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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Sep 30. 2024

죽음을 대하는 자세

내가 힘들 때마다 쉽게 나오는 말이 있다. ‘죽겠다.’, ‘뒤지겠다.’. 얼마나 힘든지를 표현하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말했다. 지금 당장 죽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그랬던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지나가는 대머리 아저씨에게 대머리라고 웃으며 놀리는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나 자신이 그 상황에 부닥치면 웃을 수 없게 된다. 임박해야 조급해진다는 말이다) 또 가까운 이의 죽음을 조금은 이르게 경험하며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죽음에 의연해진 것 같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점점 내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심각한 병에 걸린 것도 내 수명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보다 더 인생을 오래 산 이들에게는 건방지거나 귀엽게 느껴질 말일 수 있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전의 더 생기 넘쳤던 나와 다름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거나 나이가 들수록 늙고 연약해져 죽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내가 노쇠해 죽는다는 보장도 없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여러모로 이전보다는 더 각오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 중이다.


주변의 사망 소식은 더욱 내게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어릴 적부터 TV로 만나 친숙했던 배우, 가수, 운동선수 등 많은 이가 세상을 떠나고 있다. 젊은 또래들도 여러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 우스갯소리 같던 “갈 때는 순서가 없다”라는 말이 뼈 있는 말로 느껴진다. 나와 친분은 없었음에도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도 점점 소멸하는 기분이 든다. 물론 새로운 인연을 꾸준히 맺지만, 이제껏 지켜온 인연의 수가 점점 줄어들면 결국 나만 남을 것 같은 외로움과 괴로움이 나를 괴롭힌다.


얼마 전 엄마는 가족 모임을 다녀오셨다. 엄마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이모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죽는 게 두렵다. 이렇게 좋은 것들 더 못 누리고 간다는 게 너무 아쉽다”라고. 먼 지방으로 형제, 자매를 만나러 가는 것이 피곤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올해가 아니면 다음 해에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엄마는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신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와 늘 함께할 것만 같은 엄마, 누나의 존재가 금방 사라질 수도 있겠다. 심지어 내가 먼저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생겼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조금씩 죽는 게 겁난다. 죽음은 어떤 느낌일까?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 너무 피곤해서 그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드는 날이 있었는데 만약 죽음의 순간이 이렇다면 그렇게 무서운 일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느낌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공포, 어둠, 한기 이런 것들이 찾아오는 것이라면 나는 죽으면서도 곱게 죽지는 못하겠다는 상상이 들었다. 아마 최후의 순간에 죽고 싶지 않다며 몸부림치다 죽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받아들이자며 마음을 다스렸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아무튼 받아들이자. 언제일지 모르니 그동안은 열심히 살자. 받아들이니 삶의 태도를 정립할 수 있었다. 죽기 전에 해야겠다며 짠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 내에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부질없는 행동은 아니었는지 물음표를 던지기도 했다.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어차피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니 그냥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됐다.


동시에 위인은 안 될지라도 티끌만큼이라도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계속 물어보며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죽음을 앞둔 사람의 참된 모습이 아닐지 생각하게 됐다. 물론 나이가 더 들면 생각이 바뀔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살려 한다.


여담으로 최근에 죽음 이후 나의 처리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해독 찜질이라는 것을 했는데 흙을 깊게 판 구덩이에 몸을 넣고 다시 그 흙을 덮어 30분 정도 땀을 배출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온몸에 덮인 흙이 뜨거워 괴로웠지만 더 괴로운 것은 흙의 무게였다. 몸이 너무 갑갑해 참기 힘들었다. 찜질을 하는 동안 나는 죽음 이후 매장보다는 차라리 순식간에 타버리는 화장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으면 답답함이나 뜨거움을 못 느끼니 상관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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