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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Jun 02. 2018

블루워터 호텔


오지 건축의 매력에 빠지다


당연하지만 그렇지만 무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것, 배울 점은 아주 가난한 나라의 오지에서도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깜빡 잊고 지나칠 뿐이다. 오히려 우리가 잃어버린 건축의 순수함을 그들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건축, 인간을 포함한 다른 주변 생명체의 삶, 자연환경을 엮어 놓는 그들의 순수한 기법을 우리는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망쳐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정확한 답은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조금 다양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는가 싶다. 가난한 나라의 건축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만함은 거두었으면 한다.   

건축을 가르치러 가난한 나라인 이곳에 왔다. 여기에서 내가 건축에 관해선 배울 게 없을 거라고 오만하게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곳에는 생각보다 훌륭한 건축물이 많았다. 나는 그 사실에 너무 흥분했다. 기대하지 못한 상을 탄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난 조금 더 겸손해 지기로 했다.



Hello, Bawa!

스리랑카에 2년을 지내면서 제프리 바와의 건축물을 수소문해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 현지 친구들도 나의 이런 열정에 한몫 거들기 위해 자료를 찾는 일을 돕거나, 건축물의 소재지를 찾아주는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와의 작품을 칭찬하며 연신 그 감동을 전하는 내 모습에서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꼈을 테다. 그런 자부심은 충분히 정당하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스리랑카에는 자국의 건축역사를 정리한 자료가 턱없이 모자랐다. 언제나 자료 때문에 늘 고생이었다. 한 외국인이 영어로 쓴 과도하게 비싼 책이 있긴 했다. 현지인이 받는 월급(약 20-25만원)의 1/3이니, 이들은 내가 이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곤 몹시도 부러워했다.

‘아니, 이렇게 비싼 책을.’ 

‘세상에나! 이 귀한 것을.’

그들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빌려주면, 행여 종이에 지문이라도 남을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는 게 아닌가.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책을 읽는 그들이 안쓰러웠다. 마치 고문서라도 다루듯 하는 그들의 손길에서 난 결혼식 때 신랑이 끼는 흰 장갑이라도 가져다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렇게 조금씩 더디게 자료를 모으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자료가 모이고 건축물의 소재지가 파악되면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바와는 워낙 재능이 뛰어난 건축가이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자질을 갖춘 건축가가 부족했던 탓에 규모가 조금이라도 크거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들은 바와의 건축사무소로 몰려들었다. 작업의 범위는 광대하다. 아마 바와는 가리지 않고 프로젝트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죽을 때까지 혼자서 살았고, 일과 여행이 전부였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되는 일도 아니다. 그나저나 그가 벌어놓은 많은 돈들은 어디로 갔을까.


스리랑카 국회 건물, 은행 건물, 관공서, 공무원을 위한 연구 및 교육시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의 교육시설, 고아원, 호텔, 주거시설, 상업 및 오피스 건물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공서 건물이나 정부부처의 건물은 출입이 까다롭다.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스리랑카 국회를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관공서는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혹은 어찌 운이 좋아 들어가더라도 사진을 찍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고,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둘러보고 나오길 재촉당한다. 건물 안에서 계속 사람이 졸졸 따라다니는 통에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다. 


푸른 물을 담은 블루워터 호텔


호텔이나 상업 건물은 바와가 지은 건물 중에 그나마 접근이 쉬운 건물이다. 또한 비교적 많은 자본이 투자된 대형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자연이나 외부환경에 대한 그의 접근방법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블루워터 호텔은 제프리 바와가 마지막으로 설계한 호텔이다. 노년의 그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항상 개인 전동차를 운전하면서 호텔이 지어질 대상지를 돌아다녔다. 거동조차 힘들 정도의 건강상태도 바와의 건축에 대한 열정을 꺾어 놓진 못했나 보다. 노년 건축가의 절제되고 정교해진 건축을 만날 수 있는 블루워터 호텔은 바두와(Badduwa)에 위치해 있다.


블루워터로 가는 길

바두와는 콜롬보에서 골 로드(Galle Road)를 따라 남부로 약 1시간 15분 거리로, 모라투와(Moratuwa)와 깔루타라(Kalutara)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전통이 있는 도시로 예전 그러니까 포르투갈이 스리랑카로 침입하기 전부터 아랍상인들이 드나들던 항구가 있던 무역을 위한 도시다. 아랍상인들은 스리랑카의 대표적 생산물인 향신료와 보석을 주로 거래했고, 상인들을 위한 왕래로 주변 마을이 점차 발전했다. 지금도 상인들의 후예인 무슬림들이 모여서 사는 촌락이 있다. 


바두와는 초행길이라 지리를 잘 몰라 버스를 타자마자 창밖을 내다보며 어디쯤 가고 있는 지를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스리랑카에서 길을 찾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식미지 당시 영국의 영향을 받아 도로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작은 골목길도 이름이 있을 정도다. 길 이름과 번지만 알면 쉽게 가고자 하는 곳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길가의 상점들은 대부분 주소를 영문으로 써놓아서, 버스를 타고 가다 상점의 간판만 보면 어디쯤 가고 있는지 파악이 가능하다. 


창밖에는 소가 먹을거리가 없어 벽보를 뜯어먹고 있다. 얼마 전에 치른 선거 때 붙여놓은 벽보다. 어느 정당인지 모르지만 이제 막 소가 그의 목덜미를 먹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도 많은 길거리의 개들은 방황하고 있다. 달리는 개, 도로에서 자빠져 자는 개, 괜히 암놈에게 수작을 부리는 개, 어미의 빠른 걸음을 놓친 작은 강아지까지 다양하다. 배 나온 아저씨가 인도에서 생산된 오토바이를 몰고 있다. 어린아이 둘을 태우고 거기에다 아내까지 태운 채 질주를 하고 있다. 한 가족이 모두 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마지막에 앉은 여인은 손 하나 잡지 않고도 균형을 잘 잡고 있다. 신기하기도 하지만,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이 든다. 

수없이 많은 스리랑카의 간판에는 세계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침투한 코카콜라의 기업정신마저 돋보인다. 스리랑카 크리켓 국가대표선수가 시원하게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짓는 표정은 만국 공통의 표정인가. 어찌도 저리 똑같은 표정을 만들어 낼까. 이뿐만이 아니다. 간판에는 발리우드 스타들을 동원한 이동통신사, 스프링이 없는 싸구려 침대, 번거롭지 않게 요리가 가능한 분말 카레, 손 흔들며 웃고 있는 현직 대통령까지 등장한다. 스리랑카의 간판은 이렇게 입을 거리와 먹을거리뿐만 아니라 정치의 광고판으로 사용된다. 현재 이 나라가 생산하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산업의 발달 정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도, 이 나라 정계의 주요 인물들이 국민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셀 수도 없이 많은 간판들을 보면서 지루함을 달래다 보니, 어느덧 바두와의 주소가 찍혀있는 간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두와에 도착했나 보다. 조금 더 버스를 타고 지나가니, 바두와 타운 근처에 도착하기 전에 ‘블루 호텔(the Blue Water Hotel)'이 쓰인 입간판을 보고 승차원에게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타운에서도 약간 벗어난 곳이라 동네는 한적했다.

친절하지 않은 표지판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헷갈리게 하지만, 늘 친절한 현지인의 도움으로 길을 헤매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다.



늙은 영감의 힘을 보여주는 호텔

주도로에서 해안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철도길이 보인다. 이 철도길과 바닷가 사이에 블루워터 호텔이 있다. 특별히 아름다운 해변도 아니고, 교통이 편리한 곳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을과 주변에 볼거리도 딱히 없어 보이는 여느 평범한 스리랑카의 한 동네다. 한마디로 별 볼 것 없는 곳에 바와는 호텔을 설계한 셈인데, 주차장을 지나 주출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느끼게 된다. 바와의 힘이란.

‘늙은 영감, 영글대로 영글었구먼.’


바와는 항상 뭔가를 통과해서 주된 건물의 장소로 안내하길 좋아한다. 스리랑카 국회의사당은 거대한 호수의 중간을 직선으로 뻗은 긴 통로를 지나게 한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시마 말라카에도 물 위를 지나는 작은 다리가 있다. 물이 아니면 칸달라마 호텔처럼 작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게 하거나, 벤토타 비치호텔이나 라이트하우스 호텔처럼 무뚝뚝하고 거친 성벽과도 같은 벽을 통과하게도 한다. 주된 공간으로 안내하기 전 방문자의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듯, 마치 운동 전 스트레칭을 하는 것 같다. 본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푸는 것처럼.

블루워터 호텔도 마찬가지. 호텔 리셉션 홀로 들어가기 위해 농구장 정도의 크기에 물을 채워 그 사이를 지나간다. 바람이 불어 수면에는 잔잔한 물결이 생긴다. 그 옆으로 객실 건물이 보이고, 다듬어진 잔디는 푸르다. 직선으로 뻗은 길은 호텔의 로비로 이어진다. 걸어가는 동안 이 길의 끝에 보이는 수영장과 호텔 앞마당, 해변의 모습이 로비의 어두운 공간과 상반되게 유난히 밝게 보인다. 



저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하게 만든다.


무난히 디자인된 로비와 리셉션 홀을 지나자 드디어 잔디가 깔린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원에는 코코넛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 규모가 큰 수영장이 보인다. 가장된 동작으로 수영장에 뛰어드는 남자는 연인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봐주길 원한다. 아빠와 아들이 오랜만에 작은 유희에 빠져있다. 비치볼을 던지고 받는다. 아이는 힘이 약해 아빠에게로 공이 닿지 않고, 아빠는 자꾸 아이의 거리를 벗어난 곳으로 공을 던진다. 더군다나 바람마저 세차게 분다. 수영장 옆에는 누구 하나 쫒아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힘이 넘치는 어린아이가 있다. 그저 달리고 싶은 시절이다. 작은 육체의 몸이 좁을 정도로 넘쳐나는 에너지를 가질 때니까. 일 년 동안 지루하게 일을 하며 휴가를 고대해온 사람들이다. 휴가 동안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혹은 무진장 게을러지기로 약속한 사람처럼 그들의 몸동작은 느리고 여유롭다. 사람들의 즐거운 소란 속에서도 책장을 잘 넘기고 있는 비치베드에 누운 중년의 부부들이 있다.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치고 도착한 호텔에서 신부와 신랑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가장 의미 있는 날을 위해, 가장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장막을 걷어낸 블루워터 호텔은 담 하나를 두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놓았다.



물의 잔잔한 물결을 담아낸 호텔

호텔의 이름부터 심상치 않더니, 이곳저곳에는 물을 이용한 공간이 많다. 로비 앞에는 층을 진 계단식 연못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진다. 로비 앞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수영장이 있고, 레스토랑 앞에도 야자수 섬을 띄워 놓은 수변공간이 있다. 레스토랑 앞 야외에 놓인 파라솔 밑에 자리를 잡았다.  

바와가 지은 호텔을 찾으면 꼭 하는 행동 중의 하나인, 커피를 주문하려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호텔 직원이 보이지 않는다. 호텔 마당이 너무 크다 보니 직원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는 곳이 많아 보였다. 다행히 옆을 지나가는 직원이 있어, 차 한 잔을 부탁했다. 늦은 오후, 한낮의 강렬함은 그 열기를 잃어가고 햇빛의 선명함도 약해지고 있다. 빛의 세기가 약해짐에 따라 사물의 색은 점점 채도를 잃어간다. 무채색에 가까워지는 사물들을 보고 있으니, 한낮의 활발히 움직이던 마음이 조금씩 느긋함을 찾아간다. 시간이 더 지나면 아예 암흑에 휩싸이는 밤이 다가올 것이다. 

코코넛 섬

레스토랑 앞에는 코코넛 나무 하나를 위한 작은 섬이 여러 개 물 위에 떠 있다. 바와는 호텔을 지으면서 최대한 자연의 파괴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면적을 제외하면 벌목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예전부터 자라던 곳의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그대로 자랄 수 있게, 이렇게 하나하나 섬을 만들어 주었다. 원래의 주인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사이에는 자신이 원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자연을 대하는 그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화려한 색상보다는 검정과 흰색이 주로 사용되었다. 주변 환경에 유난스레 돋보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건물의 그런 겸손함은 자연스레 주변 바닷가와 야외수영장, 그리고 넓은 마당에 촘촘히 자라는 코코넛 나무와 어울린다. 사람들은 건물을 즐기러 온 게 아니라, 자연을 즐기기 위해 이 작은 나라 스리랑카를 찾았다. 건축가는 자신의 건축을 뽐내기보다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연을 돌려주는 건축을 했다. 


건물은 햇빛을 잘 제어하고 있으며,
바닥은 은은한 광이 나고,
주위에는 물이 흐른다. 


공간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자극적이지 않고 편안하다. 특히 그가 사용한 그릴 차양은 뜨거운 햇빛을 부드럽게 산란시킨 다음 물 위에서 반사되어 내부의 천장으로 빛을 보낸다. 강렬한 태양을 얌전한 빛으로 바꾸는 필터 역할을 하고 있다. 곳곳에 설치된 차양시설과 천장에 달린 펜만으로도 실내의 공간은 쾌적하다. 굳이 냉방시설이 없어도, 약간의 열기를 즐길 인내심만 있다면 충분하다. 인공적인 냉기가 아니라 바닷바람을 느끼며, 약하게 걸러진 태양이 열대 해양의 느긋함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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