 끼니마다 대단한 걸 해 먹는 것도 아니다. 햄버거 시켜 먹을 때도 많다.) 근데 걱정하는 게 사명감처럼 다가온다. 물론 내 배가 고픈 탓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안 살면 될 것을 강박증처럼 살아놓고 한숨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밥 하기 싫을 땐 하기 싫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고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시켜도 군말 없이 따르는 남편이 있다는 것. 친정엄마 또한 자식들을 그렇게 챙겼지만 맛있는 건 본인 입으로 먼저 들어갈 때도 있고 혼자라도 시원한 물냉면이 먹고 싶으면 훌쩍 나가서 드시고 오는 자유로움과 체력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읽은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작가가 어느 여성 소설가를 찾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주로 밤 10시부터 새벽 3~4시까지 글을 쓴다는 말에 아이들 아침밥은 어떻게 챙겨주냐 물으니 아침밥 안 먹는 아이로 키우면 된다는 답이 돌아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났다는. 작가 본인도 여자고 엄마이면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고 애들 밥 챙겨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생각된 자신이 얼마나 인습에 얽매여 있는지, 반면 그 소설가의 육아 거부와 밥 안 하는 엄마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모습이 너무 커 보였다는 말에 나 또한 깊은 공감을 했다.


남편은 빨리 와서 밥 차려달라고 말 한 적 없다. 퇴근 시간 5분 10분 늦어지는 것에 안절부절못한 건 나 자신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밥 하라고 강요한 적 없다. 밥 해주고 뿌듯해한 것 또한 나 자신이다. 내 배 고프지만 아이 먼저 먹여 놓고 열심히 해준 밥 잘 먹고 있는 남편을 가재 눈으로 째려본 것도 나다. 그에게 애 밥 좀 먹여,라고 말했으면 그랬을 것이다. 나도 내가 정해놓은 틀에 갇혀 사는 것이다. 엄마, 아내라는 역할의 울타리를 스스로 친 거다. 내가 그렇게 안 살면 될 것을 강박증처럼 살아놓고 왜 한숨 푹푹 쉬었을까. 아, 못하면 어때… 간만에 본 영화 ‘라라랜드’의 대사처럼 그냥 흐르는 대로 살아가 보자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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