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리하는 법》에서 말하는 책 정리의 불가능성
이쯤 되면 사기 아닌가? 《책 정리하는 법》(조경국, 유유, 2018)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책 정리법은 30쪽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주제별로 정리하기부터 해서 출판사, 저자, 시리즈별로 정리하기, 읽을 순서대로 정리하기 등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전부다. 부제가 ‘넘치는 책들로 골머리를 앓는 당신을 위하여’인데 그 ‘당신’에는 저자도 해당하는 게 아이러니. 급기야는 ‘정리하지 않기’를 정리법의 마지막 항목으로 넣는 천연덕스러움까지!
하지만 재미있는 책, 시간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다. 특히 저자를 직접 만난 적 있는 나는 적당히 살집이 있고 콧수염을 기른 50대 아저씨가 땀을 벌벌 흘리며 책을 정리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철퍼덕 앉아서 쉬고 있는데 옆에서 부인이 얼른 정리하라고, 거실이 책 천지라 지긋지긋하다고 타박하다가 등짝을 후려치는 장면이 그려져 한 편의 콩트를 보는 기분으로 읽었다.
저자는 그렇게 넘치는 책을 감당 못 해 집안 곳곳을 사실상 책방으로 만들더니 결국에는 헌책방을 열어버린 애서가, 아니, 장서가, 아니,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책 호더’다. 호더(hoarder)란 물건을 모으기만 하고 버리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왜 가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를 보면 나오는, 동네 재활용품을 죄다 주워 와서 집 안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쌓아 놓는 사람이 호더의 극단적 예다.
세상에는 언뜻 멀쩡해 보이지만 집에 적게는 수백 권, 많으면 수천, 수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책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하는 책 호더가 은근히 많다. 아니, 대놓고 많다. 그들은 집에 책이 많은 것을 숨기지 않고 자랑한다. 책은 그래도 되는 물건이니까. 누가 집에 명품 수백 점을 쌓아놓고 힘든 척하면 속으로 욕하지만 책 자랑은 용납이 되고 혹시 상대방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긴 수다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아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그런 수다가 고플 것이다. 주변에서 동지를 만나기가 쉽지 않기에.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이유도 거기 있다. 서점에만 가면 괜히 설레고 꼭 뭐라도 한 권씩 사 오는 사람으로서 공감대.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우리 사이의 공통점은. 나는 저자의 대척점에서 책을 마구 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다 읽은 책은 재활용장행이다. 중고로 팔면 안 될까? 하도 밑줄을 그어놔서 안 받아준다. 그러니 버릴 수밖에 도리가 없다.
집에 보관해 놓으면 안 될까? 나는 집에 물건이 넘쳐나는 게 싫다. 집에서 다른 구역은 어쩔 수 없어도 내가 작업실로 쓰는 서재만큼은 적어도 보이는 곳에는 물건을 최소화한다는 게 원칙이다. 그래서 책도 가로, 세로 각 4칸씩 있는 총 16칸짜리 책장에만 보관한다. 여기 못 들어가는 책은 모두 재활용장의 차가운 바닥으로 내쫓긴다. 주로 다 읽은 책이 그런 신세가 된다. 한번 읽은 책은 잘 안 읽기 때문이다. 혹시 나중에 다시 읽어야 하면 다시 사면 그만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텐데 우리는) 책 사는 돈은 안 아까우니까.
그렇게 버리면 밑줄 친 부분은? 노트 앱에 저장한다. 노션에 저장하다가 지금은 옵시디언으로 전환했다. 공간이 문제라면 전자책으로 사면 되지 않을까? 원래는 종이책보다 전자책 구매 비율이 더 높았다. 주문 즉시 읽을 수 있고 자리도 차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맛, 그 위에 내가 좋아하는 색깔의 펜으로 주욱 밑줄을 긋는 맛, 서점에서 뭐라도 한 권 사서 들고 오는 맛을 포기할 수 없어서 여전히 종이책을 산다. 특히 요즘은 아이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더 많이 산다. 전자책은 아무리 전용 단말기로 읽는다고 해도 아이들 눈에는 태블릿을 보는 것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영상물보다는 책이 인간의 발달에 더 효과적이라고 여전히 믿는, 어쩌면 옛날 사람이다.
여하튼 그래서 나는 책을 많이 사고 또 많이 버린다. 한번 팔린 책이 중고시장으로 흘러 들어가서 출판사의 잠재적 수익을 훼손하는 일을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 아닐까? 하긴, 중고시장에 책을 팔지 않는 건 책을 무조건 모으기만 하는 호더들도 마찬가지긴 하다. 호더들은 그 특성상 사는 것도 무지막지하게 사기 때문에 특A급 빛과 소금이다. 그들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소설가 김영하)라는 말로 책 증식을 정당화한다. 이런 책 호더가 우글거리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집집마다 책을 수천 권씩 가진 세상을. 그러면 출판계도 살고 가구업계도 살고 나라 경제에도 큰 이득이 될 것이다. 번역가인 내게도.
하지만 그런 세상이 와도 나는 책 호더가 되기를 거부한다. 나는 무엇이든 물건이 넘쳐나는 게 싫다. 그렇다고 내가 호더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나도 딱 하나 호딩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피자 호더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야식이 허용되는 금요일 밤이면 꼭 피자를 주문한다. 라지 피자 8조각 중 4조각을 먹고 남은 4조각을 정성껏 지퍼백에 넣어 냉동실에 넣는다. 때때로 파파존스에서 금요일 1+1 행사로 주문하면 총 16조각 중에서 4조각을 먹고 12조각이 보관된다. 그러고는 주중에 피자 생각이 나면 냉동실에서 두 조각쯤 데워먹는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 냉동실에는 항상 피자가 잔뜩 들어 있다. 세상 모든 음식 중에서 피자를 가장 좋아하는 나는 냉동실을 열 때마다 흐뭇해진다. 아니, 냉동실에 피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에어프라이어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따뜻해진다. 이런 게 책 호더들의 심정이 아닐까. 고단한 일상에서 보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게 늘 내 곁에 잔뜩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